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2월 1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조만식 (曺晩植, 1883 ~ 1950) 출생
조만식 (曺晩植, 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 조만식 (曺晩植)
.출생: 1883년 2월 1일, 조선 평안도 강서군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강서군)
.사망: 1950년 10월 18일 (67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총살형
.부모: 조경학 (曺景學), 김경건 (金敬虔, 본관은 경주.)
.형제자매: 조은식 (누이동생)
.배우자: 박씨 부인(사별), 이의식(사별), 전선애(삼혼)
.자녀: 조칠숭(아들), 조연명(아들), 조연창(아들), 조연흥(아들), 조연수(아들), 조선부(딸), 조선영(딸)
.친인척: 강의홍(둘째사위)
.학력: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
.경력: 조선민주당 총재
.정당: 조선민주당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임기: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의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 생애 및 활동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고당 (古堂), 본관은 창녕 (昌寧)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내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숭실중학 (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 [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 [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 (白南薰) · 김정식 (金貞植)과 함께 장로교·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 (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 (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 (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 (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 (心友) 오윤선 (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 (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 (宋鎭禹)· 김성수 (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 (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 (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 (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 (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 (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 (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 (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 (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 (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 (金三龍) · 이주하 (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 상훈과 추모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9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이 안장되었다.
서울 능동어린이대공원과 경기 파주의 오두산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저동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