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7년 12월 27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아내 사보이의 베르타 / 토리노의 베르타 (Bertha of Savoy, 1051 ~ 1087) 별세
사보이의 베르타 또는 토리노의 베르타 (Bertha of Savoy, 1051년 9월 21일 ~ 1087년 12월 27일)라고 불렸던 베르타는 사보이의 백작 오토와 그의 부인인 수사의 아델라이드의 딸로 태어났다. 수사의 아델라이드는 토리노의 후작부인으로 토리노와 아오스타등을 상속받은 상속녀였다. 아델라이드는 세번 결혼했는데 사보이 백작과의 결혼이 세 번째 결혼이었다.
하인리히 3세는 아들이자 후계자가 될 하인리히의 결혼을 살아있을대 정해놨다. 1055년 베르타는 황제의 아들인 하인리히와 약혼한다.이후 하인리히 4세가 즉위한후 그녀는 성년이 되어서 결혼할 날만 기다린다. 그리고 1066년 하인리히 4세와 베르타의 결혼식이 이루어진다.
열다섯살과 열네살의 신랑신부는 서로만났을때 다른 반응을 보인다. 베르타는 하인리히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베르타를 싫어한다. 하인리히는 베르타와의 정략결혼을 싫어했고 비록 예쁜 여성이었음에도 베르타를 탐탁치 않아했다. 아마도 이것은 하인리히가 자신의 마음대로 결혼할 수 없었던것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타나낸것이었던듯하다. 심지어 하인리히에 적대적인 연대기 저자는 하인리히가 아름다운 아내를 내버려두고 애인들을 여럿두고 예쁜 딸이나 아내를 가진 사람에게 강제로 딸이나 아내를 바치도록 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하지만 십대 중반이었던것이나 성직자들과의 다툼을 생각해보면 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크니다).
1069년 하인리히는 베르타와 이혼하길 원한다. 아내와 원만하게 지낼 수 없으며 실제 결혼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반대한다. 특히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성사시킬수 없었다. 교황의 반대이후 하인리히는 베르타와의 이혼을 포기한다. 그는 결혼을 인정했으며 후계자를 얻으려 했다. 곧 아이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베르타의 어머니인 아델라이드는 사위와 사위 가족들에 대해서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다.
1077년 하인리히는 일명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사태에 직면했고 추운 겨울날 카놋사 성앞에서 교황을 만나기 위해 3일간이나 떨며 성밖에서 기다렸다. 이때 베르타는 남편의 여행에 아들인 콘라트와 함께 동행했고 남편과 함께 3일간이나 성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타의 어머니인 아델라이드는 사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딸과 외손자를 위해서 교황과의 중재에 도움을 줬다.
교황은 하인리히의 군대가 두려워서 막강한 세력중 하나였던 카놋사성의 성주였던 투스카니의 마틸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마틸다는 교황을 보호해준다.
이때 교황은 하인리히가 카놋사 성의 문을 들어가는것을 금지했고 결국 하인리히는 카놋사 성문앞에서 추운 겨울 (1월이었음)에 맨발로 떨고 있었다고 한다.
하인리히 4세는 독일의 왕으로 인정받긴 했지만 교황의 대관 거부로 황제로 대관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이후 1084년 드디어 하인리히는 로마로 가서 정식 황제로 즉위한다. 이때 베르타는 남편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후로 대관했다.
하인리히 4세와 베르타 사이에서는 모두 다섯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그중 아들인 콘라트는 독일의 국왕이 되지만 황제가 아버지가 죽기전 사망했고 다른 아들인 하인리히는 황제가 된다 (하인리히 5세의 부인이 바로 잉글랜드의 모드로 그녀는 헨리1세의 딸이자 헨2세의 어머니였다). 딸인 아그네스는 여러번 결혼해서 많은 자녀들을 두는데 특히 아그네스의 손자인 프리드리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