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11월 19일, 러시아의 혁명가 미하일 칼리닌 (Mikhail Kalinin, 1875 ~ 1946) 출생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 (Mikhail Kalinin, 러: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1875년 11월 19일 / 율리우스력 11월 7일 ~ 1946년 6월 3일)은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이다.
– 미하일 칼리닌 (Mikhail Kalinin)
.출생: 1875년 11월 19일, 러시아 Verkhnyaya Troitsa
.사망: 1946년 6월 3일, 러시아 모스크바
.묘지: 크렘린 벽 묘지
.국적: 러시아, 소련
.직업: 혁명가, 정치가
.정당: 소련 공산당
.부모: 이반 칼리닌, 마리야 칼리니나
.배우자: 에카테리나 칼리니나 (1906 ~ 1946년)
.자녀: 리디야 탈라노바, 율리야 칼리니나, 알렉산드르 칼리닌, 발레리안 칼리닌
블라디미르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혁명 당시 주요 세력과 함께 러시아 혁명에 이바지했다.
○ 생애 및 활동
1875년 11월 19일, 러시아 제국에서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지방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농장에서 잠깐 일했다.
188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철강 노동자, 집사 일을 했고 트빌리시에서 철도 노동자로 일할 때는 스탈린의 장인인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를 만난 적이 있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РС-ДРП)에 가입했다.
1906년에는 에스토니아 출신 유대인인 예카테리나 로베르크와 결혼했다.
1917년 4월, 칼리닌은 다른 많은 볼셰비키와 마찬가지로 멘셰비키와 협력하여 임시 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원을 주장했으며 그 해 여름 내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무장 봉기를 계속 반대했으며, 가을에는 페트로그라드 시의 두마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칼리닌은 11월 7일 볼셰비키 혁명과 그 이후 그가 관리했던 시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칼리닌은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위원회에 가입해 정권이 합법화시킨 당 일간지 프라브다가 조직되는 것을 도왔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명목상 국가원수 (國家元首)인 전연방 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을 거쳐,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역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사실 칼리닌 본인이 주석직에 오른 것은 러시아 소비에트에서 권위가 있는 지도자이자 국가원수 노릇을 하던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가 1919년 3월 급사한 후 황급히 대체할 수가 있는 공산당원 정치인을 찾는 과정에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칼리닌를 뽑는 간선제 주석선거에서 찬성표는 7표, 반대표가 4표, 기권표가 2표였다. 스베르들로프가 주석일 때 중앙집행위원회 (이때는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고 (권력의 중추인 ‘소비에트’의 정점이기 때문에) 레닌이 주장한 사회혁명당 당원들의 사형을 거부하고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사면령을 내리고 정당 활동을 허가할 정도였다.
1920년, 칼리닌은 러시아 대표단의 일환으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공산당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한 뒤 소련 내에서 극심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던 중 스탈린과 파벌 동맹을 맺었다. 또한 그 해에 제5차 세계대회에 레닌과 코민테른에 대한 보고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1919년부터 1925년까지 후보 정치국원이었으며, 1925년에 정치국원으로 승격하여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칼리닌은 1946년에 은퇴했고 같은 해 6월 3일 모스크바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칼리닌은 주요 국장으로 추대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원래 칼리닌도 노련한 공산당 정치가 스탈린의 동지 중 하나였으나 레닌 사후 스탈린이 기반을 다잡던 시기에 점점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이 너무 가혹하다고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칼리닌은 스탈린을 대놓고 적대시하지는 않았지만, 아직 정적들이 많았고 권력이 불안했던 시기의 이런 행동은 결코 용서되지 못했고, 아내가 잡혀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살려달라고 편지를 보내도, 아무 것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아내가 스탈린을 반대하는 사람이었던지라 권력이 있었어도 그녀를 보호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만무했다.
러시아의 도시 칼리닌그라드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 기타
러시아의 도시 칼리닌그라드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거의 유일한 농민 출신의 혁명가였으며 이로 인해 공산당 내부에서 유달리 총애를 받으며 활동했다.
표도르 칼리닌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볼셰비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 평가
니키타 흐루쇼프는 칼리닌에 대해 “칼리닌이 레닌 밑에서 어떤 실제적인 일을 수행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에서 그는 모든 법령 중 명목상의 서명자였지만 실제로는 정부 사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위원회의 일원이었지만, 위원회 일원들은 그의 의견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당황했다. 한 사람은 단순히 칼리닌이 불쌍하다고 느꼈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막강한 스탈린 치하에서 혁명가로서 상징적 국가원수의 일만 수행할 뿐 정계에 영향력이 거의 없었던 칼리닌을 정확히 평한 것이라 평가받는다.
○ 러시아의 도시 ‘칼리닌그라드’
칼리닌그라드 (러: Калининград)는 발트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의 월경지이다. 칼리닌그라드주 (북쪽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으로는 발트해에 접해 있다)의 주도이며, 발트해에 면한 항구 도시이다.
1256년에 건설된 이 도시는 튜튼기사단 국가,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으며, 동프로이센의 주도(州都)로서 쾨니히스베르크 (독: Königsberg)로 불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독일 북동부 변경의 중요 도시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북부 1/3 가량이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1946년에 소련의 정치인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인구는 43만 5천 명이다. 부동항으로 선박수리·기중기·차량·어류통조림 등의 제조, 펄프, 제지업 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