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바울에 관한 새 관점 : The New Perspective on Paul: whence, what, whither?
제임스 D. G. 던 / 에클레시아북스 / 2012.3.30
제임스 던 (James Dunn)은 자신이 이제껏 발표한 ‘바울에 관한 새 관점’과 관련된 논문들을 모아서 2005년에 독일의 유명한 신학전문 출판사인 Mohr Siebeck에서 “바울에 관한 새 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특별히 이 책을 위해 ‘서론’ (제1장)과 ‘빌립보서에 관한 논문’ (제22장) 부분을 새롭게 써서 추가하였다.
이번에 번역된 본서는 이 무겁고 두꺼운 책을 모두 번역한 것은 아니고, 그 중 제1장에 해당하는 “새 관점 : 그 시작과 내용 그리고 미래” (The New Perspective on Paul: whence, what, whither?) 부분을 발췌번역해서 출간한 것이다.
던 (Dunn)은 서문에서 이 첫 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첫 논문에서 나는 내가 어떻게 ‘새 관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내가 이해한 바 그 내용을 정확하게 해명하고, 관련 논의를 더 깊은 수준으로 이끌어 가보려 한다.”
○ 목차
서문
1 개인적인 회고
2 관련된 혼란들과 오해들에 대한 해명
1 반- 루터주의?
2 율법의 행위들
3 잘못된 태도/오해?
4 차후의 발전
3 논의의 진전
5 다시 갈라디아서로
6 로마서 이해하기
7 바울은 율법과 ‘결별’했는가?
8 후기의 바울
4 좀 더 실질적인 쟁점들
9 일관성에 관한 문제 제기
10 마지막 칭의
11 행위에 따른 심판
12 그리스도에로 참여
5 결론
미주
참고문헌
○ 저자소개 : 제임스 D. G. 던 (James D. G. Dunn, 1939~ )
2002년 세계신약학회 (StudiorumNovi Testamenti Societas) 회장을 역임한 정상급 영국 신약학자다.
글래스고 대학교 (M.A.), 케임브리지 대학교 (Ph.D., D.D.)에서 공부했으며, 더럼 대학교의 라이트푸트 석좌교수로 은퇴한 뒤 같은 대학에서 라이트푸트 명예교수(EmeritusLightfoot Professor)로 봉직했다.
E. P. 샌더스, N. T. 라이트와 함께 바울 신학의 새 관점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바울 신학뿐만 아니라 역사적 예수 연구,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연구 및 기독론과 성령론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로 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러한 제임스 던의 학술적 업적을 기념하여 2005년 (The Holy Spirit and Christian origins: essays in honor of James D. G. Dunn, Eerdmans)과 2010년 (Jesus and Paul: Global Perspectives in Honor of James D. G. Dunn for His 70th Birthday, T&T Clark) 두 번에 걸쳐 헌정논문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국내에 소개된 ‘바울 신학’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로마서 상,하: WBC 성경주석’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8A,B),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An Inquiry into the Character of Earliest Christianity) 외에도 이 책이 속한 생성기 기독교 시리즈의 후속작인 ‘Beginning from Jerusalem’ (Christianity in the Making, vol. 2)과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 New Perspective on Jesus: What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Missed’,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Jesus, Paul and the Law’,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New Testament Theology),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BNTC) 등이 있다.
– 역자 : 최현만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20대 중반에 톰 라이트를 접하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의 저서를 번역하였다.
○ 책 속으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설명이 그의 이방인 선교라는 맥락에서 그에게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내용, 즉 복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거나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따르도록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변호하기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이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다는 좀 더 근본적인 사실을 부인하거나 경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신칭의가 단순히 개인에 대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칭의에 대한 바울의 신학은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칭의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느 나라 혹은 어느 인종에 속했으며, 어떤 문화 혹은 어떤 계급에서 성장했는지, 또는 그 사람이 어떤 특별하며 개인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삶의 형태를 수용하는지에 따라 조건적으로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식의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저항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면 바울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를 잃는 꼴이 된다. 조건을 따지며 사람을 판단하는 무례한 초강대국들, 초국가적인 집단들, 그리고 서구 ‘문명국’들은 바울의 교리가 가진 그러한 측면을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분명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과거에 바울, 어거스틴,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강력하게 재차 천명할 필요가 있다. 창조자 앞에서 피조물이 보여야 할 단 하나의 적절한 반응은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함을 인정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며, 그를 신뢰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의 충분한 범위에 대해서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신칭의는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하면서 복음에 다른 것을 더하려 하거나, 함께 식사하고 동역하는 성도들이 갖출 기본이라며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 이러한 시도에는 사도권 계승, 성찬식 배제, 여성 성직자 부인, 성경 무오설, 그리고 그와 같은 기타 주장들도 제외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에 대해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특정한 공식 표현을 주장하는 것조차도 복음의 진리를 흐리는 ‘행위’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신칭의의 복음에 추가하여 다른 무언가를 본질이라고 주장하면서 주님의 식탁이나 전도 사역에서 다른 성도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많은 베드로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을 복음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바울의 이해에 직면시킬 필요가 있다. —「결론」중에서
○ 출판사 서평
제임스 던 (James Dunn)은 자신이 이제껏 발표한 ‘바울에 관한 새 관점’과 관련된 논문들을 모아서 2005년에 독일의 유명한 신학전문 출판사인 Mohr Siebeck에서 “바울에 관한 새 관점” (The New Perspective on Paul)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특별히 이 책을 위해 ‘서론’ (제1장)과 ‘빌립보서에 관한 논문’ (제22장) 부분을 새롭게 써서 추가하였다.
이번에 번역된 본서는 이 무겁고 두꺼운 책을 모두 번역한 것은 아니고, 그 중 제1장에 해당하는 “새 관점 : 그 시작과 내용 그리고 미래” (The New Perspective on Paul: whence, what, whither?) 부분을 발췌번역해서 출간한 것이다. 던 (Dunn)은 서문에서 이 첫 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첫 논문에서 나는 내가 어떻게 ‘새 관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내가 이해한 바 그 내용을 정확하게 해명하고, 관련 논의를 더 깊은 수준으로 이끌어 가보려 한다.”
○ 추천사
“제임스 던은 영국 신학계의 가장 걸출한 대변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 40년 동안 수많은 논의들에 이바지해 왔다. 그 중에서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으로 알려져 있고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논의에 공헌한 점은 계속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 주제를 설명하고 개진하고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바울을 공부하는 진지한 학도라면 그 누구도 이 새로운 관점과, 이 관점으로 촉발된 다양한 논의들을 감히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 Themelios
이 책은 좁게는 제임스 던의 작업들과, 크게는 소위 바울에 관한 ‘새 관점’과 더 친숙해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다.” – European Journal of Theology
소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에 제임스 던이 기여한 바는 잘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하다. 그야말로 방대하다는 사실을 이 책이 증명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논문들은 바울 연구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들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아놓았으니 이제 서재에 꽂아놓을 책이 한 권 더 늘어난 것이다. 이미 이 논문들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의 서론을 읽음으로써 새 관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Booklist
○ 독자의 평
제임스 D.G. 던, ‘바울에 관한 새 관점’, 감은사(2018)
본 글은 감은사에 나온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감은사에 출간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던의 최근 연구가 아닌, 최초의 연구작이다. 이를 통해 새 관점의 학문적 동기, 목적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서에서 던의 고민과 추기(Additional Note)를 통해 던을 향한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것을 보고, 동 저자이나 보다 후기에 완숙한 표현으로 기록된 번역서를 읽고자 하는 독자들은 에클리시아북스에서 출간된 번역서를 읽어보길 바란다. 단,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해 초기 고민을 엿보고 싶은 이들은 본서를 음미해보시라!
- 들어가며
바울에 대한 다양한 방법 (사회학 접근, 수사비평 등)으로 연구됐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도 바울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 이르지는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관점이란, 불트만과 케제만 조차 넘지 못한 루터의 관점으로 해석한 바울: 행위 없이 오직 은혜로만 칭의를 얻었다 (이신칭의)는 관점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울은 20세기까지 다양한 연구가 시도했으나, 16세기 루터의 관점으로 귀결된다.
- 던 : 샌더스의 유대교 이해 수용
캐나다 맥매스터대학의 E.P.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통해 바울 연구에 새롭게 시작됐다. 기존 학자들이 바울을 통해 당시 유대교를 그리려는 시도가 아니다. 바울과 유대교를 이분화시켜 바울이 일방적으로 유대교를 폄훼하고 있음을 유대교 학자들은 지속해서 지적했지만, 정작 기독교 학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가 1세기 유대인들의 민족 정체성과 그들의 종교의 출발점였음을 봐야 한다.
유대교에서 율법의 순종은 하나님과 언약을 유지하는 사안이다. 이를 샌더스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으로 규정한다. 언약적 율법주의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인간의 위치가 언약 위에 정립됐 (…) 계명을 순종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한편, 범법 행위를 속죄할 수단을 제공한다는 견해”로 정의한다. 샌더스를 통해 1세기 유대문헌에 나타난 유대교가 바울 신학을 배경으로 복원한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얼마나 다른지 잘 보여준다.
- 던 : 샌더스의 바울 해석 거부
샌더스는 바울의 개종을 강조하기 위해 기독교와 유대교를 너무나도 극명하게 이분했다. 이 측면에서 바울이 율법과 완전히 단절된 혹은 율법을 거부한 것처럼 그렸지만, 정작 바울은 그렇게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율법의 행위들과 율법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율법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의하는 정체성과 경계선을 나타내는 표지로 율법을 간주하는 방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16”을 해석함에 있어 “들어감(entry)”을 “머무름(staying in)”을 구분함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가르침은 이렇게 양분화돼 적용점을 가지지 않는다. 도리어 바울이 율법을 존중하지만, 율법의 행위들로 잘못된 태도들을 지적하는 본문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바울이 비판한 대상은 ‘하나님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얻은 ‘표식’이자 ‘조건’인 ‘언약적 율법주의’다. 이런 율법과 유대교의 문제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 세상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는 선민사상에 있다. 그러나 샌더스는 바울과 율법의 단절을 주장함으로, 예수 운동과 이스라엘 종교 간에 불연속성이 생긴다. 이는 샌더스 이론에서 주장한 “로마서 11장 올리브 나무”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 샌더스 이론을 기반한 바울에 관한 새로운 이해
샌더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본문을 주해하면 바울 신학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2:16이 들어가는 맥락을 보자. 바울은 이전에 안디옥에서 불쾌한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안디옥에서는 이방인들이 동료 신자가 되기 위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됨을 이미 채택을 받았다. 예루살렘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으로 안디옥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베드로를 포함한 다수의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과 식탁 교제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두고 베드로를 비난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했던 말을 반복하는 대신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여겨짐을 설명한 것이다.
의롭게 여겨짐 (being justified)이란 표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 지점에서 안디옥에서 베드로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의롭게 여겨짐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구분시키는 표현이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거나 준수하지 않기에 죄인들로 여겨진다. 그래서 바울은 “의롭다고 여겨짐”을 말할 때, 단순히 들어감 입문 공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칭의는 누군가가 언약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 여겨지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에 미래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 additional note, “의”에 관한 개념
레이네젠의 비판이 더불어 나온다. 1) 레이네젠은 명사구와 동사는 신중하게 구별해야 하며 2) 유대교와 바울의 연속성을 던이 지나치게 강조했으며 3) 바울의 생각 발전을 보여주는 표시가 없으며 4) 바울의 공격 대상은 “율법 자체”라며 던의 이론을 집요하게 비판했다.
1) 이에 대해 던은 하나님의 의에 관해 “의”의 명사형과 동사형은 지시하는 의미와 영역이 다르며 동시에 기능과 의미영역이 중첩되기도 한다. 로마서 4:2-3, 5와 갈라디아서 3:6, 8 및 5:4-5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의”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행위에 의한 결과이다. 의는 회심 때 부여되는 신분이자 지속되는 신분, 생면 안에서 관계, 그리고 전체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롬 6:16, 갈 5:5). 의를 수영하고, 지탱하며, 최종적으로 확고하게 만든다.
‘δικαιοῦται’ 동사는 옮겨감을 의미한다. 부정과거나 완료시제로도 사용되지만 또한 현재나 미래로 사용되기도 한다. 미래시제의 경우 심판의 날에 있을 최종적인 칭의를 가리키고 있다 (롬 2:1, 갈 2:16). 구원을 위해 효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의미한다.
언약에 대해 하나님의 주도적 행동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은 필수적인 요소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기독교 고유의 가르침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신앙의 연장으로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는 유대인들이다.
바울의 공격대상은 “언약적 행위들”, “언약과 연관된 행위들”, “언약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하는 행위들”이다. 예루살렘의 경우 할례가 쟁점였다. 안디옥에 경우 제의적 정결이 이슈였다. 바로 이점에서 바울은 “율법 행위들로 인한 의”를 거부는 유대 정결법 준행, 혹은 음식에 대한 금기에 달려있다는 견해를 거부한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에 대해 말하면서도 갈라디아서 수신자들이 특정한 율법의 준수를 떠올리기 원했다.
특정한 율법 (할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등)의 준수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디아스포라 유대교가 가진 유대인들의 표지 (identity marker)로 가능했다. 이러한 표지들은 유대성 (Jewishness)을 규정한다. 이 정체성 표지는 언약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배지(badges)로 기능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으로 하나의 표지였고, 정결한 음식은 마카비 가문 시대부터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기 거부함으로 하나님에 신실함을 보여줬다 (단 1:8-16; 토빗 1:10-13; 유딧 10:5; 12:1-20). 안식일을 포함한 특별한 날에 대한 준수는 창조 기사를 기반하며, 십계명에 축일, 이사야서에서 안식일과 언약을 명시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특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규정시키는 규율들이며 이러한 율법의 행위들 ‘없이’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언약적 의로움 안에 거한다는 것은 1세기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은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로 의롭게 됨”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유대인의 자기 이해를 공격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 운동의 핵심은 유대인들로부터 구별 짓는 기준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율법의 행위들을 통한 칭의”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으며 완전히 반대된다. 16절 상반절을 보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배제한 (except)”은 율법의 행위들을 한정짓는 조건인 것이다.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배제한 채 율법의 행위들에 근거한 칭의를 제약한다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이다. 바울을 통해 언약적 율법주의과 믿음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예수 운동은 전통적인 유대적 믿음이 메시아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보다 정교한 작업을 수행했음을 볼 수 있다 (additional note 中 F.F 부르스는 갈라디아서 2:16에서 ‘~를 배제한/제외한’이라고 번역한 것은 관용어법을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ἐὰν μὴ” 역접이 아닌 제외의 의미로 볼 수 있다. 몰튼과 하워드와 동일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수많은 예를 통해 보여줬다. 배제의 대상은 분명 주동사인 ‘의롭다 여겨지다’의 조건을 한정하고 있다. 바울 및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면, 무죄선고를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실 때 보시는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믿음에 근거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면, 우리가 받아들여질 만하게 된 것은 믿음에 근거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정체성 표지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 표지가 된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율법의 행위들, 언약 안에서 우리의 의무들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를 놓고 씨름했다. 이러한 씨름의 끝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언약의 목적을 성취할 시간이 됐고, 하나님의 언약에 종말론적 목적은 이방 족속들에게 축복을 주기 위함였다. 언약은 더 이상 민족주의적이거나 종족주의적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확장됐다.
우리는 믿음과 의례 (ritual)로 이분화해서는 안 된다. 외형과 내심, 제의적과 영적이란 구분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바울이 거부했던 것은 신앙의 인종적인 표현이지 제의적인 표현이 아니다. 바울이 거부한 것은 행위를 강조하는 신념이 아니라 민족주의였다.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민족주의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아울러 육적이란 개념은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태도가 아니라, 관계성 개념과 육신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유산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모든 육체”를 강조하는 바울의 표현에서 육체적 차원에서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바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다른 출발점을 거쳐 육신을 십자가형에 처하기에, 현재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육신적 제의나 육신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갈 2:20).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육신(민족)에 따른 이스라엘을 넘어 확장됐고, 하나님의 의를 친족관계에서 제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바울이 반대한 것은 선한 행위들이나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특권이자 유대민족만이 전유물로 여겨진 행위들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 율법이다. 그가 거부했던 행위들은 민족적 특권을 나타내는 행위들이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며 행하는 육신적인 행동들이다. 하나님의 평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 그 어떤 경우에도 유대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징짓고 구별 짓는 율법의 행위들의 준수에 달려있지 않다.
로마서 3:27에서 바울이 다루는 자랑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표찰로서의 할례에 대한 자랑이다. 샌더스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16세기의 눈가리개에서 벗어난 것은 매우 중요하나, 정작 샌더스의 이론에는 율법을 지키겠다는 선언에서 바울 스스로가 자기모순적으로 보여지게 된다. 행위들에 표현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타내는 표찰이지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랑이 아니다. 따라서 샌더스는 율법들의 행위와 율법 준수를 구별하지 못해 자신의 통찰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바울이 거부한 것은 율법을 이스라엘의 전유물로 보는 견해다. 신자의 모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같이 유대교의 언약 근간을 이루는 조상이지 혈통적 민족으로 보지 않았다.
- 정리하며
끝으로 던은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바울과 그의 신학에 대해 보다 선명한 통찰과 이해를 가져다주는, 얼마나 가치 있는 작업인가에 대해 충분히 부여줬다고 생각한다.”라 기록하며 글을 마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