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편
김수영 (金洙暎, 1921 ~ 1968)의 시 모음
김수영 (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 김수영 (金洙暎)
.출생: 1921년 11월 27일,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관철정
.사망: 1968년 6월 16일 (4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서울적십자병원
.직업: 시인, 수필가, 번역문학가
.국적: 대한민국
.학력: 경성 선린고등상업학교 졸업,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 중퇴, 경성 연희전문학교 중퇴
.활동기간: 1944년 ~ 1968년
.장르: 시, 수필, 번역
.배우자: 김현경
.친지: 김수명 (누이동생), 차중경 (이종사촌 남동생), 차중용 (이종사촌 남동생), 차중락 (이종사촌 남동생), 차중광 (이종사촌 남동생)
.기념: 김수영 문학관
한국의 대표적 참여 시인으로 평가받는 김수영은 초기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쓰다가 4.19 혁명을 기점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압제에 맞서 적극적으로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강조하는 시를 썼다. 그는 이렇게 썼다. “4.19 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니까!” 김수영 시인은 이어령과의 논쟁을 했는데, “불온한 문학을 발표할 수 있는 사회가 정상사회”라고 비판했다.
평론가 김현은 그를 “1930년대 이후 서정주 · 박목월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재래적 서정의 틀과 김춘수 등에서 보이던 내면의식 추구의 경향에서 벗어나 시의 난삽성을 깊이 있게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공로자”라고 평가한다.
그의 사후 민음사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여 1981년 이후 매년 수여하고 있다.
비판적이고 철학적인 시를 통해 당대의 상황을 표현하였다. 자유주의를 노래하였다.
–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 「폭포」
– 푸른 하늘을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 왕궁의 음탕 대신에
5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가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본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고백하고 있다. 화자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땅 주인’, ‘구청 직원’, ‘동회 직원’과 같이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이발쟁이’, ‘야경꾼’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에게는 사소한 일로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대항하지 못하면서 사소한 것에만 흥분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함으로써 화자는 자기모멸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또한 절정 위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하고 반성하게 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권력에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폭로하며 진지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풀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 구름의 파수병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詩(시)와는 反逆(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山頂(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妻(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詩(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裸體(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詩人(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反逆(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구름의 파수병」
*김수영 (金洙暎, 1921 ~ 1968)
김수영 (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병약했으며, 선린고등상업학교 시절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시작품들을 외워 읽을 만큼 영어 성적이 우수했다.
이후 일본의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학병 징집을 피해 대학교 중퇴 후 만주의 길림성으로 이주했다가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또 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 수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한 채 중퇴했으며,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 (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한국 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반공포로라고 함).
김수영 시인은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957년 제1회 시인협회상을 받았다. 1959년 첫 단독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시기의 시들은 바로 살고자하는 의지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사이의 갈등과 슬픔의 극복이 중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후 번역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서울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음날 새벽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2013년 그가 생전에 거주했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김수영 시인을 기리고 그의 시문 및 시학의 업적을 기리는 김수영문학관을 설립하였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