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6년 11월 8일, 프랑스의 왕 ‘사자왕’ 루이 8세 (Louis VIII le Lion, 1187 ~ 1226) 타계
루이 8세 (프: Louis VIII le Lion, 1187년 9월 5일 – 1226년 11월 8일)는 1223년부터 1226년까지 프랑스 왕으로 카페왕조의 8대 왕이다.
그는 또한 1216년부터 1217년까지 잉글랜드의 대립군주이기도 했다.
용맹함으로 ‘사자왕’ (le Lion)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푸아투와 랑그도크에서 왕권을 확립했다.
– 루이 8세 (Louis VIII le Lion)
.출생: 1187년 9월 5일, 파리
.사망: 1226년 11월 8일 (39세), 몽팡시에 성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가문: 카페가
.부모: 부) 필리프 2세, 모) 에노의 이자벨
.배우자: 블랑카 데 카스티야
.자녀: 루이 9세, 로베르 1세 다르투아, 알퐁스 드 푸아티에, 이사벨 드 프랑스 왕녀, 샤를 당주
.종교: 로마 가톨릭 교회
*프랑스의 군주
.재위: 1223년 7월 14일 – 1226년 11월 8일
.대관식: 1223년 8월 6일 랭스 대성당
.전임: 필리프 2세 / 후임: 루이 9세
필리프 2세와 에노의 이자벨의 맏아들이다.
필리프 2세는 1195년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1157 ~ 1199)의 조카인 브르타뉴의 엘레오느르 (1184 ~ 1241)와 아들의 결혼을 추진했는데 이 결혼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 (1165 ~ 1197)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전 결혼 협상의 연장으로 루이는 1200년 5월 23일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 (1155 ~ 1214)의 딸 블랑쉬와 결혼했는데 루이 8세가 죽은 뒤 블랑쉬는 섭정을 맡아 프랑스를 다스렸다.
1212년 생토메르와 에르를 손에 넣어, 왕의 세력 아래 있던 아르투아 백작령을 당시 강대한 세력을 갖고 있던 플랑드르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했고, 1214년 부빈 전투에서는 잉글랜드의 존 왕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
존 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잉글랜드 귀족들이 원조를 요청하고 대가로 잉글랜드 왕위를 그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자 1216년 잉글랜드로 원정을 갔다.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어 성 폴 대성당에서 즉위했고 6월에는 윈체스터까지 함락시켜 잉글랜드의 반을 통제하게 되었으나 그 해 10월 존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헨리가 즉위하면서 반란귀족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1217년 8월 해전에서 지면서 킹스턴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는데 프랑스가 잉글랜드에서 물러나는 대가로 잉글랜드 귀족들은 그에게 1만 마르크를 몰래 지불했다.
즉위한 뒤 1223년에는 유대인에게 빌린 것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1224년 푸아투를 손에 넣었고, 1226년 알비주아파 (프랑스 남부 알비 지방에서 12 ~ 13세기에 일어난 이단파)에 대항해 성전을 벌였는데 아비뇽에 있는 주요 요새를 장악해 승리를 거뒀으나 병에 걸려 파리로 돌아왔다.
카페 왕조 출신의 왕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 많은 왕자령을 하사했으며, 국왕재산 양도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자신의 재산관리를 강화했다.
그는 또한 충성 맹세는 왕 개인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왕권 자체에 대해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을 내세워 왕권강화를 이루었다.
그의 맏아들 루이 9세는 평화적으로 왕이 되었고 다른 아들들은 왕자령을 받았다.
○ 생애 및 활동
필리프 2세와 에노의 이사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모후의 지참금인 아르투아 백작령의 백작을 겸임했다.
1200년 카스티야 공주 블랑슈와 결혼했으며, 잉글랜드 왕국의 존 왕은 처숙부였다.
정치적으로 언제라도 며느리를 바꾸기 위한 부왕 필리프 2세의 반대 때문에 결혼식을 하고도 긴 시일이 지나도록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
필리프 2세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었고 모후 이사벨을 4살에 여읜 탓에 부친의 아낌없는 사랑은 훗날 장성하여 정복자의 자신감을 내비치는 정서적 기반이 되었으며, 부친을 각별히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필리프 2세는 루이를 유달리 아낀 탓에 그의 마상창시합 출전을 금했고 루이는 이를 착실히 따랐다.
그는 부친보다 가차없고 냉혹한 성품에 전쟁터에선 잔인무도했으며, 탐욕스러웠고 섬뜩하리만치 분노를 다스릴 줄 알았으며 속임수에 능하고 표리부동 했다고 한다.
아버지 필리프 2세를 대신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잦았고, 결정적으로 잉글랜드 정복전에서는 존 왕을 성공적으로 격파해, 부빈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
왕세자 시절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위한 정복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존 왕의 막장 통치에 질린 대립 제후들이 프랑스 왕 루이 8세에게 존을 대신해 잉글랜드를 다스려 달라 청원한 것에 따라 이뤄졌으며, 그의 왕비에게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200년 5월 프랑스 왕국의 필리프 2세와 잉글랜드 왕국의 존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블랑슈는 프랑스의 루이 8세와 결혼하게 된다.
블랑카 데 카스티야 (스: Blanca de Castilla, 프: Blanche de Castille, 1188년 3월 4일 ~ 1252년 11월 27일)는 스페인 중부 카스티야 지방의 팔렌시아 출신이며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의 딸이다.
카페 왕조 출신의 프랑스 왕인 루이 8세와 결혼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루이 8세는 1216년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나 성 바울 성당과 윈체스터 사원과 왕궁의 절반을 빼앗는 등 연승을 거뒀고, 삽시간에 잉글랜드 남부를 정복했다.
그러나 루이 8세의 본대가 후방의 도버 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성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파 귀족들이 링컨 전투에서 격파되고 바다에서도 패한데 이어, 존 왕의 급사로 어린 헨리가 즉위하자 잉글랜드 제후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그에게 철군을 요구해왔다.
어쩔 수 없이 1217년 램버스 조약을 맺고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했다.
다만, 그의 본대는 패한 적이 없는데, 사자왕이라는 칭호는 이때의 군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국왕에 즉위한 뒤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알비즈와 십자군을 통해 남부 프랑스의 광대한 왕령을 가지게 되었지만 파리로 돌아오던 도중에 이질에 걸려 1226년 11월 8일 병사하였다.
비록 요절했지만, 왕세자 시절부터 사망하기 직전까지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카페-앙주 왕가가 루이 8세의 대에서 갈라져 나왔다.
유복자 샤를이 앙주와 멘의 영주가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 왕위까지 손에 넣으면서 그의 자손은 유럽의 유력한 왕가가 된다.
1226년 루이 8세가 남부 프랑스를 복속시키기 위한 알비 십자군 원정 도중에 사망하면서 당시 12세였던 아들인 루이 9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9세는 즉위 당시에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루이 9세의 어머니였던 블랑슈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1235년 루이 9세는 성년이 되었지만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그늘에서 벗어나 실제 왕권을 장악한 것은 1241년이었다.
블랑카의 또 다른 아들인 샤를은 시칠리아왕 후에 나폴리왕이 되었다
○ 가계
왕비 카스티야의 블랑쉬 (1188~1252)
장녀 블랑쉬 (1205~1206)
차녀 아녜스 (1207)
장남 필리프 (1209~1218)
쌍둥이 알퐁스 (1213), 장 (1213)
4남 루이 9세 (1214~1270)
5남 로베르 (1216~1250)
6남 필리프 (1218~1220)
7남 장 (1219~1232)
8남 알퐁스 (1220~1271)
9남 필리프 (1222~1232)
3녀 이자벨 (1225~1269)
10남 샤를 (1226~1285)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