68년 6월 8일, 갈바 (GALBA, BC 3 ~ AD 69)가 로마 원로원에 의해 로마 제국의 6대 황제로 선포
갈바 (SERVIVS GALBA IMPERATOR CAESAR AVGVSTVS, 기원전 3년 12월 24일, 이탈리아 테라치나 인근 ~ AD 69년 1월 15일)는 로마 제국의 제6대 황제이다.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SERVIVS GALBA IMPERATOR CAESAR AVGVSTVS)
.출생: BC 3년 12월 24일, 이탈리아 테라치나 인근
.사망: AD 69년 1월 15일 (72세), 로마
.부모: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뭄미아 아카이카
.배우자: 아이밀리아 레피다
.종교: 로마 다신교
* 로마 제6대 황제
.재위: 68년 6월 9일 ~ 69년 1월 15일
.전임: 네로 / 후임: 오토
68년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빈덱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68년 6월 8일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다.
다음날인 6월 9일 즉위해 69년 1월 15일에 죽음으로써 69년에 죽은 첫 번째 황제(왕)가 되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가문의 초대 황제다.

○ 생애 및 활동
갈바는 기원전 3년 12월 24일,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20년, 23살의 나이로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33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되었고 39년에는 칼리굴라에 의해 라인 강방위군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45년 그는 북아프리카 총독에 임명되었다.
49년, 그는 소 아그리피나가 그 당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였었는데 갈바는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10년 정도나 정치에서 은퇴생활을 해야 했다.
61년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68년에는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빈덱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68년 6월 8일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다. 10월에 로마로 돌아왔는데 로마에 돌아와 그가 국정에 관하여 내린 조치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중 하나가 네로의 선물을 몰수한 것으로 이 조치는 재정을 다시 건전화시킬려고 그런 것이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거기다 수하들까지 탐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아 갈바에 대한 사람들의 신임은 더욱 실추되기 시작한다.
69년 1월 2일에는 라인 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1월 10일에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Lucius Calpurnius Piso Licinianus)를 입양하여 자신의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렸는데 이는 자신이 갈바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오토를 분노케하여 오토의 쿠데타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토는 1월 15일에 황제를 수행하던 중 일행에서 빠져나와 근위대에 접근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이에 당황하여 반란군과 대항하려 했으나 오토 측의 기병에 공격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 평가
로마인들에게 네로를 제외한 네 황제의 해 동안 제위를 차지한 세 황제 중 비텔리우스 다음으로 평가가 좋지 않다. 황제 이전 업적은 누구나 인정하고 즉위 이후에도 인품에 대해서는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나, 통치자로써는 부적격자였다는 데 당시에도 로마인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네로의 몰락이 시작된 68년 빈덱스의 반란 당시, 갈바는 타키투스가 기록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로는 누구보다도 갈바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제위에 욕심이 있던 이들도 갈바를 앞세워 그를 중심으로 네로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갈바는 제위에 대한 야망만 남았을 뿐 젊은 시절 보여준 공정함과 엄격함, 성실함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1년도 채 안 되는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사태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실책을 저질렀고, 결국 이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69년 12월까지 내전이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로는 누구보다도 갈바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실제로 제국 통치를 맡겨보기 전까지는…”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는 후대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도 비슷하게 서술했다. 그는 갈바 전기에서 황제로서의 자질이 나쁘지 않았으며 의지도 충분했기 때문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서는 의도는 좋았다는 식으로 평가했지만 무기력하고 측근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정치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평을 덧붙였다.
다만 갈바의 업적은 뜻밖에도 오래 살아남았다.
그는 제10게미나 군단을 포함하여 군단을 세 개나 편성했는데, 이들은 제정 내내 모두 제 기능을 발휘해서 후대에도 가끔 “갈바 군단들”로 불렸다. 이들은 3세기의 위기를 거쳐서도 존속해서 4세기 즈음에는 모두 정예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 개편되었고, 11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로 위기를 겪을 때까지 존속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갈바의 집권기는 공화정 시기부터의 내려온 정통 로마-이탈리아 명문가들이 제위를 차지해 그 주도권을 잡은 마지막 시기가 되었고, 그가 있던 네 황제의 해는 공화정 시대동안 원로원을 차지한 노빌레스의 시대가 끝난 사건이 되었다. 물론 노빌레스 출신으로 제위를 차지한 이들이 3세기까지 있기는 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네르바와 루키우스 베루스, 3세기의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가 그들인데, 이런 경우는 극소수의 경우였고 제국의 상류층과 귀족 지위를 얻은 이들은 프린켑스 체제 이후 등용되고 로마의 상류층을 차지하게 된 기사계급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이후 로마의 주도권은 이탈리아 레이테 출신의 플라비우스 가문, 그 다음에는 오래전 로마화된 서방 속주의 명문가 출신들에게 넘어갔고 세베루스 왕조 이후에는 변방출신 취급을 당한 발칸 반도 출신 황제들이 연이어 제위를 차지하고 제국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