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6년 2월 5일, 보니파시오 8세 (Boniface VIII) 교황이 ‘성직자와 평신도’ (Clericis laicos) 교서를 통해 세속 권력과 전면전 선포
‘성직자와 평신도’ (Clericis laicos)는 보니파시오 8세 (Boniface VIII, 1235년 ~ 1303년 10월 11일) 교황 (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이 1296년 2월 5일 선포한 교황 칙서로 황제, 왕, 공작 등 세속 국가를 다스리는 평신도들이 교황의 사전 승인 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서로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성직자들에게도 과세를 부과하는 와중에 선포됐다.
이로 인해 보니파시오 8세 교황과 프랑스 필리프 4세 관계가 악화됐다.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국왕 필립 4세와 갈등 끝에 1303년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고, 모욕을 당한 후에 그 충격으로 한달만에 사망하였다.
–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갈등 전말
국민 국가가 형성되고 권력을 중앙집권화 하려는 군주들의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던 시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라: Bonifacius PP. VIII, 이: Papa Bonifacio VIII, 1235년 ~ 1303년 10월 11일)는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와 프랑스 국왕 필립 4세가 충돌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강화되어가는 왕권과 교회의 갈등은 특히나 1285년 필리프 4세의 권력 강화로 악화되었다. 프랑스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국민 국가로의 발전은 카페 왕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필리프 4세는 최고의 시민 법률가들을 거느리고 법집행에 있어 성직자들의 참여를 전면 금지하였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서로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성직자들에게도 과세하자 보니파시오 8세는 이에 맞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를 세금 문제에 대한 성직자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본 그는 1296년 2월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고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는 교황 칙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공표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발표로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 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필리프 4세는 교황령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맞대응하였다. 사실 교회 운영은 프랑스의 수입원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에게 “하느님께서는 교황을 왕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놓으셨다”면서 강력히 항의하였다.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교회의 재산이 나라의 전쟁을 지원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고자 하였다.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과 더불어 중동에 파병할 새 십자군 원정을 위한 기금을 모으던 교황 대리인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 9월 교황 칙서 《형언할 수 없는 사랑》(Ineffabilis amor)을 공표하여 기본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성직자가 자원하여 세금을 낼 수 있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필요하면’이라는 표현은 왕이 언제든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필리프 4세는 교역 중단 명령을 철회하고 보니파시오 8세는 자신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사이의 분쟁을 조정할 중재자로 받아들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서 필리프 4세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불화는 다시 재개되어 필리프 4세가 보니파시오 8세에 맞서 반교황 움직임에 착수한 14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하였다. 분쟁은 필리프 4세의 측근과 교황 특사 베르나르 세세 간에 언쟁이 벌어지면서 다시 촉발되었다. 1301년 필리프 4세는 베르나르 세세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체포한 후 감옥에 가둔 한편 나르본의 대주교 질 에슐랑을 구류하였다. 이에 격분한 보니파시오 8세는 1301년 12월 교황 칙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Ausculta Fili)를 공표하여 지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영적 군주인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말에 공손히 귀를 기울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필리프 4세 주최로 열린 궁정 재판에서 성직자가 판결받는 것은 위법적이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교회 재산을 계속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교회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프랑스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을 로마로 소집해 주교회의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필리프 4세는 교황 칙서를 접한 후 교황 사절의 손에서 칙서를 잡아챈 다음 불 속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302년 2월 교황 칙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가 필리프 4세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소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2년 3월 4일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교황의 통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장 르무엔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보냈다. 필리프 4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계획한 주교회의를 사전에 방해하기 위해 4월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삼부회에서 귀족, 성직자, 평민 세 신분 모두 로마에 왕과 왕의 세속적 권력을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편 45명의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필리프 4세의 금지령과 사유 재산 몰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1302년 10월 로마에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주교회의가 끝난 후, 1302년 11월 18일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 칙서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를 공표했다.《거룩한 하나의 교회》는 중세기의 세속적인 권한과 종교적인 권한을 상세히 나타낸 가장 유명한 칙서로서 교회의 일치와 속권에 의해 위협받는 일치, 군주에 대한 충성과 교황에 대한 순명 사이에서 지역 교회 주교들이 교계제도 안에서 취할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거룩한 하나의 교회》는 이전 교황들의 발표보다 세속의 군주들을 세우고 심판하는 교황의 권한을 보다 명백하게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내용은 ‘사람은 두 가지 면으로 살아간다. 하나는 영적인 면이고 다른 하는 세속적인 면이다. 세속적인 권력이 정도를 벗어나면 영적인 권력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요지로 되어 있으며, 교황의 재치권에는 영적인 권력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권력도 있으며, 왕들은 이 교황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다른 한편 교황은 장 르무엔 추기경을 필리프 4세에게 보내는 교황 특사로 임명하고 특별히 그에게 필리프 4세를 파문 상태에서 해제할 권한까지 부여하면서, 양자 간의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1303년 4월 4일 성목요일, 교황은 프랑스 성직자들이 로마에 오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하였다. 파문 대상에는 필리프 4세까지 포함되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필리프 4세의 재상 기욤 드 노가레는 보니파시오 8세의 신상을 공격하면서 그를 이단자로 비난하고 공의회를 열어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03년 8월 15일 교황은 프랑스 왕국 신민들에 대한 필리프 4세의 통치권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필리프 4세가 로마의 교회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의 행동을 소상히 설명하기 전까지는 공석 중인 프랑스의 모든 교구장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을 모두 보류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무력으로 이 모든 일을 해결하려 하였다.
1303년 9월 7일 기욤 드 노가레가 이끈 프랑스군과 시아라 콜론나가 당시 아나니의 교황궁에 있던 보니파시오 8세를 급습하였다. 교황은 1303년 9월 8일 교황 칙서를 공표해 필리프 4세와 기욤 드 노가레를 파문할 예정 이었는데 이를 막기위해서 벌린 사건이었다. 기욤 드 노가레와 시아라 콜론나는 보니파시오 8세를 만나 난폭한 행동을 일삼으면서 교황직을 사임할 것을 협박했다. 보니파시오 8세는 굴복하지 않고 사임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대꾸하였다. 이에 시아라 콜론나가 보니파시오 8세의 뺨을 세게 철썩 때렸는데, 당시 68세였던 교황은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이를 아나니 사건 (Schiaffo di Anagni)이라고 부른다. 보니파시오 8세는 3일이 지나서야 풀려났으나 그로부터 한달 후에 선종하였다. 단테는 이 사건을 《신곡》의 연옥 편에서 기록해 놓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대리자 안에서 포로가 되시고 모욕을 당하셨다’는 표현이다. 피렌체의 유명한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아라와 그 밖의 적들이 교황에게 와서 매우 상스러운 말로 조롱하면서 교황과 교황과 함께 있던 이들을 포박하였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왕을 위해 협상을 지휘한 노가레의 기욤은 교황에게 경멸하는 어투로 그를 론 강이 있는 리옹으로 끌고가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유죄 판결을 받게 하겠다고 협박하였다. … 어느 누구도 교황의 몸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거리낌 없이 교황에게 손을 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변을 구속하고 교황과 교회의 보물들을 약탈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위대한 교황 보니파시오는 3일 동안 적들의 수중에 포로로 사로잡혀 고통과 수치심, 정신적 충격 속에서 지냈다. … 이에 분노한 아나니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콜론나와 그의 무리들을 몰아내 죽이거나 생포하였으며, 교황과 교황청 관료들을 풀어주었다. … 보니파시오 교황은 즉시 교황청 관료들과 함께 아나니를 떠나 로마로 돌아가서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주교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새겨진 비탄과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자기 손을 물어뜯는 생소한 병에 걸렸고, 결국 천주 강생 1303년 10월 12일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생전에 그가 지은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가까이 있는 화려한 경당에 명예롭게 안장되었다.”
고열에 시달리던 보니파시오 8세는 10월 11일 추기경 여덟 명과 교황청 관료들이 보는 앞에서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노자 성체를 영한 다음 선종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의 시신은 1605년 뜻하지 않게 발굴되었으며, 당시 교황청 공증인이자 바티칸 대성전의 기록 보관 담당자인 자코모 그리말디 (1568 ~ 1623)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교황의 시신은 삼중으로 만든 나무관 속에 종려나무 가지 일곱 개와 함께 뉘어 있었는데, 시신 상태는 꽤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키가 굉장히 컸다고 한다. 시신을 통해 당시의 의복 상태를 알 수 있었는데, 긴 스타킹이 다리와 허벅지를 덮고 있었으며, 검은색 실크로 만든 수대와 수단, 교황용 두건이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영대와 제의, 반지, 보석으로 장식한 주교용 장갑도 착용하고 있었다.
현재 보니파시오 8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 커다란 대리석관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의 무덤 위에는 그의 이름(BONIFACIVS PAPA VIII)이 기명되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