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 23일, 영국 연방군이 참전한 한국전쟁 가평 전투 (Battle of Kapyong, 1951년 4월 23 ~ 25일) 발발
가평 전투 (Battle of Kapyong)는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로 구성된 영국 연방군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과 가평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 때 발생했으며, 제27보병여단은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가평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와 패트리샤 왕녀 캐나다 경보병대 제2대대가 전방대대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왕립포병여단이 이들을 지원했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제6사단 병사들이 협곡을 통해 철수하자 중공군은 여단의 방어지역으로 침투해 504고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공격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 가평 전투(Battle of Kapyong)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 1951년 4월 23일 ~ 4월 25일
.장소: 경기도 가평
.결과: 유엔군의 승리
.교전국: 주한 영연방군 – 대한민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브라이언 버크, 브루스 퍼거슨, 제임스 스톤 / 원유첸, 덩위에
.병력: 제27보병여단, 미들섹스 연대, 왕립포병여단, 제3 RAR, PPCLI, 제6사단, 제5기병연대 / 제20군
.피해 규모: 127명 사상 / 1000~4000명 사상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7보병여단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여단의 측면으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677고지에 위치한 캐나다군을 공세의 주요 목표로 변경했다.
하지만 격렬한 야간 전투 이후,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가평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캐나다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가평에서 보여준 전투는 중부 전선의 유엔사령부가 돌파되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2개의 대대는 중공군 사단을 격렬한 전투 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중공군은 4월 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캐나다군이 수행한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 상황
- 서울 재탈환 및 중공군 4차 공세 실패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이듬해인 1951년 1월 4일, 국군이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주고 평택에서 삼척까지 후퇴하여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빠졌을 때, 중공군의 판단 착오로 반전의 기회가 생기면서 전선은 북으로 다시 밀어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한 번의 공세를 더 가하면 사기가 떨어진 아군을 금강 선까지 밀어낼 수 있었지만 참전 후 3차례의 공세를 연이어 실시해서 너무 지쳤기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후 크게 주저앉은 상태였다. 아군의 소규모 정찰대가 그동안 국군이 낯선 전술을 구사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공군이 보급에 차질이 생겨서 공세를 일주일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것과 병력에서는 열세지만 화력으로 중공군을 충분히 격파시킬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군은 작전을 짜서 순조롭게 실시하여 3월에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전선을 38도선까지 밀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선의 주도권 열세는 중공군이 잡고 있던 상태였다.
중공군이 곧바로 1951년 2월에 4차 공세를 개시하였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주공 (主攻: 주력을 기울여서 적의 주력부대를 침)이 돌파를 시도하려한 지평리는 미군 2사단과 프랑스군의 고립방어로 완전히 차단당해 실패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지평리 전투이다. 결국 지평리 전투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좌절되고 말었다. 하지만 중공군은 서울 다시 점령하기 위해 바로 5차 공세를 준비하였다. 중공군의 주공이 파주로, 조공 (助攻: 세력을 도와 공격함, 또는 그런 공격)이 춘천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이때 파주에는 영국군 29여단이, 춘천에는 영연방 27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5차 공세에 약 27만명과 북한군 약 3만5천 명으로 한강 북쪽에 배치된 유엔군 주력부대를 격멸시켜 노동절 (May Day)에 맞추어 서울에 재입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웠다.
- 중공군 5차 공세 시작
1951년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국군 및 연합군의 전 전선에 강력한 포격을 실시한 후 5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포격이 멈추자 중공군 대군이 서부전선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각 9개 사단로 구성된 중공군 19병단 (兵團: 국군의 야전군과 비슷함)은 개성-문산 축선에서 국군 1사단과 영국군 29여단을, 3병단은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군 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서울을 포위하려 하였다.

- 국군 6사단의 후퇴 및 위기
4월 22일,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공산군 조공이 공격하기로 한 곳은 중부전선 춘천지역의 사창리였다. 이곳을 담당한 부대는 미군 9군단에 배속된 국군 6사단이었는데 중공군은 국군의 뒤를 파고들어 후방을 차단하였다. 중공군은 사창리를 돌파하여 중부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 국군 6사단은 큰 피해를 받고, 4월 25일에 가평일대에 집결하게 되었다. 국군 6사단은 부대원 반 정도만 남고 대부분의 중장비는 파손된 상태였다. 국군 6사단의 후퇴는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아군 부대들의 후퇴로 이어져 전선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서부전선을 공격한 중공군의 주력이 글로스터 고지 전투에서 국군 1사단, 미군 3사단, 영국 29여단을 비롯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더 이상 남하를 하지 못하는 동안, 조공이었던 중공군 9병단이 전선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버렸던 것이다. 만일 중공군이 이 구멍을 통해서 경춘가도를 따라 계속 남하했다면 서울은 다시 공산군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중공군의 5차 공세가 성공되어 공산군의 승리로 될 위기였다.
이를 막기 위해 동원 된 부대가 바로 영연방 27여단이다.
- 영연방 27여단의 참전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군이 영국군을 중심으로 편제된 영연방 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내야 했다. 후퇴하는 국군 6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가평으로 향한 영연방 27여단은 국군을 추격하여 내려오던 중공군 20군과 1951년 4월 23일 가평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은 뉴질랜드 포병대대의 지원하에 호주군 대대와 캐나다군 대대, 영국군 미들섹스 대대 등 3개 대대 병력으로 3일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자신들보다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을 막아냈다.
본진인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의 3대대는 가평의 죽둔리에서 부대원의 40퍼센트 이상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켜냈다.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2대대는 가평 남단 667고지를 사수하여 후퇴하는 제6사단을 엄호하고 경춘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는데 공헌하였다. 뉴질랜드 16포병연대는 막강한 포병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을 완전히 차단, 격멸시켰다.
이 전투로 중공군 제20군은 제1차 춘계공세시에 북한강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노네임선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되었다.
- 미군 213야전포병대대, 일명 몰몬대대의 기적의 전투
1951년 5월 말에 경기도 가평지역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감행되었던 무렵, 미국 유타주 시다 시 출신의 장병들 600명으로 구성된 미군제213 야전포병대대는 미24 보병사단 21보병연대에 대한 화력지원 임무를 부여받있다. 그러나 공격 중이던 보병부대가 중공군을 포위하기 위하여 전진해 버리자 보병의 엄호 없이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보병부대에 포위된 것을 알게된 4,000명의 중공군들은 5월 26일밤에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240명으로 구성된 본부 및 본부포대와 A포대가 방어하고 있는 좁은 계곡으로 맹렬히 공격해 왔다.
고립된 240명의 장병들은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포대장 Ray Cox 대위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필사적이고 조직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결과 기적적으로 진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였으며, 중공군 사살 350명, 포로 830명의 엄청난 전과를 획득한 반면에 아군은 한명의 사상자도 없는 기적의 전투 성과를 기록하였다. 213부대는 이날의 승전을 ‘기적의 전투’로 부르며 큰 자부심을 가진다. 같은 해 12월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부대원이 쓴 글은 책임자였던 대대장 댈리 중령의 남다른 고뇌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는 훌륭한 리더였으며, 우리 모두를 염려해주었다. 몸무게 85kg에 갈색 머리였던 그는 일 년이 지나자 67kg에 백발이 되었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대대의 부대원 600명의 책임자였고, 우리 600명 전원은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참전 기념비가 59년 만인 2010년에 세워졌다.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영연방참전비 입구에 세워진 기념비는 가로 1.4m, 세로 1.2m 크기다. 펼친 책 형태의 기념비에는 당시 전투상황이 한글과 영어로 새겨졌다. 이에 앞서 미국 유타 주 시다 시에는 2008년 9월 한국전 참전비가 세워졌다. 213부대원의 대부분이 바로 시다 시 출신이고, 유타주를 개척한 정착민들로서 몰몬교로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교인들인 21세 전후의 절은이들로 구성되었다. 직업 군인이 아니라 명예롭고 평범한 농민, 교사, 직장인 들인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기적의 승리는 신앙에 힘 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조국의 부름을 받고 출병할 당시에 교회의 스테이크 회장으로부터 여러분은 한 명도 잃지 않고 모두 무사 귀환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가평군과 시다 시는 2009년 9월 자매결연을 맺었다. 가평군 관계자는 “시다 시와 시민들은 가평에서 벌어진 ‘기적의 전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이 참전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두 지역 간 교류를 더욱 강화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참전비 제막식은 2010년 10월 8일 오후 이진용 가평군수, 조 버지스 시다 시장, 참전 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결과
자신들보다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영연방 27여단의 가평전투의 승리와 임진강에서 중공군으로 의해 패했지만 3일동안 중공군을 막아낸 영연방 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로 중공군은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가평은 한국전쟁 역사의 길에 남는 거대한 전투의 장으로 변했고 영연방 27여단과 미국 213부대 (몰몬 대대)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빛날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다.
○ 이후
캐나다에서는 가평 전투에서 승리하고 귀국하였을 때, 위니펙에 위치한 부대 주둔지인 CFB (Canadian Forces Base) Winnipeg을 ‘Kapyeong Barrack’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지 교민들은 통상 ‘가평부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2005년 캐나다군의 부대 통폐합 과정에서 CFB Winnipeg에 주둔하던 육군병력들이 CFB Silo로 이동하고 위니펙 공항 인근의 제17비행단 주둔지가 새로운 CFB Winnipeg으로 명명됨에 따라 가평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가평부대’의 부지가 캐나다 연방정부와 원주민들간의 분쟁 대상이 되어 방치되어 있어서 여전히 현지 언론이나 주민들은 이 지역을 ‘Kapyeong’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CFB Silo내의 연병장 이름은 제2대대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Korea Parade Square’로 명명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가평이란 단어를 희생과 영광이란 말로 기억되고 있다. 4월에 ‘가평의 날 (Gapyeong Day)’로 지정하여 현역 군인들의 큰 기념일로 자리잡고 전투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3대대는 ‘가평3대대’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유명하다. 가평전투 60주년인 2011년, 가평에서는 기념행사가 열려 당시 영연방 참전용사들과 이례적으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줄리아 길라드 현직 총리가 참석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