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인생은 삶과 죽음의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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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쓴 “모든 인간은 죽는다”란 소설이 있다.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죽지 않는 ‘포스카’와 죽어야 하는 ‘레진’. ‘불멸과 필멸’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 작품이다.
작가는 불멸은 축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죽음이 있기에 오늘의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완성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다. 인간은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유한한 인간의 시각으로 우연이라고 하지만, 무한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존재 자체가 필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우리의 사명이다. 죽음이란 사명을 완성하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7가지 말씀이 있다. 그 중 6번째 말씀이 “다 이루었다”(요19:30)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바울도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에게 이렇게 고백한다.”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사명이 있다는 것이고, 죽는 다는 것은 사명을 마쳤다는 것이다.
2. 죽음과 삶의 이유는 같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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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삶의 이유와 죽음의 이유”가 다르면, 죽음의 앞에 섰을 때 살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 살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해 죽을 수는 없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죽음의 순간이 올 때, 살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하며 눈을 감을 것이다.
바울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주의 것으로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사람이다. 삶과 죽음의 이유가 동일하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결코 후회하거나 비겁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
3. 죽음으로 삶을 설명할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반대의 개념이 아닌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죽음이 없는 삶은 세상에 없으며, 삶이 없는 죽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 있다. 우매자는 죽음 없이 삶을 이해하려 하지만, 지혜자는 죽음을 통해서 삶을 이해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끝에서 시작을 바라보는 혜안이 있어야 하고, 헤어짐에서 만남을 생각할 수 있는 명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에서 삶을 바라보는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50/50
50/50 영화가 있다. 2011년에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작가 ‘윌 라저’의 실제 이야기이다.
한창 활동할 시기에 암 선고를 받고 투병 생활을 했다. 8개월이 넘도록 병을 숨기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사실을 얘기했을 때 그 반응을 잊을 수 없었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죽음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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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건강한 27살의 라디오 작가 ‘아담(Adam)’이다.
그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멀리하며,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운동을 하면서 신호등이 노란 색으로 바뀌니 횡단보도도 건너지 않을 정도로 그는 매사에 조심하면서 산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척추암’ 선고를 받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한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생존 확률이 50%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었던 여자 친구는 배신하고, 소식을 접한 엄마는 좌절하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하지만 절친 ‘카일(Kyle)’이 아담에게 용기를 준다.
“와 50%, 도박장에 가면 그 만큼 좋은 확률도 없어, 너는 살 수 있을 거야”.
둘은 여성의 모성애를 자극하며 연애도 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약물치료가 불가능해지자 생사를 건 수술을 해야만 했다.
침대에 누워 수술실을 향하는 ‘아담의 두려움’과 ‘엄마의 애통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치고, 영화는 Happy Ending으로 끝난다. 아니 작가 ‘윌 라저’는 척추암을 이기고 다시 일어났다.
50/50 확률은 동일하다. 선택은 나에게 있다.
내 믿음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다.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 옆으로는 ‘사람과 관계’, 안으로는 ‘나와 관계’. 관계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마22:36-39) 모든 관계의 본질은 ‘사랑’이다. 바울도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롬13:8),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10)고 했다.
하나님과 관계 – 영성 (靈性 – Spirituality)
하나님과 관계는 ‘영성’이다. 영성은 ‘신령한 품성 또는 성질’이다. 혼의 성품이 인성이고, 영의 성품은 영성이다. 인간은 예수 믿기 전에는 영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성으로 산다. 우리 가운데 인성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착하고, 정직하고, 성실해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영성이란 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이 죽었다.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은 죽음이고, 관계의 회복은 생명이다.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영에 거하는 것이다. 깊은 영성이란,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Christ likeness)이고,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이다.(엡4:15) 이를 성결(Holiness)이라고 한다. 영성은 ‘하나님 사랑’이다.
사람과 관계 – 사회성 (社會性 – Soci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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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관계는 ‘사회성’이다. 인간(人間)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는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이다. 사회성이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회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소통을 잘한다. ‘사회성 결여’라는 말은 타인과 소통이 어렵다는 뜻이다. 타인과 소통이 단절된 상태가 ‘자폐증’이다. ‘자폐증'(自閉症)란 자기 안에 갇혀있는 상태를 말한다. 영어 “autism”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자신”을 뜻하는 “αυτος (autos)”에서 유래된 말이다.
‘집단지성’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말이 있다. 개개인은 미약하지만 함께 모이면, 큰일을 할 수 있게 되는 힘을 ‘집단지성’이라고 한다. 단순 사회구조에서는 ‘개인의 힘’을 많이 의존하였지만,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집단지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 현대의 인재는 슈퍼맨이 아니라, 사회성이 높은 사람이다. 사회성은 ‘이웃 사랑’이다.
나와 관계 – 인성 (人性 – Personality)
나와 관계는 ‘인성’이다. 사람은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 인성이 좋다는 것은 ‘지성과 감성’이 통합된 상태이다. 이성이 IQ라면, 감성은 EQ이다. 이성은 의식의 지배를 받고, 감성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이성과 감성의 관계는 빙산과 같다. 물위에 떠있는 부분은 이성, 물 밑에 잠겨 있는 부분은 감성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감성적 존재이다. 감성이 상하면 이성도 마비된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감성이 상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해야 한다. 감성 (E+motion)이란 ‘행동하게 하는 힘’이다. 뇌 과학에도 ‘1층 생명 뇌, 2층 감성 뇌, 3층 이성 뇌’로 구분한다. 이층의 감성 뇌에 문제가 생기면 삼층인 이성 뇌까지 가지 않는다. EQ가 높으면 IQ도 좋아진다. 그래서 “기분 좋은 뇌가 공부도 잘한다”는 말도 있다. 스펙을 통하여 취직은 할 수 있지만, 인성이 없으면 승진할 수 없다. 현대는 인성이 경쟁력이다. 인성은 ‘자기 사랑’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자기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한 나를, 나도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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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