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타이타닉의 침몰
한스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 나남 / 2007.7.10
엔첸스베르거의 시집 《타이타닉의 침몰》은 영화 〈타이타닉〉과 마찬가지로 1912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소재의 독특성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수많은“희망”과 “좌절” 순진하고도 무모한 “낙관주의”, “허영심” 그리고 인간이 갖는 모든 가치관들의 “덧없음”까지도 망라하는 메타포 (은유)들이 다양하게 이미지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화자는가상의 타이타닉호, 과거의 쿠바,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독일 베를린의 서재 등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의 차원을 넘나들면서 묘사하고 있다.
– 목차
첫 번째 노래 – 누군가가 엿듣고 있다
두 번째 노래 – 충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묵시록. 움브리아 풍. 1490년 경
세 번째 노래 – 그 당시 아바나에서는
*분실신고
네 번째 노래 – 그 당시 나는 모든 말을 믿었다
다섯 번째 노래 – 너희가 약탈당한 것을 약탈하라
여섯 번째 노래 – 꼼짝 않은 채 나는 이 황량한 방을 쳐다보았다
*빙산
일곱 번째 노래 – 우리는 배의 안내를 계속한다
*최후의 만찬. 베네치아 식, 16세기
여덟 번째 노래 – 테니스장 안에 소금물이
아홉 번째 노래 – 이 외국인들이란
*내부의 안전
열 번째 노래 – 그러니까 그 탁자다
*유예
열한 번째 노래 – 우리를 꺼내 주오
열두 번째 노래 – 이 순간부터
열세 번째 노래 – 풍력 10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열네 번째 노래 – 그것은 대량학살 같지는 않다
열다섯 번째 노래 – 후식을 먹을 때 우리는 그에게 물었다
열여섯 번째 노래 – 타이타닉의 침몰은 서류에 기록되어 있다
열일곱 번째 노래 – 우리는 소리 없이 침몰한다
*나약한 위로
열여덟 번째 노래 – 그 후에 그들은 노를 저어갔다
*시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또 다른 이유들은
열아홉 번째 노래 – 한 남자가 물속에 누워 있었다
*1912년 4월 15일의 전보통신
스무 번째 노래 – 5월 8일에
스물한 번째 노래 – 나중에 가서는 물론
*오직 고요함 뿐
스물두 번째 노래 – 저 바깥의 먼 내해에
*인식론적 모델
스물세 번째 노래 – 모순이다! 라고 그가 소리쳤다
*인식에 도움이 되는 논법
스물네 번째 노래 – 여행의 둘째 날에
*술레이카의 약탈. 네덜란드 풍. 19세기 말
스물다섯 번째 노래 – 마지막 구명보트
*연구단체
스물여섯 번째 노래 – 바깥은. 대해다
스물일곱 번째 노래 –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철학단체
스물여덟 번째 노래 – 배의 둥근 현창을 통해 나는 내다본다
스물아홉 번째 노래 – 그러나 이야기의 끝으로 되돌아가 보면
*도망 중의 휴식, 플랑드르 풍, 1521년
서른 번째 노래 – 우리는 아직도 살아 있다, 라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 말했다
서른한 번째 노래 – 베를린의 방은 가득 찼다
서른두 번째 노래 – 나중에 가서, 앞을 어림할 수 없는 방이
서른세 번째 노래 – 나는 살이 다 젖을 때까지
접어보기
– 저자소개 : 한스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독일 시인. 1929년 출생. 문학박사. 대학 졸업 후 라디오 방송사의 편집일, 대학 시간강사직을 거쳐 첫시집《양떼에 대한 늑대들의 변호》로 등단했으며,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회 및 정치 풍자 시집을 냈다. 쿠바혁명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쿠바로 건너간 적도 있으나, 결국 그 꿈을 접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 비판적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시작에 전념해 왔다. 현대 독일의 최고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 역자 : 두행숙 (杜幸淑)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교로 유학하여 독일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서강대 등 여러 대학에서 독일문학과 독일문화, 철학을 강의했으며 번역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옮긴 책으로 <헤세, 내 영혼의 작은 새>, <시간이란 무엇인가>, <타이타닉의 침몰>, <디지털 보헤미안>, <거대한 도박>, <의사결정의 함정>, <은하수를 여행했던 천재들의 역사>, <신의 반지>, <헤겔의 미학강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레스테이아>, <스마트한 생각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안티크리스트>, <헤르만 헤세, 봄>, <헤르만 헤세, 여름>, <헤르만 헤세, 가을>, <헤르만 헤세, 겨울> 등이 있다.
– 출판사 리뷰
.혁명적 유토피아에 대한 이별의 칸타타
시와 문학이 사회변혁의 매체가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혁명의 좌절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좌절 이후에 시는 무엇을 해야 하며, 시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 이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물음이다. 여기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시집이 있다. 전후 독일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엔첸스베르거의 《타이타닉의 침몰》 (1978)이 그것이다.
1912년 4월 15일 새벽에 일어난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의 침몰은 20세기 내내 온갖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몰락의 메타포로 사용되었다. 엔첸스베르거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이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68혁명과 쿠바혁명의 좌절을, 나아가 문명의 침몰을 묘사하면서 혁명적 유토피아와 오만한 근대 과학기술 문명 일반에 대한 이별의 칸타타를 쓴다.
전후 독일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독일의 정치·사회상을 좌파 멜랑콜리적 색조로 비판하다가 68운동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던 시인은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립내각 등장 및 동방정책 실시에 따라 동력을 상실하게 된 68운동에 좌절한 후에, 새로운 혁명의 꿈은 제3세계에서 가능하리라는 기대 속에 쿠바로 향한다. 그러나 혁명 10년째의 쿠바에서 혁명은 이미 제도화되어 버렸으며, 혁명의 이념 또한 공허해진 지 오래였다. 그때의 체험을 시인은 세 번째 노래 ‘그 당시 아바나에서는’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그 당시 아바나에서는 가옥들의 회칠이
떨어져 나가고, 항구에는 변함없이
썩은 냄새가 고여 있었다. 낡은 것은 화려하게 시들어 가고,
궁핍은 밤낮으로
십 년 계획을 갉아먹고 있었다.” (본문 26쪽)
시인은 혁명의 섬이 떠있는 카리브 해를 바라보면서 “어두운 해안에, 구름 한 점 없는 밤에/ 시꺼멓고 거울처럼 미끄러운 바다에/ 거기에 떠 있는 빙산을”(34쪽) 발견하게 되고,《타이타닉의 침몰》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의 원고는 분실되고, 10년 후 그는 ‘살아남은 자들로 가득 찬’ 베를린의 서재에서 좌절된 혁명과 잃어버린 원고를 되새기면서《타이타닉의 침몰》을 다시 써서 발표한다.
33편의 노래와 16편의 간주곡으로 모자이크 방식으로 구성된 이 서사시집에서는 먼저, 파국 직전의 순간들을 묘사한다. 배가 침몰하는 지도 모른 채 여행을 즐기는 특등실 승객들, 재앙을 감지하고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자신을 구제할 생각은 않고 말없이 기다리는 삼등실의 승객들, 그 후 서서히 침몰하는 타이타닉의 아수라장이 된 모습, 즉 익사와 죽음, 물에 빠지는 사람들의 비명 등이 묘사된다. 거기엔 바쿠닌과 엥겔스의 모습도 등장한다. 그러나 난파 후 그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그들이 설교하고 논쟁하던 탁자만이 대서양 위를 떠다니면서 현실성을 잃어버린 거대 혁명이론의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둘째, 쿠바와 베를린에서의 시인의 내면 풍경의 변화를 묘사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진보의 기대가 어떻게 환상으로 바뀌는지가 조소와 회한이 뒤섞인 채 그려진다.
그리고 침몰에 대한 종말론적이고 신화적 형태의 비유, 그리고 침몰을 묘사하면서 일어나는 심미적 유희가 그려지고 있다. 세계의 종말을 화폭에 담으면서 자신의 예술을 즐기는 중세 베네치아 화가의 형상은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기록과 허구의 조합을 통해 혁명뿐 아니라 근대 과학기술 문명의 침몰 순간을 심미적으로 형상화하기, 이것이 좌절 이후 시인이 자임한 과제였다.
결국 시인은 고백한다. 진보에 대한 모든 꿈, 혁명과 변화에 대한 소망, 정의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지만 권력자와 억압된 자들의 위상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이 타이타닉이라는 세계의 배와 더불어 서서히 침몰해 가고, 그럼에도 베를린의 황량한 방에 앉아 타이타닉의 침몰에 대해 쓰는 즐거움을 배제할 수 없음을. 또한 그는 모든 지나간 것, 흔들리는 것, 침몰한 것에 대해 서러워하고 있음도 고백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코미디’라고 부른 것은 왜일까? 단순히 비극적 소재에 대한 심미적 유희를 강조하기 위한 것뿐일까?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라는 맑스의 말이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이 시집에선 계속 반복이 일어난다. 쿠바혁명은 러시아 혁명의 반복이고, 68혁명 역시 쿠바혁명의 또 다른 반복일 수 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원고를 재구성한 이 시집 자체가 반복이다. 그리고 침몰의 반복이 현실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비현실적 이야기 속으로 자리를 옮겨버리는 것 역시 반복이다.
왜 비극의 반복은 희극으로 끝나는 것일까? 비극적 사건에 쉽게 발길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일까? 그러나 문학적 반복까지 굳이 코미디라고 불러야 했을까? 객관적 반복의 코미디를 따라 발길을 돌리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는 마음의 발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일까? 혁명적 유토피아에 대한 이별의 칸타타에 묻어 있을지도 모를 멜랑콜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일까?
이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무너진 혁명에 대한 기억으로 여전히 가슴 저린 사람들, 혁명을 애도하고 넘어서려는 사람들, 가볍게 거대혁명의 굴레에서 탈주하려는 사람들, 그냥 정치적 좌절의 내면 풍경이 궁금한 사람들, 아니면 그저 비극적 사건의 문학적 형상화를 맛보려는 사람들, 그 누구이건 간에 《타이타닉의 침몰》에서 나름의 대답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약간의 노고가 필요하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