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년 1월 26일, 당나라의 시인 나은 (羅隱, 833 ~ 910) 별세
나은 (羅隱, 833년 ~ 910년 1월 26일 / 음력 909년 12월 13일)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십국 초기를 살았던 시인이다.
자(字)는 소간(昭諫)으로 여항(餘杭) 또는 신증(新登) 사람이라고도 한다. 본명은 횡(橫)이다.
○ 생애 및 활동
나은 (羅隱, 833 ~ 809년)은 만당 시인으로 자는 소간 (昭諫)이라 했으며 스스로를 강동생 (江東生)이라 불렀다. 지금의 절강성 (浙江省) 부양현 (富陽縣)인 신성 (新城) 출신이다. 여항 (餘杭)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
어려서부터 시재가 있었다. 시문을 지으면서 정치를 논하고 공경대부들을 풍자하기를 즐겨하여 당시의 지배계층의 미움을 받아 응시한 과거에 10번이나 낙방한 후로는 이름을 은 (隱)이라고 바꿨다.
20세에 진사시에 응시했으나 열 번이나 낙방하고, 마침내 이름을 은 (隱)으로 고친 뒤 스스로 호를 강동생 (江東生)이라 하였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순박하게 생겼지만 천박했다.(貌古而陋)’, ‘촌스러운 말씨가 어그러졌다.(鄕音乖刺)’,’재주를 믿고 사람들을 깔보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꺼리고 싫어했다 (恃才忽睨. 衆頗憎忌)’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관료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함통(咸通) 11년(870년)에 호남(湖南)과 회주(淮州), 윤주(潤州) 등지를 돌며 관직을 얻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한 채, 광계(光啟) 3년(887년)에 강동으로 돌아온 뒤로는 곤궁하고 빈한한 생활을 하다가 55세 때에야 전류 (錢鏐)의 막료(幕僚)가 되었고, 거듭 전당령 (錢塘令), 진해군장서기 (鎭海軍掌書記) 절도판관 (節度判官)에 염철발운부사(鹽鐵發運副使) 저작좌랑 (著作佐郎)을 거쳐 사훈랑(司勳郎)이 되었다.
관직을 얻은 뒤에도 오만방자한 성격은 끝내 고치지 못했지만 전류는 거슬려하지 않았다고 하며, 나은도 주전충 (朱全忠)의 간의대부 (諫議大夫)로 발탁되었지만 나은은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소위 (羅紹威)가 후량(後梁)에 귀부한 뒤, 나은을 적극 추천하여 그를 후량의 급사중 (給事中)으로 삼았고, 이때 주군인 전류도 이미 주온 (朱温)에게 신하를 칭하고 있었기에 나은도 할 수 없이 받았다고 한다.
만년에는 진해(鎭海) 절도사인 전류에게 의지하여 전당령(錢塘令), 저작랑(著作郞), 절도판관(節度判官) 등의 관직을 지냈다.
당나라가 망하자 후량의 신하가 되었던 전류의 추천으로 나은도 후량의 급사중 (給事中)으로 출사했다가 이어서 염철발운사 (鹽鐵發運使)로 재직 중 얼마 안 가서 전당 (钱塘)에서 향년 77세로 숨을 거둔다.
세상에서는 그를 나 급사(羅給事)라 불렀다고 한다.
저서로는 <갑을집 (甲乙集)> 10권과 <참서 (讖書)>5권이 지금까지 전한다.
전당시 (全唐詩)에는 그의 시를 11권에 걸쳐 엮었다. 당나라 말기, 사회의 기강과 체제가 무너진 결과 발생한 격렬한 동란의 시대를 살면서, 개인적으로는 관직을 얻는데 실패하여 하층민중의 생활로 빠져들면서 당시 극도로 혼란한 사회상에 절망한 나머지 예리한 필봉으로 당시의 현실 생활에 대해 폭로와 풍자를 주로 행했다.
그의 대표작은 산문형식의 <참서 (讖書)>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영웅지언 (英雄之言), 월부언 (越婦言), 설천계 (說天鷄), 미루부 (迷樓賦) 등이 있다.
<참서> 안의 대부분 작품들은 당시의 절망적인 사회현실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노신 (魯迅)은 ” 나은의 <참서 (讖書)>에 실려 있는 거의 모든 작품들은 투쟁과 분노의 이야기이다.”라고 평했다.
다음은 나은의 영웅지언의 내용이다.
동물이 자기를 보호하는 특색을 가진 것은 적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런 특색이 있다. 도적도 사람이다. 의관을 갖추고 신을 신었을 따름이다. 양보하고 겸손한 마음과 올바르고 청렴한 절개가 있는 까닭에 동물과 구별된다고 하나 오랫동안 그 특성을 지키지 못한다. 보물과 비단을 보면 차지하려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도탄에 빠진 것을 건져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져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백성의 요구를 그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진시황이 타고 가던 가마를 보고 ” 아! 대장부라는 마땅히 저래야 하는데!”라고 했고 초패왕 항우는 ” 저 자리는 마땅히 나의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뜻이야 양보하고 겸손한 마음과 올바르고 청렴한 절개가 꼭 없다고 말할 수 없으나 대개 미만 (迷慢)하고 교만 (驕慢)한 것을 본 후에 그런 꿍꿍이셈이 생겼을 것이다. 영웅이라 불리우는 자도 이러할 진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랴! 그러므로 아름다운 궁전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엿보지 않았다면 회귀한 일이라 하겠다.
유방이 젊었을 때 진시황을 부러워하면서 대장부는 마땅히 저래야 한다고 부러워하였고, 항우는 진시황의 자리를 빼앗아 대신 그 자리에 앉겠다고 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바늘을 훔친 사람은 징벌 받지만 나라를 빼앗은 사람은 임금이 된다. 나은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이름을 걸고 사선 소위 영웅들이란 사실은 개인의 사용을 채우기 위한 자들이라고 매도하였다.
○ 작품 관련
저서로 《강동갑을집 (江東甲乙集)》, 《회남우언 (淮南寓言)》과 《참서 (讖書)》, 《후집 (後集)》이 세상에 유행했으며, 아들 새옹 (塞翁)이 있었는데 양의 그림을 잘 그렸고 그 그림은 후에 북송의 손면 (孫沔)이 소장하게 되었다.
- 작풍
나은의 시는 영사 (詠史), 즉 역사를 읊은 것이 많았는데, 《당재자전》 (唐才子傳)에는 나은의 글을 평해 ‘시문 (詩文)은 무릇 풍자하고 비꼬는 것을 주로 삼아 오래된 사당의 목상이라 해도 피해갈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그 시풍 (詩風)은 만당 (晚唐)의 한 파에 속했고, 민간에 나도는 구어 (口語)를 다듬는 데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신라의 문인으로서 당으로 유학하러 온 최치원 (崔致遠)과도 교류가 두터웠는데, 《삼국사기》는 처음 최치원이 당으로 왔을 때, 평소 자신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높게 여기며 쉽게 남을 인정하지 않았던 나은도 최치원에게는 자신이 지은 시 다섯 두루마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선의 정조(正祖)는 나은에 대해 “《양동서 (兩同書)》 10편은 내용 중에 지론 (旨論)이 많다. 그가 말한 귀천(貴賤), 강약(强弱), 손익(損益), 경만(敬慢), 후박(厚薄), 이란(理亂), 득실(得失) 등 여러 편에서 천고의 인물을 품평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읽어도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게 한다.”고 호평하면서도, “앞의 다섯 편에서 노담(老聃)을 끌어다 결론을 맺고 뒤의 다섯 편에서 공자를 끌어다 결론을 맺은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
- 저명한 작품
*속내를 보이다 (自遺)
得則高歌失則休 얻으면 크게 노래하고 잃으면 조용히 쉬어가며
多愁多恨亦悠悠 근심 많고 한 많은 이 세상, 그럭저럭 살다 가자
今朝有酒今朝醉 오늘 아침 술 생기면 오늘 아침 취하고
明日愁來明日愁 내일의 근심일랑 내일의 근심으로 남겨두자꾸나
다음은 오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미녀 서시(西施)를 변호한 나은의 시다.
*가국흥망자유시 (家國興亡自有時)
家國興亡自有時 (가국흥망자유시)
집안이나 나라나 각기 정해진 운명이 있는 법인데
時人何苦咎西施 (시인하고구서시)
요새 사람들은 어찌하여 모든 허물을 서시에게만 돌리는가?
西施若解亡吳國 (서시약해망오국)
서시가 만약 오나라를 망하게 했다면
越國亡來又是誰 (월국망래우시수)
월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또한 누구란 말인가?
- 관련 서적
《구오대사》 권24, 〈양서〉24, [열전]14, 나은
《당재자전》 권9
심숭, 〈나 급사 묘지〉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