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사회의 재창조 :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
조너선 색스 / 말글빛냄 / 2009.6.15
다문화주의 시대에 있어서 사회가 새롭게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책이다. 저자는 현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붕괴’라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다문화주의가 편협적이고 배타적이며 신경질적인 사회적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회가 서로의 가치와 다름은 인정하고 더불어 가는 사회,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를 만들 것을 주장한다.
사회란 부와 권력에 대한 모든 고려에서 벗어나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차이를 존중하는 공간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사회는 함께 모여 차이의 영역을 초월한 보편성 아래 연대하는 공간으로서의 사회이다. 자발적 시민의식, 자원봉사, 공동체 서비스, 시민 참여와 같은 건강한 공동체 관계를 이끌고 다른 이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사회가 될 때 비로소 자유민주주의의 붕괴와 배타적인 다문화주의를 극복하고 더욱 풍요로운 사회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 목차
서문 · 다문화사회의 통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1부 우리는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가
1장 사회의 형태: 시골 별장, 호텔 그리고 고향으로서의 사회
시골 별장으로서의 사회 | 호텔로서의 사회 | 포스트 다문화주의
2장 다문화주의의 역사
문화다원론 | 다문화주의의 탄생
3장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자유의 패배
도덕의 법제화 | 미덕 이후의 시대 | 지적 배신 | 폭력의 시작
4장 희생자
희생자로서의 범죄자 | 희생자의 정치학 | 행위자에서 희생자로 | 과학과 자유의 죽음 | 권리와 승인 | 자발적인 희생
5장 기술과 문화의 분열
인쇄술과 민족국가 | 글로벌미디어와 자생문화의 종말 | 세계화기구와 분열
6장 내적 도피
정체성의 탐구 | 부족으로의 회귀 | 통합주의의 붕괴 | 국민국가에서 ‘작은 국가들로’ | 이 장을 마치며
2부 새로운 사회의 창조
7장 잊혀진 정치학의 고전
정치적 자유주의 | 가치관과 정체성 | 성경의 정치학 | 성서 이야기를 읽는 방식
8장 사회적 계약과 사회적 언약
사회적 언약 | 사회와 국가에 관한 토마스 페인의 이론 | 정치체계의 세 가지 유형 | 서양 정치사에 있어서의 언약
9장 이야기하기
역사와 기억 | 체계로서의 진리, 이야기로서의 진리 | 이야기하기는 왜 인간됨의 일부인가 | 언약의 변화
10장 책임 있는 사회
사회 안의 자선 체계 | 자원봉사의 시대 | 사회 자본 | 책임의 문화
11장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
성막은 무엇인가 | 밀턴과 성전(聖殿) | 자발적 기여와 비자발적 기여 | 이 장을 마치며
3부 그 다음은 어디인가?
12장 언약의 적용
국가와 시장을 넘어서 | 언약의 논리 | 공공선 | 충실성 | 복합적 정체성 | 결속의 필요성
13장 나는 누구인가?
이중 언어의 사용 | 국가적 이야기 | 묘사와 서사 | 영국적 가치 | 가치에서 이야기로
14장 대면적 접근법과 나란히 접근법
나와 너 | 도둑동굴 연구 | 비유토피아적 평화 | 결속사회자본과 연결사회자본
15장 예의의 실천
시민사회 | 예의의 상실 | 중립 공간
16장 다문화주의인가, 관용인가?
정의하기 어려운 미덕 | 용인의 탄생 | 용인에서 관용으로 | 관용에서 다문화주의로 | 네덜란드의 사례
17장 가족의 복원
가족의 통합 | 결혼의 미래
18장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종교적 변호
자유민주주주의 한계 | 권력의 포기 | 평화의 유지
19장 창조를 시작할 때
잃어서는 안 될 가치 | 언약의 정치 | 가치의 우선순위 | 다문화주의를 넘어서
주 | 참고자료
○ 저자소개 : 조너선 색스
영국 정통파 랍비로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 성서주석가로서, 영국연방에서 가장 큰 회당 조직인 연합히브리회중의 영적 지도자인 최고 랍비(1991-2013)와 랍비 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최고 랍비에서 은퇴한 후에는 뉴욕대학교와 예시바대학교, 런던 킹스칼리지의 유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라울발렌버그 인권센터의 정회원이었다.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한 그는 “인생의 영적 차원을 가르친 특별한 공헌”을 인정받아 2016년에 템플턴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서 예루살렘 상, 라디슬라우스 라츠 에큐메니컬과 사회적 관심 상 등 많은 상을 받았으며, 열여덟 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런던에서 폴란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곤빌앤카이우스 대학에서 실존 철학을 공부한 후 옥스퍼드 뉴칼리지와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공부하여 1981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유대인 대학과 예쉬바 에츠 카임에서 랍비 안수를 받았다. 1978년에 런던 골더스 그린 회당의 랍비로 임명된 후, 1983년에는 센트럴 런던의 웨스턴 마블 아취 회당의 랍비가 되었다. 1970년에 일레인과 혼인했으며, 세 명의 자녀와 여러 명의 손주들이 있다.
랍비 색스는 그의 사역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 2016년에 템플턴 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1995년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삶을 위한 그의 공로로 예루살렘 상을 받았고, 2011년에는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교로부터 라이슬라우 라츠 에큐메니칼 및 사회적 관심 상을 받았다. 바일란 대학교의 잉게보르그 레너르트 예루살렘 학문센터로부터 시온 수호자 상을 받았으며, 2014년에는 이스라엘의 현대생활에서 할라카에 대한 그의 실천적 분석과 적용에 공헌한 것을 인정받아 카츠 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차이의 존중: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와 ≪사회의 재창조: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찾아서≫가 번역되었다.
- 역자 : 서대경
한양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등에』, 『셰익스피어의 여인들』 등이 있고, 2004년에는 계간지 『시와 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 출판사 서평
- 더불어 사는 사회의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인류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고향으로서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미래
“더 이상 문명인들 사이에는 보편적 이해의 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료애를 충족시켜줄 어떠한 공동의 연계도 갖지 못한다…문명화된 질서의 회복만이 이를 다시 가능케 할 것이다.” – 월터 리프만
- 다문화주의 사회
오늘날 다문화주의는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것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 다문화주의는 관용을 지향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다문화주의가 적용된 국가들에서 그 결과는 예전보다 더 배타적이고 편협하며 신경질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영국, 스페인, 프랑스, 미국이 겪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문화주의적인 접근 방식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다문화주의는 이 책이 논하고자 하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 즉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붕괴’라는 문제가 지닌 한 측면에 불과하다. 저자가 주장하려는 것은 1950년대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며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이를 위해,
1부에서는 도덕 기준의 상실, 문화에 끼친 과학기술의 영향, 국가적 자긍심의 부재, 가족의 붕괴, 사회로부터 공동체로의 내적 도피 경향 등과 같은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적 조건을 빚어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2부에서는 사회건설 이론의 기초 원리들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이는 지금까지의 정치학 연구가 외면해온 영역이다.
3부에서는 시민적 민족주의, 공동의 정체성 강화를 위한 몇 가지 방안을 개괄적으로 제시한다. 이때의 정체성은 피부색이나 종교가 아니라 우리가 차이의 존중을 바탕으로 개인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을 함께 이루기 위해 연대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정체성이다.
- 사회의 파편화 현상
정보기술의 혁명과 실시간 글로벌 통신기술은 두 가지 중대한 효과를 가져왔다. 첫 번째 효과는 정보기술이 글로벌 경제에 끼친 영향이다. 두 번째 효과는 정보기술의 발전이 과거 우리가 ‘국가 문화’라 칭했던 모든 것들에 끼친 영향력이 그것이다.
국가 정체성의 상실과 사회의 파편화 현상은 후기자본주의 시대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구조적 현상이다. 도덕성에 대한 신뢰 상실, 모든 강한 신념은 결국 ‘권위주의적 자아’와 잠재적 폭압국가를 가져온다는 생각, 가족의 붕괴 현상, 부모의 역할에 대한 신념의 상실도 같은 맥락에 있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글로벌 경제와 자유시장이 지역성, 충성심과 같은 가치들에 미치는 야만적인 파급 효과 또한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일부이다. 우리는 옆집에 사는 이웃보다 수천 마일 떨어진 사업 파트너를 더 가깝게 느끼는 글로벌 엘리트들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우리가 주변의 이웃들,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서 느끼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공동의 정체성과 단일한 운명 아래 연대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재정치와 폭압국가를 낳는 편협한 민족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 것은 바로 다양성이라는 가치였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차이의 가치와 보편의 가치를 똑같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으로서의 사회
사회는 우리 모두가, 기독교인, 유대인, 힌두교인, 시크교인, 무슬림,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세속적 인본주의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고향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사회를 세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시골별장 사회, 호텔 사회, 고향 사회이다. 과거와 현재의 모델인 시골별장과 호텔 사회를 지양하고 고향으로서의 사회를 향해 나갈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만의 삶, 특정 집단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골 별장으로서의 사회’
외지인들이 시골별장에 머무는 사회이다. 집주인이 아무리 관대하다 할지라도 외지인들은 어디까지나 그 집의 손님일 뿐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 그 별장은 그들의 집이 아니다. 그곳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영역에 속해 있다. 즉 자신이 가꾸어야 할 사회가 아닌 것이다.
‘호텔로서의 사회’
비용을 지불하고 일시적으로 머무는 사회이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투숙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호텔과 투숙객은 순수한 계약관계로 맺어져 있다. 손님은 호텔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버린다. 정착하고 가꾸어갈 수 없는 사회이다.
‘고향으로서의 사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사회이다. 이주민들의 거주지는 그들이 떠나온 곳의 특성이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도시의 특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터전을 건설하고 주인으로서 새로운 모습을 창조한다. 이 모델은 앞서의 두 모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만큼 더 많은 결실을 이루어낸다.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거처, 즉 고향을 찾았다고 느낀다. 그들은 길손의 자격으로는 얻을 수 없는 자부심을 갖는다. 또한 호텔에서와는 달리 마을 사람들과 참된 관계를 맺는다. 그들은 계획에 따라 함께 일하고 함께 사회 건설에 참여한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은 다수와 소수 양자의 정체성 모두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로 결합해 공공선을 창조해야 한다. 사회는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역동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다.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면 다를수록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사회의 가능성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는 차이를 분리가 아닌 기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행동이 소속감을 창조하며, 이는 동화 없는 통합으로서의 사회를 뜻한다.
- 공동의 도덕선
사회란 이상 理想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정치, 도덕, 윤리 등에 대한 공유된 이상들 없이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선과 악에 대한 근본적인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공동의 합의가 존재하고, 그것이 적절히 기능할 때만이 사회는 분리를 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라는 체계는 단순히 현상적인 요인들만이 아니라 공유된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끈이 너무 느슨하다면 사회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공동의 도덕성이 바로 이러한 끈에 해당된다. 공동의 도덕성이라는 끈은 인류 전체를 위한 가치이다.
자유라는 이름을 내건 자유의 배신과, 관용이라는 이름을 내건 관용의 파괴가 자행되는 사회에서라면 해피엔딩은 있을 수 없다.
- 자유와 존엄성
비극의 문화와 희망의 문화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때 우리는 운명의 노예가 아니다. ‘용서하는 존재’가 현실의 핵심 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을 때 우리는 죄로 인한 구제받을 길 없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미래지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이다. 자유의 언어는 미래 시제로 쓰여진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갇혀 있지도, 과거의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운명의 굴레에 매여 있지도 않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사회구성원들 모두가 똑같이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삶의 방식, 관습, 신념들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습이나 신념을 초월한 보다 근본적인 가치로서의 인간 존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똑같이 존엄한 존재들이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자유가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집단에 속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자신에 대한 훌륭한 평가를 요구한다거나 존경을 요구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존경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존경심을 얻을 수 없다. 존경은 자발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존경만이 참된 존경일 수 있는 것이다.
- 신기술의 등장과 문화의 해체
신기술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자생적인 민족문화가 해체되고 있으며 문화는 파편화되고 있다. 글로벌 미디어는 정체성의 세계화를 강화하며 이러한 정체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것이 바로 종교적 정체성이다. 그리하여 사소한 감정적 도발이 언제든 눈사태처럼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 신기술은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신뢰를 손상시킨다. 또한 신기술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단순화시키고 뉘앙스와 상호조정의 정치를 약화시킨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국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문화, 도덕, 사회적 통합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정치 사상가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기도 한다. 사회가 분열될 때, 정치는 합법성을 잃는다. 내가 소속되어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 사회의 법률과 정부 권력을 왜 인정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소속감’이다.
- 책임의 문화
현대사회는 두 가지 기관에 크게 의존한다. 시장과 국가가 그것이다. 양자는 모두 자기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계약기관이다. 또한 전자는 부를 위해, 후자는 권력을 위해 경쟁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와 달리 사회는 오로지 경쟁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신뢰가 없다면 사회는 결국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집단이든(영장류나 돌고래와 같은 사회적 동물들의 경우에 있어서조차) 경쟁과 더불어 상호협력의 습관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상호협력의 습관은 신실성, 성실, 정직, 근면, 우정, 협동성,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타인이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행동하는 것 등과 같은 언약적 미덕에 의존한다.
책임의 문화는 인간 자유의 길잡이이다. 그것은 ‘다른 먼 곳’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의 변화에 주안점을 둔다. 책임의 문화는, 개인을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힌 무력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변화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나아가 위대한 변화는 우리들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타인과 협력하고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확고한 토양을 마련해줄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자유와 존엄을 존중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갈 수 있다.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는 동시에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이것이 저자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을 사회의 메타포로 제기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를 위한 개인적, 집단적 책임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시골별장을 세우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손님일 뿐이었다. 또한 호텔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투숙객일 뿐이다. 이 두 종류의 사회 모델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우리들 바깥에 위치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의 사고 능력을 마비시킨다. 반면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으로서의 사회에서 나는 공동소유자의 권위를 갖는다. 나는 그 사회의 계획과 창조 과정에 참여하며 그곳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럼으로써 그 사회는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그곳에 속해 있다. 그곳은 나의 고향이 된다.
- 예의와 시민사회
예의와 시민사회는 서로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전자는 개인의 예절, 민감성, 겸손, 배려와 같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이다. 후자는 협력, 모임, 약속으로 맺어진 공동체와 같은 사회적 현상과 관계된다. 예의와 시민사회는 비인간적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 가운데서 개인이 지닌 힘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방인으로 내던져진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우정을 맺을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도시에서의 고독한 군중의 삶이 빚어낸 익명성의 사막에 존재하는 연대의 오아시스이다. 그것은 갈등과 경쟁을 초월하는 힘이다. 예의가 사라지고 시민사회가 정치화될 때 자유의 미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다면 예의와 시민사회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예의는 무엇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말을 존중하며 경청하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 예의는 편향적 언어 사용과 인신공격, 소수 의견의 묵살, 논의를 빙자한 분노의 표출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시민사회는 비정치적 기관이 정치적 목적에 포획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담당한다.
- 사회의 통합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유일한 문화는 미래를 위해, 자식과 다가올 세대의 미래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문화이다. 현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체제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국제적 무질서 상황 아래서 사람들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리주의적 성향의 상이한 정체성들로 분열되고 있으며, 더 심하게는 소통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극심한 인종적, 종교적 갈등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고귀한 이상의 기치 아래 서로가 서로를 살육하는 이러한 묵시론적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의 정치이다. 어떤 유토피아적인 평화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발적 시민의식, 자원봉사, 공동체 서비스, 시민 참여와 같은 건강한 공동체 관계를 이끌고 다른 이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소박한 평화이다.
통합이란 사회 건설의 사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식적 결단을 뜻한다. 우리는 계약적 사고관이 아닌 언약적 사고관을 필요로 한다. 언약은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와 함께 만들어가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자유는 국가뿐만 아니라 사회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국가적인 이야기가, 공동의 기억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필요하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는 부와 권력에 대한 모든 고려에서 벗어나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차이를 존중하는 공간이다. 사회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힌두교인, 불교도, 시크교도가 함께 모여 차이의 영역을 초월한 보편성 아래 연대하는 공간이다. 사회는 함께 모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을 위해 창조해 나가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을 토론하는 공간이다. 사회는 공동의 정체성을, 그리고 민족 및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2차 언어에 앞서서 시민의식이라는 1차 ?어를 공유하는 공간이다. 사회는 이방인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사회 자체가 구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인류가 공존을 위해 고안해낸 최선의 방식이다. 각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재능을 통해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향이 된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