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4월 21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목사 ‘일사각오’ (一死覺悟)의 주기철 (朱基徹, 1897 ~ 1944) 순교
주기철 (朱基徹, 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이다.
주기철 (朱基徹) 목사의 원래 이름은 주기복 (福)이었다.
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아울러 손양원 목사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아호 (雅號)는 소양 (蘇羊)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 주기철 (朱基徹)
.출생: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웅천군 북부동
.사망: 1944년 4월 21일 (48세, 고문으로 순교), 한국
.호: 소양 (蘇羊)
.배우자: 오정모 (1935 ~ 1944년), 안갑수
.학력: 편집창원 웅천초등학교 졸업, 1916년 서울 오산고등학교 (옛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졸업, 192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졸업
주기철 (朱基徹)은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웅천군 북부동에서 태어나, 경남 창원의 웅천초등학교 졸업, 1916년 서울 오산고등학교 (옛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에 입학했으나 병으로 1년 만에 중퇴하고 고향인 창원으로 귀향한다.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여 웅천교회의 집사로 추천, 남학회 (南學會)를 조직,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6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옛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한다.
부산초량교회, 창원제일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 은사 조만식으로부터 평양 산정현교회 (山亭峴敎會)에 부임해줄 것을 요청받아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초빙목사로 부임한다.
자기 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일사각오’ (一死覺悟) 설교로 기독교 신앙실천과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다.
1938년 4월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다가 1차 검속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6월 풀려났다.
1938년 8월 제2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1939년 1월 풀려났다.
1939년 10월 제3차 검속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9년 12월 19일 불법 총회로 결의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평양노회로부터 신사참배 결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했다.
1940년 2월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설교를 하다.
1940년 9월 제4차 검속으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일시에 검거할 때 함께 체포된다.
1944년 복역 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인해 48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 생애 및 활동
주기철 (朱基徹)은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웅천 출신으로, 웅천에서 사립 개통소학교 (開通小學校)를 거쳐,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五山學校)에 입학, 1916년 졸업하였다.
원래 이름은 주기복 (朱基福)이었으나, 오산학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이름을 주기철 (朱基徹)로 바꾸었다. 이는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의미였다.
호는 예수의 어린 양이라는 뜻의 의미의 ‘소양 (蘇洋)’이다.
유년기 때 교회에 다니게 된 주기철은, 누구보다도 교회를 섬기면서 사랑했다.

웅천 개통학교 (현 창원웅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학교로 유학을 떠난 주기철은 졸업 후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15년 조선기독대학 상과에 2기로 입학했다. 하지만 안질이 심해져 학업을 그만두고 낙향하고 만다.
이후 1919년 3.1 운동 때 만세운동을 벌이다 헌병대에 연행되기도 했으며, 이듬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설교에 감동되어 성령을 받고 중생 (重生)하는 체험을 하면서 ‘주님 가신 길’을 뒤따르기로 한다.
1921년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6년 졸업하였다. 1926년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1931년 9월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 전국에 이름이 난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것은 1936년 여름, 송창근 (宋昌根)의 후임으로서였다. 그때 그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 (曺晩植) · 유계준 (劉啓俊) · 오윤선 (吳胤善) 등이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교회당 건축에 착수하여 1938년 3월 헌당식을 가졌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헌당식 직전에 경찰에 검속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그가 평양에 부임하기 1년 전부터 평양교회와 신학교를 괴롭혔고, 결국 평양의 숭실 학교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각각 폐쇄되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 (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하였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하였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되었다.
“자, 오늘 성도들 여러분이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면 주 목사가 더 이상 고문을 받지 않도록 해 주겠소.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들이 계속 신사참배 반대를 고집한다면 주 목사는 이 못 위로 걷는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오!” – 일본 헌병
그러나 “성도 여러분, 나 주기철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과 여러분이 함께 다짐한 것을 굳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라며 주기철 목사는 못위로 걸어갔다.
감옥에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 (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 상훈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