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월 24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金佐鎭, 1889 ~ 1930) 순국
김좌진 (金佐鎭, 1889년 12월 16일 / 음력 11월 24일 ~ 1930년 1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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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 (金佐鎭)
.출생: 1889년 12월 16일, 대한민국 홍성군 갈산면
.사망: 1930년 1월 24일, 중국 만주
.부모: 김형규, 이상희
.형제자매: 김동진, 김옥출, 김경진
.배우자: 오숙근 (1904년–1930년), 나혜국
.자녀: 김두한
.손주: 김을동, 김경민, 김영채, 김범상, 김현성, 김주택
본관은 안동 (安東). 자는 명여 (明汝), 호는 백야 (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김형규 (金衡圭)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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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 (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 (安昌浩) · 이갑 (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 (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였다.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 차 돈의동 (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 (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 (盧伯麟)· 신현대 (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 (朴尙鎭)· 채기중 (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 (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 (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 (大韓正義團)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 (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 (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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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 (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 고동하전투를 끝으로 청산리전투가 전개되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 휘하 부대가 서로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그 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 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 (密山)에 도착하였다.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좌진도 우수리강을 건넜다.
그러나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해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 (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 (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 (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 (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 (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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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 장군 묘
독립운동가인 백야 (白冶) 김좌진 (1889 ~ 1930) 장군의 묘소이다.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장군은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1907년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1911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7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에 가입한 이후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청산리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루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던 장군은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 당했다. 암살 직후 만주땅에 묻혔다가 아내 오숙근 여사가 1940년 장군의 유해를 밀감 상자로 위장해 비밀리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57년 부인이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현 위치에 합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 (馬) 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 김좌진 장군 묘
.면적 : 25,344㎡
.시대 : 일제강점기
.소유자 : 안동김씨 문중
.관리자 : 보령시
.지정: 도기념물 제73호 (1989년 12월 29일)
– 기타정보
대한독립군총사령관 (大韓獨立軍總司令官) 백야 (白冶) 김좌진 장군 (金佐鎭 將軍)의 유해 (遺骸)를 안장 (安葬)한 묘성 (墓城)이다.
장군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부농가 (副農家)의 둘째아들로 출생. 개화사상 (開化思想)이 투철하여, 15세때,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전답 (田畓)을 나누어주고 부리던 노비 (奴婢) 가노 (家奴))를 해방 (解放)시켰다.
1905년 호명학교 (湖明學校)를 설립 (設立) 문맹퇴치 (文盲退治)에 앞장섰고, 1913년 군자금 (軍資金)을 모집하다 3년간 옥고 (獄苦)를 치루기도한다.
그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 (大韓光復團) 북로군정서 (北路軍精書) 사령관 (司令官)으로 독립군장교양성 (獨立軍將校養成)에 힘쓰다가, 독립군 (獨立軍) 총사령관 (總司令官)으로 청산리전투 (淸山里戰鬪)에서 3,300의 왜적 (倭敵)을 물리치는 독립운동사상 (獨立運動思想) 혁혁 (赫赫)한 공 (功)을 세워 조국광복 (祖國光復)을 위해 큰 업적 (業的)을 세웠다.
1930년 1월 24일 만주 (滿洲) 산시 (山市)에서 고려 (高麗) 공산당원 (共産黨員)의 흉탄 (兇彈)에 41세 (歲)로 조국 (祖國) 광복 (光復)을 보지 못하고 운명 (運命)하신다.
장군 (將軍)의 유해 (遺骸)는 만주땅에 임시암매장 (臨時暗埋葬) 되었다가 부인 (婦人) 오숙근 (吳淑根) 여사 (女史)에 의해 조국 (祖國)에 묻힌다.
이때가 1940년 9월 밀감상자에 장군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 (安葬). 1957년 부인 (婦人)이 타개 (他介)하자, 장군 (將軍)의 아들 김두한 (金斗漢)은 현 (現) 묘소 (墓所)로 이장 (移葬)하였다.
1974년부터 보령시 (寧市)에서 장군묘역 (將軍墓域) 성역화사업 (聖域化事業) 추진 (推進), 업적과 독립정신 (獨立精神)을 후세 (後世)에 계승 (繼承)코자, 청산리 (靑山里) 대첩일 (大捷日)을 추모 (追模) 제향일 (祭香日)로 정 (定)하고, 매년 (每年) 10월 22일 각계 (各界)의 인사 (人士)들이 모여 장군 (將軍)을 추모 (追慕)하고, 독립정신 (獨立精神)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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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 (金佐鎭, 1889 ~ 1930) 어록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 《독립기념관 〈단장지통〉어록비》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 — 《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면서》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 《1930년 1월 24일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말》
“본년 8월 이래로 적의 독균이 간도에 파급되어 슬프다! 우리 무고한 양민이 적의 독봉 아래 원혼이 된 자 얼마며 그 많은 재물과 양곡이 화염 속에 사라진 것이 얼마며 이렇게 땅은 얼고 찬 기운이 뼈를 깎는데 옷 없고 집 없이 길에서 굶어 죽는 자 얼마인가. 종이조각에 대한 두 글자만 나타나도 그 집은 잿더미가 되고 탄피의 빈 껍질 하나라도 들어나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니 모든 사랍이 입을 봉하고 서로 눈 질만하고 있다.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학교를 헐어 문명을 박멸하니 천인이 공노하고 있는도다.우리 군정서는 죽을힘을 다하여 혈전 4,5일에 적의 연대장 이하 수십 명의 장교와 1천2백 명의 병졸 을 죽였다. 그러나 부득이 험악한 산중으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재기의 그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포고한다.정의를 보고 용감한 것이 우리 독립군의 정신이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우리 독립군의 기백이니 어찌 공로를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하여 대의를 저바릴 것인가. 이 격문이 이르는 날부터 각기 정의를 분발하여 성패를 불문하고 다 함께 함몰되어 가는 민족과 조국을 건져내어서 대한 광복 의 대업을 조속히 완성합시다.” — 《간도 참변 이후 김좌진의 군정서 격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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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