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2년 7월 30일, 바그다드 (Baghdad) 건설
바그다드 (Baghdad)는 이라크의 수도이다. 시내를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흐른다.
티그리스 강 서쪽 기슭에 위치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손꼽히는 바그다드는 서기 8세기경 장안, 콘스탄티노폴리스 등과 더불어 세계적인 대도시 중의 하나로 번성하였다.

750년 아바스 왕조가 흥기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자 아바스 왕조는 왕가의 지지세력인 페르시아인들에게 가까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중심지로 삼고 바그다드를 세웠다.
762년경 아바스 왕조에 의해 세워졌고, 계획 도시로 설계하고 수도가 되었다. 당시 시가지는 현재의 시가지보다 10배 이상 컸다고 한다.
아바스 왕조 / 아바스 칼리파국 혹은 압바시아 왕조는 이슬람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계승한 세 번째 칼리파국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삼촌인 아바스 이븐 압드 알무타리브의 후손들이 왕조를 세웠으며, 왕조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750년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아바스 혁명으로 무너뜨린 뒤, 아바스 칼리파국의 칼리파들은 대부분 오늘날 이라크에 위치한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아바스 칼리파국은 처음에 수도를 쿠파에 두었으나, 762년 칼리파 알만수르가 옛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 인근에 바그다드를 건설했다.

이슬람의 황금 시대 동안 바그다드는 과학, 문화, 발명의 중심지였다.
여러 과학적 발전과 더불어 지혜의 집과 같은 여러 학술 기관, 그리고 다민족 다종교의 특성 덕분에, 바그다드는 “배움의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바스 칼리파국은 영토 통치에 있어서 페르시아의 관료제에 의존했지만, 움마에는 비아랍계 무슬림이 다수 유입되었다.
페르시아의 관습들이 고위 지배층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고위 지배층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초창기 협력에도 불구하고, 8세기 말 아바스 칼리프들은 비아랍계 마와르들, 그리고 페르시아 관료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아바스 칼리파국은 756년 알안달루스 지역을 우마이야에, 788년 모로코를 이드리스 토후국에, 800년 이프리키야와 시칠리아를 아글라브 토후국에 빼앗겼으며, 870년대에는 사만 토후국이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했고, 사파르 토후국이 페르시아 지역을 빼앗았다.
969년에는 이집트마저 파티마 칼리파국에게 잃었다.

945년과 1055년 바그다드를 각각 점령했던 부와이흐 왕조와 셀주크 제국이 성장하면서, 아바스 칼리파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히 축소되었다. 여러 무슬림 왕조들에서 아바스 칼리파의 지도력은 단순히 의례적인 종교적 기능으로 점차 감소했지만, 알무크타피의 치세 동안 아바스 칼리파국은 메소포타미아의 지배권을 되찾았으며, 알나시르의 치세에는 이란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아바스 칼리파국의 문화적 부흥은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 제국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약탈하고 알무타짐을 처형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아바스 지배층과 무슬림 문화인들은 1261년 맘루크 술탄국의 카이로로 이동했다. 알무스타인 빌라 칼리파를 제외한 아바스 칼리파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부족했지만, 이들은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 종교적 권위를 주장했다. 아바스 칼리파의 마지막 칼리파는 알무타와킬 3세다.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재위 786 ~ 809년)의 치세는 바그다드의 최성기였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지역 왕조들이 분립하면서 바그다드는 점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고 종교적인 영향력, 혹은 통합 이슬람 세계의 상징이라는 역할로 전락해 갔다. 특히 945년부터 시아파인 부와이흐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 수니파 칼리파 직위를 좌지우지했다.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들어갔다가, 1917년 영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21년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하자 그 수도가 되었다.
카이로, 테헤란, 이스탄불에 이어 중동 (中東)에서 네 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인구는 약 700만명 (2006년 기준)으로 추정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