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본기 – 권12 신라본기 제12
978년 5월 13일, 신라의 마지막 국왕 경순왕 (敬順王, ? ~ 978) 타계
김부식의 ‘삼국사기 – 권12 신라본기 제12’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의 본기다.
○ 권12 신라본기 제12: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 효공왕
효공왕 김요 (孝恭王 金嶢, 883년? ~ 912년 4월 25일, 재위: 897년 음력 6월 1일 ~ 912년 4월 25일)은 신라의 제52대 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요(嶢)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헌강왕 (효공왕 김요는 헌강왕의 서자)이고,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문자왕후 (文資王后)로 추존된 후궁 김씨이다. 왕후는 이찬을 지낸 박예겸(朴乂謙)의 딸이다.
889년 고모 진성여왕에게 제일순위 성향 보위 계승자로 책립되었다. 그 후 8년이 지난 897년 보위 후계공 김요(金嶢)의 고모이자 前 신라 군주 진성여왕은 897년 음력 6월 1일, 신라국 신하들에게 언사하기를 “근년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는데, 이는 내가 아직도 이미 덕(德)이 없는 까닭이다. 이제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모두 결정이 이미 되었노라” 라고 말하면서 왕위를 이제 아직 어린 왕위계승자 김요(金嶢)에게 선양 (禪讓)하고 퇴위한지 6개월 후인 897년 12월 31일에 붕어하였다. 그러나 보위계승자 수업을 8년 가까이 받은 신라 보위 계승자 김요의 명석함 탓에 897년 음력 6월 1일을 기하여 고모 신라 진성여왕 김만에게 보위를 이어받은 김요는 아직 만 14세를 전후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친정을 펼쳤다.
.생애
897년 음력 6월 1일, 효공왕은 왕위에 올랐지만 신라는 후삼국 시대로 돌입하였고, 그 중에서도 완산에서 세력을 늘리고 있던 후백제의 견훤이나 후고구려의 궁예등의 세력이 급격하게 영토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892년에 견훤이, 901년에 궁예가 왕을 자칭했다. 효공왕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주색에 빠져 신라의 영토는 나날이 쇠약해져서 신라는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
보위에 등극한지 15년 뒤인 912년 4월에 붕어하자 손윗처남이자 이복 자형인 박경휘가 신라 신덕왕으로 뒤를 이었다.
.가계
부왕 : 헌강왕 (憲康王)
모후 : 의명왕태후 (義明王太后), 문자왕후 (文資王后) 김씨
손윗처남이자 이복 자형: 신덕왕 박경휘 (神德王 朴景暉)
왕후 : 왕비 박씨 (王妃 朴氏) 이찬 박예겸 (朴乂謙)의 딸
– 신덕왕
신덕왕 (神德王, ? ~ 917년, 재위: 912년 4월 25일~ 917년)은 신라의 제53대 왕이다. 성은 박(朴), 이름은 경휘 (景暉 또는 景徽)이다.
아버지는 선성대왕 박예겸 (朴乂兼 또는 朴乂謙 혹은 朴銳謙)이고, 어머니는 정화부인 (貞花夫人)이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박예겸은 의부 (義父, 혹은 양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 (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박문원 (朴文元)이라고도 한다.
.생애
912년, 매제이자 이복 손아랫처남인 선왕 효공왕 김요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효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후고구려의 궁예 (弓裔), 후백제의 견훤 (甄萱) 등의 세력에 침식당해 신라는 쇠퇴할 뿐이었다.
즉위한 해에 왕은 아들 박승영(朴昇英)을 태자로 세우고, 이찬 계강 (繼康)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914년에 궁예가 연호를 수덕만세 (水德萬歲)에서 정개 (政開) 원년으로 고쳤다.
《삼국유사》는 신덕왕 즉위 4년인 을해(915년)에 영묘사 (靈廟寺)의 내행랑에 까치의 둥지가 34군데, 까마귀 둥지가 40군데나 되었으며, 3월에는 두 번이나 서리가 내렸고 6월에는 참포 (斬浦)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 동안이나 싸웠다고 전하고 있다.
5년(916년) 가을 8월에는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대야성 (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백제와 태봉의 세력에 침식되는 신라의 불운 속에서 917년에 붕어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다.
.가계
《삼국사기》에는 신덕왕의 아버지는 정강왕 (定康王) 대에 대아찬(大阿飡)을 지냈던 예겸 (乂兼)이고 (《삼국유사》는 부원父元), 어머니는 정화부인 (貞和夫人)이며 (《삼국유사》는 진화부인 眞花夫人), 비 김씨는 헌강왕 (憲康王)의 딸이라고 기록하였다. 아달라왕의 원손이라는 혈연이 친가쪽인지, 외가쪽인지는 《삼국사기》 본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신덕왕의 계보에 대해서 모계쪽 계보부터 수록하여, 어머니 진화부인 (眞花夫人)의 아버지는 순홍 (順弘) 각간 (角干)으로 뒤에 성호대왕 (成虎大王)으로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는 원홍 (元弘) 각간이라고 기록하고서 원홍 각간의 기록 뒤에 아달라왕의 원손이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 신덕왕의 아버지라고 기록된 예겸에 대해서도 《삼국유사》는 의부로 기록되어 있고, 친아버지는 문원 (文元) 이간(伊干)으로서 후에 흥렴대왕 (興廉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문관 (文官) 해간 (海干)이었다.
박씨이박) 족보다는 아달랑왕의 28셋손이원손기록됭자칭있다것에 대해서는 신덕왕이 아달라왕과 모계로 이어진 자손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서 신덕왕의 성씨를 박씨라고 한 점에 대해 신덕왕의 누이가 효공왕의 비가 된 것을 계기로 김씨에서 박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견해가 있다.
아버지 (생부) : 박문원 (朴文元) 각간 – 흥렴대왕 (興廉大王)으로 추봉
아버지 (양부) : 박예겸 (朴乂兼 또는 朴銳謙) – 정강왕 때 대아찬을 지냈고 선성대왕 (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
외증조할아버지 : 박원홍 각간 – 아달라왕의 원손
외할아버지 : 박순홍 각간 – 추봉 성호대왕
어머니 : 정화부인
왕후 : 헌강왕의 딸로 책호는 의성왕후 (義成王后).
아들 : 경명왕 박승영 (朴昇英)
아들 : 경애왕 박위응 (朴魏膺)
매제이자 이복 손아랫처남 : 효공왕 김요 (孝恭王 金嶢)
– 경명왕
경명왕 (景明王, ? ~ 924년, 재위: 917년 ~ 924년)은 신라의 제54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승영 (昇英)이다.
신덕왕 (神德王)과 의성왕후 (義成王后)의 첫째아들이며 경애왕 (景哀王)의 형이다. 왕비는 신라 금입택 (금을 입힌 집) 중 하나인 장사택 (長沙宅)을 소유한 가문인 각간 (角干) 김대존 (大尊)의 딸이다.
.생애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 (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 (弓裔)와 견훤 (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 (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 (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 (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 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 (四天王寺)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 (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 (舍知) 금모 (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 (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왕릉 전설
경주군 남쪽 배동 배일산 (拜日山)의 세 왕릉 중 맨 위의 왕릉이 아달라 이사금의 능이고 가운데는 신덕왕릉, 맨 앞은 경명왕의 능이라 한다
.가계
부왕 : 신덕왕 (神德王, ? ~917, 재위:912~917)
모후 : 의성왕후 김씨 (義成王后 金氏)
국왕 : 경명왕 (景明王, ? ~924, 재위:917~924)
왕비 : 신라 금입택 중 하나인 장사택 (長沙宅)의 소유주인 각간 (角干) 김대존 (大尊)의 딸
장남 : 밀성대군 (密城大君) 박언침 (朴彦忱) : 밀양 박씨의 시조
차남 : 고양대군 박언성 (朴彦成) : 고령 박씨의 시조
3남 : 속함대군 (速咸大君) 박언신 (朴彦信) : 함양 (咸陽) 박씨 (朴氏)의 시조
4남 : 죽성대군 박언립 (朴彦立) : 죽산박씨 시조 (박기오)의 아버지. 죽주박씨 竹州 = 죽산박씨 竹山, 고성박씨, 음성박씨
5남 : 사벌대군 박언창 (朴彦昌) 상주 박씨의 시조
6남 : 완산대군 박언화 (朴彦華) 전주 박씨, 무안 박씨의 시조
7남 : 강남대군 박언지 (朴彦志) 순천 박씨
8남 : 월성대군 박언의 (朴彦義) 월성 박씨
– 경애왕
경애왕 (景哀王, ? ~ 927년, 재위: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왕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위응 (魏膺)이며 본관은 밀양 (密陽)이다. 신덕왕 (神德王)의 둘째 아들이며 경명왕 (景明王)의 아우이다.
927년 후백제 군주 견훤의 신라 침공 때 포석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아들 계림대군 박순현 (鷄林大君 朴舜玄)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생애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생이다. 경명왕이 죽은 뒤 경명왕의 아들들이 나이가 어렸기에 대신 왕위를 이어받아 924년에 즉위했다.
경애왕이 왕이 될 무렵,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였으며, 고려,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경애왕은 고려와 동맹을 맺어 세력 회복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 (王建)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 (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 (지금의 진주시 일대)를 다스리던 왕봉규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전쟁을 잠시 중단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견훤이 볼모로 보냈던 진호가 고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926년 후백제는 고려를 다시 공격하였다.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삼국유사등을 토대로 볼때, 신빙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어서 신뢰하기 어렵다. 첫째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를 음력 11월로 기록하고 있는데, 음력 11월이면, 양력으로는 12월에서 1월 정도에 해당하므로 초겨울 또는 한겨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그런 엄동설한에 야외에서 주연을 즐겼다는 내용은 말이 되지 않는다. 둘째로 화랑세기에 따르면, 지금의 포석정이라고 불리는 곳은 본래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 곳은 원래 화랑이었던 문노의 화상이 모셔진 사당이라고 전해지는데, 문노의 화랑도는 호국선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셋째로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다는 것이다. 특히 후삼국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봉을 세웠던 궁예가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쫓겨난 뒤 보리이삭을 베어먹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당시 태봉국의 도읍지 였던 철원의 경우, 현재까지도 민간과 지자체인 철원군에서 궁예가 세웠던 태봉국을 기념하기 위하여 태봉제를 전승해 오고 있는 점을 볼때, 궁예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록역시 사실여부에 대한 의문점이 있다. 이렇듯 역사의 기록이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기에, 역사서에 기술되어있다는 것 만으로 이를 사실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여러가지 점을 종합해 보면, 경애왕은 주연을 즐긴것이 아니라, 문노를 모신 사당인 포석사에서 나라의 안위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견훤은 경애왕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결국 경애왕은 자살하였고 그의 이종 6촌 동생 김부가 경순왕으로 보위를 승계하였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 (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 (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가계
부왕 : 신덕왕 (神德王, ? ~917, 재위:912~917)
모후 : 의성왕후 김씨 (義成王后 金氏)
왕비 : ?
장남 : 금성대군 박교순 (錦城大君 朴交舜) : 울산 (蔚山) 박씨의 시조인 고려 (高麗) 시대의 장군 (將軍) 박윤웅 (朴允雄)의 직계 조상
차남 : 계림대군 박순현 (鷄林大君 朴舜玄)
동생 : 박효렴 (朴孝廉)
– 경순왕
경순왕 (敬順王. ? ~ 978년)은 신라 제56대 군주 (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 (敬順)이다.
신라 김씨 또는 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 (大輔公) 김알지 (金閼智)의 27세손이며, 문성왕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 (神興大王)에 추존 (追尊)된 김효종 (金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 (桂娥太后)이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 (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기 (史記)에 전하지 않는다. 첫째 왕자를 후대에 마의태자 (麻衣太子)라 하며, 둘째 왕자는 문헌 (文獻)에 김덕지 (金德摯)라 한다.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죽게 하고, 그의 친척인 김부 (金傳)를 왕위를 계승시키니 그가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935년 11월 재위 8년 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 (讓國)하고, 고려 왕건의 딸인 안정숙의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신란궁 (神鸞宮)을 하사 받았다. 고려 조정으로부터 정승 (正承) 상주국 (上柱國) 낙랑왕 (樂浪王)에 봉해졌는데 그 품위가 태자 (太子)보다 높았다.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장단에 있다.
.본관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 (탈해왕 9) 3월 밤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 (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 (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 (始林)을 계림 (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신라 김씨 (新羅 金氏) 또는 계림 김씨 (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 미추왕 (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나라를 고려 태조 에게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경순왕은 성은 김 (金)이고, 이름은 부 (傅)이며, 신라 문성왕 (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 김효종 (金孝宗)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 (桂娥太后) 김씨 (金氏)이다.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 신라 왕에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 (文聖王)→상대등 김안 (金安)→각간 김민공 (金敏恭)→추존 의흥왕 (懿興王) 김실홍 (金實虹) 일명 김인경 (金仁慶))→추존 신흥대왕 (神興大王) 김효종 (金孝宗)→경순왕 (敬順王)으로 이어진다.
왕후 (王后)는 죽방부인 (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기 (史記)에 전하지 않는데, 후대에 첫째 왕자를 마의태자 (麻衣太子)라 하며, 둘째 왕자를 문헌 (文獻)에 김덕지 (金德摯)라 한다.
.신라의 마지막 왕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 군에게 경애왕이 붙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자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견훤이 경애왕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있었는지, 화백 회의 추대를 받아서 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 김효종을 신흥왕 (神興王)에, 할아버지 각간 (角干) 김실홍을 의흥왕 (懿興王)에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 시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고려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 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 (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 귀순 및 멸망
935년 10월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 (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슬하의 두 왕자 태자와 김덕지 및 신하 이순유 (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 (諫)하였으나,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935년 11월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국서를 고려 왕건에게 바치니 천년 (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는 멸망했다. 이에 두 왕자는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하고, 개골산 (皆骨山)에 들어가 망국의 한을 달랬다.
.고려 귀순 후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은 태상 (太相) 왕철 (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935년 12월 고려 태조 도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인 유화궁 (柳花宮)(지금의 정승원 正承院)을 하사하고, 관광순화위국공신 (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 (上柱國) 낙랑왕 (樂浪王) 정승(政丞)에 봉하고 식읍 (食邑) 8,000호를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봉토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 지배 계층에 대한 유화 정책 일환으로 결혼 정책을 추진하여 경순왕은 고려 태조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 (夫人 王氏)를 후실로 맞이하여 살았다.
고려 태조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 (金億廉)의 딸을 후비 (后妃)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안종 (安宗)으로 추존된 왕욱 (王郁)을 왕욱 (王郁)을 두었는데 그는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의 아버지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 딸은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하였는데, 그녀가 헌숙왕후 (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 (太子)의 위인 상보(尙父)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 (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에 붕어 (崩御)하였다. 시호를 ‘경순’ (敬順)이라 하고,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
.가족 관계
경순왕 가계에 대해 정사 (正史)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등에 왕후 (王后) 죽방부인 (竹房夫人)과의 사이에 두 왕자 (王子)를 두었다고 하며, 이들 왕자들의 이름은 사서 (史書)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왕태자 (王太子), 왕자 (王子)라 할 뿐이다. 또 야사 (野史)인 삼국유사에는 태자 (麻衣太子), 계자 (季子)라 하고 계자 (季子)의 승명 (僧名)이 범공 (梵空)이라 한다.
사기 (史記)에 의하면 첫째 왕자는 935년 (경순왕 9) 10월 부왕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 (讓國) 하려하자 불가함을 간 (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처자 (妻子)를 죽이고 개골산 (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흰 마의 (麻衣)을 입고 초식 (草食)하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마의 (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 (麻衣 太子)라 부른다.
또 둘째 왕자도 부왕 경순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 (諫)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를 따라 개골산 (皆骨山)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문헌 (文獻)에 김덕지 (金德摯)라 한다. 이들 후손은 울산 김씨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일설에 화엄종 (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사 (法水寺)와 해인사 (海印寺)에 드나들며 도 (道)를 닦으며 망국 (亡國)의 한 (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 (梵空)이라 한다.
부왕 : 신흥왕 김효종 (金孝宗)
모후 : 계아태후 (桂娥太后) – 헌강왕의 딸
왕후 : 죽방부인 (竹房夫人)
태자 (太子) : 사실명 (史失名), 후대에 마의태자 (麻衣太子)
왕자 (王子) : 사실명 (史失名), 문헌에 김덕지 (金德摯)
제1 후배 : 낙랑공주 왕씨
1녀 (女) : 고려 경종 왕주 (王伷)에게 출가 – 헌숙왕후 김씨
제2 후배 : 부인 왕씨 (夫人 王氏)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