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 5월 21일, 스웨덴의 화학자로 산소•청산가리를 발견한 칼 빌헬름 셸레 (Carl Wilhelm Scheele, 1742 ~ 1786) 별세
칼 빌헬름 셸레 (스: Carl Wilhelm Scheele, 1742년 12월 19일 ~ 1786년 5월 21일)는 스웨덴의 화학자이다.
산소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칼 빌헬름 셸레 (Carl Wilhelm Scheele)
.출생: 1742년 12월 9일, 독일 슈트랄준트
.사망: 1786년 5월 21일, 스웨덴 Köping
.국적: 독일, 스웨덴
.부모: 마르가레타 엘리노어 바르네크로스, 요아킴 크리스찬 셸레
.배우자: 사라 마르가레타 소네만 (1786년–1786년)
.발견 물질: 산소, 염소, 망가니즈, 몰리브데넘, 바륨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약사이며, 산소를 발견한 두 사람중 하나이다.
셸레는 43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는데, 요절 원인은 그의 기행때문이다.
일생 동안 실험을 하면서 건강에 굉장히 치명적인 버릇을 달고 살았는데, 바로 새로운 화학재료가 들어오면 자신의 입으로 무조건 맛을 보았던 것이다.
결국 이는 건강을 악화시키는 원흉이 되었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결혼 이틀 뒤에 요절을 하고 말았다.

○ 생애 및 활동
1742년 당시 스웨덴령이었던 포메라니아의 슈트랄준트에서 태어났다.
14살의 나이로 셸레는 예테보리의 약제상의 실습생이 되었다. 그는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그가 다루는 여러 가지 물질에 대한 실험에 임하였고, 화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실용적인 기술과 정밀한 손재주를 가지게 되었다.
1765년 그는 말뫼로 이사하였으며, 1768년에는 스톡홀름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그는 타르타르산에서 얻은 이타르타르산 칼륨 (KC4H5O6)을 처음으로 분리해 내었고, 이에 대한 논문을 당시 스웨덴에서 선구적인 화학자였던 토르베른 올로프 베리만에게 보내었으나, 베리만은 이를 무시했다. 이 논문은 이후 안데르 요한 레치우스에 의해서 스톡홀름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되었다.
1770년 셸레는 스톡홀름을 떠나 웁살라에 정착하였으며, 그 곳에서 요한 고틀리브 간의 중개로 베리만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후 셸레와 베리만은 매우 친근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1775년 셸레는 스톡홀름 과학 아카데미의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코핑으로 이주하였다.
1776년 그는 그의 약국을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그러나 약국의 경영은 아주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으며, 기반을 마련하기까지 몇 년을 소비하였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당히 많은 독창적인 연구를 이루어 내었으며, 매년 2~3개의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우 많은 일을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그의 건강은 나빠졌다. 그는 약국의 전주인의 미망인과 결혼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그의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졌다.
1786년 5월 19일 셸레는 결혼하였으나 이틀 뒤인 5월 21일 사망하였다. 향년 44세.
그는 실험을 하면서 모든 화학 재료를 맛을 보았고, 그로 인해 건강이 나빠져 사망했다고 한다.

○ 업적
셸레의 실험 분석력은 매우 뛰어났으며, 실험의 정확도 역시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셸레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면 상당히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상당히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셸레는 수많은 원소와 화합물을 발견하였다.
1774년 그는 이산화 망간을 분석하여 염소와 바리타를 발견하였으며 망간이 포함된 염의 성질을 설명하였다.
또한 1775년에 비산을 분석하여 비화 수소와 아비산 구리를 발견하였다. 셸레는 아비산 구리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에 대한 논문 또한 1778년에 발표하였다.
1776년에는 방광 결석을 연구하여 처음으로 요산을 발견하였다.
1778년에는 몰리브덴산을 추출하였다.
1779년에는 대기중의 산소에 비율에 대해서 연구하였으며, 이는 헨리 캐번디시의 측정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1780년에는 젖산과 점액산을 발견하였다.
1781년에는 텅스텐산 칼슘에 대해서 연구하였으며, 텅스텐산을 발견하였다.
1782년에는 에테르에 대해 연구하였고, 1783년에는 그가 7년 전에 발견한 글리세린의 특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셸레는 염료인 프러시안 블루를 생산할 때는 시안화 수소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으며, 독성 물질인 시안화 수소산의 성분, 특성, 심지어 냄새나 맛까지 분석하기도 하였다.
1786년에는 시트르산, 말산, 옥살산, 갈산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셸레의 유일한 저서인 Chemische Abhandlung von der Luft und dem Feuer은 1773년에 책에 실린 대부분의 연구가 끝났고 1775년에 필사본이 인쇄업자들에게 넘겨졌으나, 1777년에야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셸레는 플로지스톤설에 근거하여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산소를 ‘불 공기’라는 이름으로 이 책에 소개하였다.
그는 조지프 프리스틀리보다 일찍 산소를 발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비소 연구중 우연히 녹색의 화합물인 비산구리 발견
1775년, 스웨덴의 과학자인 칼 빌헬름 셸레는 비소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녹색의 화합물인 비산구리를 발견했다. 「컬러의 말」의 저자,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에 따르면 비산구리는 “살짝 지저분한 완두콩의 녹색”이었지만 셸레는 자신이 발견한 녹색의 상품성을 즉각 깨달았다. 녹색 안료와 염료에 목마른 시장에서 그가 발견해낸 비산구리는 그야말로 미다스의 손처럼 보였다. 이에 셸레는 비산구리의 대량생산에 들어갔고 셸레의 녹색은 스웨덴을 포함해 유럽과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비산구리는 천이나 종이는 물론, 종이와 조화, 심지어는 음식의 색소로도 쓰였다.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셸레의 비산구리는 곧 셸레그린으로 불리며 항상 새로운 안료에 목말라 있는 화가들의 유화에 곧장 사용되었다. 비단 화가뿐만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캔버스가 아닌 벽을 녹색으로 칠하고 싶어했다.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롤」, 「위대한 유산」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 역시, 자신의 집 전체를 새로이 유행하는 셸레그린 벽지로 꾸미고 싶어 했지만 고맙게도 그의 아내가 그를 뜯어 말렸다. 자료에 따르면 1858년까지 약 26만 제곱미터의 벽지가 비산구리로 염색돼 영국의 집과 호텔, 병원과 철도역 대기실을 장식했다. 1871년의 <영국 의학 저널> 문건에 의하면 녹색 벽지는 ‘궁전부터 인부의 오두막까지’ 모든 종류의 주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더불어 급증하는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수백 톤의 셸레그린이 영국에서 직접 생산되었다.
하지만 셸레그린에 노출된 사람들이 한둘씩 죽어 나가다가 해를 거듭하며 그 수가 점점 늘어나자 셸레그린을 둘러싼 불길한 소문이 점차 확산됐다. 마틸다 셰러라는 조화 제조공은 셸레그린으로 작업한 후 구역질, 구토, 설사, 두드러기,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1년 6개월만에 1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린 소녀가 모형 포도에서 녹색 가루를 빨아 먹은 뒤 죽은 사건도 벌어졌다. 이런 사례가 점차 늘어나면서 의사와 과학자는 모든 녹색 소비재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셸레그린이 그 원흉으로 밝혀졌다. 나중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겨우 가로 세로 6cm의 정사각형 녹색 벽지에도 성인 2명분의 치사량인 비소가 함유돼 있었다. 이와 관련해 런던 가이 병원의 의사였던 오웬 리스는 영국의 유력 일간지 ‘더 타임즈’에 녹색 원단의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에 참석하는 것은 비소를 연회장에 흩뿌리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셸레는 비산구리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자신의 발견물이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듯하다. 그는 177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산구리의 독성 때문에 자신의 공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기술을 뛰고 법은 기는 법. 비소덩어리인 셸레그린이 생산 금지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