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3년 2월 22일, 백년전쟁에 승리한 프랑스의 왕 ‘승리왕’ 샤를 7세 (Charles Ⅶ, 1403 ~ 1461) 출생
샤를 7세 (프: Charles Ⅶ, 1403년 2월 22일 ~ 1461년 7월 22일)는 프랑스의 왕 (재위: 1422 ~ 146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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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 7세 (Charles Ⅶ)
.별호: 승리왕 (le Victorieux)
.출생: 1403년 2월 22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461년 7월 22일 (57세), 프랑스 왕국 므엉쉬르예브르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가문: 발루아 가문
.부모: 샤를 6세, 바이에른의 이자보
.배우자: 마리 당주
.자녀: 샤를 드 프랑스, 루이 11세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프랑스왕
.재위: 1422년 10월 21일 ~ 1461년 7월 22일
.대관식: 1429년 8월 16일
.전임: 샤를 6세 / 후임: 루이 11세
.참전: 백년전쟁 (잉글랜드 / 프랑스)
*백년 전쟁
.잉글랜드의 주요인물: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
.프랑스의 주요인물: 필리프 6세, 장 2세, 샤를 5세, 잔 다르크, 샤를 7세 승리왕
.주요 전투: 크레시 전투 칼레 포위전,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를레앙 포위전, 슬로이스 해전
백년 전쟁을 다시 일으켜, 처음에는 잉글랜드 군에게 오를레앙에서 포위당하였으나, 포위망을 뚫고 나와 1422년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잉글랜드 군을 무찔러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전쟁을 끝냈다.
그는 귀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왕권을 확립하는 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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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5대 왕으로 샤를 6세와 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멸망 위기까지 몰리던 백년전쟁을 결국 승리로 종결시켰으며, 귀족들이 강세를 보이던 중세시대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중앙집권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승리왕’ (le Victorieux)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백성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과 귀족들간의 갈등은 상당했고, 자신의 목적과 이익 달성을 위해서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 즉위과정
영국과의 백년전쟁이 계속되던 당시 샤를은 오를레앙에 머무르며 잉글랜드군과 대치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정식 국왕이 아니었다.
백년전쟁 기간동안 특히 그가 치세했던 시대에는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시기로 쉽게 즉위식을 거행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게다가 다른 지방의 영주들 또한 잉글랜드와의 대치중으로 쉽게 구원군을 보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누구도 병력을 보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때 한 신하로부터 프랑스를 구할 성녀가 왔다고 전해듣는다. 그녀가 바로 잔 다르크다. 그러나 의심이 많았던 샤를은 정말로 성녀인지 시험하기 위해 하인 1명을 자신의 옷을 입게하고 자신은 그 하인의 옷을 입어 구석에 숨는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알현이 시작되자마자 왕의 복장을 한 하인을 쳐다도 보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와 파리로 돌아가 정식으로 왕으로 즉위하라는 계시를 성녀 마리아로부터 받았다는 말을 듣게된다.
그때부터 샤를은 잔 다르크가 조국을 구원해줄 성녀라는 말을 비로소 믿게 된다.
알현이 끝난 직후 샤를은 잔 다르크에게 명하여 지방에 있는 영주로부터 오를레앙을 구원해줄 군사를 이끌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뒤 자신은 오를레앙 사수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군은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오랜 싸움으로 인해 무기가 망가졌으며 활도 모두 떨어진 상태였다. 설상 가상으로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오를레앙이 포위되어 잉글랜드군에게 함락되어 포로가 될 위기해 처해 있었다.
그때 잔다르크가 각지방 영주들로부터 구원군을 받아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나타나 추격하는 잉글랜드 군사를 물리쳐 샤를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을 재탈환하고 프랑스군 사기가 하늘을 찌르자 그때서야 프랑스 왕으로 정식 즉위한다.
말하자면 그는 잔 다르크의 도움이 있었기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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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와의 갈등
왕위에 오른 샤를 7세는 곧바로 잔 다르크로 하여금 오를레앙 사수와 동시에 지금까지 잉글랜드군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다시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잔 다르크는 승승장구하여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와 프랑스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세가 자신에게 기울었다고 판단한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평화협정에 몰두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잔 다르크는 샤를 7세의 의견을 끝까지 반대하여 잉글랜드가 항복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샤를은 강경한 태도를 취한 그녀를 점점 걸리적 거리는 존재로 여겨지게 되고 심지어 잔 다르크가 자신이 지시를 내린 적도 없었음에도 적진을 공격하는 행동이 계속되어 협정에 찬물을 끼얹자 그녀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진다.
사실 그는 전쟁을 수차례 치르며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잔 다르크의 생사가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1430년 오를레앙이 잉글랜드군에게 함락된 것이다.
게다가 오를레앙을 지키던 잔 다르크도 포로가 되고 잉글랜드는 이를 이용하여 샤를 7세에게 몸값을 요구하였으나 지금까지 자신에게 많은 승리를 안겨준 잔 다르크를 매정하게도 몸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그녀를 매몰차게 버린다.
자신과의 생각과 입장이 전혀 반대인 강경입장을 취하고 있는 그녀가 잉글랜드군에 잡혀 포로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매몰차게 버렸던 것이다.
결국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에서 마녀라는 혐의를 받아 1431년 5월 화형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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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이후 샤를7세는 잔 다르크가 화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과거 그녀가 말했던 잉글랜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받아들였는지 영국과의 전투를 계속 속행하며 크레시 전투, 칼레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 승리하여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한편 잉글랜드군이 수세에 몰리고 영토 대다수가 회복이 되어 전세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자 그는 평화협정을 맺는데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마침내 1456년 잉글랜드와 평화협정을 맺고 백년전쟁을 종식시킨다.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샤를 7세를 ‘승리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 말년
전쟁이 끝난뒤 샤를 7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몇몇 귀족들이 전쟁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이를 진압하여 왕권강화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끝난뒤 5년 뒤인 1461년에 생을 마감한다.
오랜 전쟁과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인 나머지 몸이 쇠약해진 것이다.
– 기타
샤를 7세의 치세는 조선의 세종 ~ 세조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생전 영조처럼 선왕의 소생이 아니라는 루머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버지 샤를 6세의 초상화만 봐도 샤를 7세와 닮아서 (창백한 피부와 길쭉한 코) 어디까지나 반대파의 악선전일뿐이다.
프랑스 국왕 중 처음으로 공식적인 정부를 두었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었던 서양에서는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삼아 첩이나 후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왕이 왕비 이외에 다른 여성을 애인으로 두기는 했지만 원론적으로 그런 행위는 부정한 불륜이자 죄악으로 여겨져 터부시됐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라 해도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애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아녜스 소렐이란 여성을 애인으로 삼고 궁에 두어 보란 듯이 총애했으며, 소렐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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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위인전에는 잔 다르크를 얻어 위기에서 벗어나 그녀를 질투해 발목만 잡다가 화형되도록 둔 배은망덕한 왕으로 적혀있지만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잔 다르크에게만 의지하지도 않았다.
샤를 7세는 아주 유능한 정치가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하나의 프랑스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사실 잔 다르크의 경우도 필요성이 있을 때까지는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샤를은 딱히 잔 다르크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유능한 수많은 신하들을 기용했으므로 잔다르크를 질투하거나 차별했다고 할 순 없다. 잔 다르크와 방향성의 차이는 있었으나 어쨌든 샤를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이끌었고,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완승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 과정에 잔 다르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잔 다르크의 위업 역시 샤를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백년전쟁의 승리로 얻은 권위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이고 조세를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을 펴서 프랑스의 봉건시대를 사실상 끝내게 만들고 근대로 나아가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계산적인 행보로 부하들을 이용하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나중에는 매몰차게 버렸기에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끊이지 않아서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평가는 낮다.
외침으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으나 신하들의 분전으로 극복해냈고, 그 신하들을 견제했다는 점, 유능한 정치가지만 지독하게 의심이 많아 아무도 믿지 않으며 신하들을 이용했다는 점, 후계자인 왕세자와 관계가 좋지못해 항상 견제하며 갈등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선조와 자주 비교되는 군주다.
잔 다르크가 유명해서 샤를 7세는 그냥 무능한 왕, 배은망덕한 왕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인물들이 재평가되고 이것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시대에 들어서면서, 잔 다르크 역시 결점이나 실수를 했음이 알려지고, 동시의 샤를 7세의 업적이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실 이전부터 전문가들은 샤를 7세를 무능한 왕이 아니라 교활하고 날카로운 정치가, 위기를 겪고 패배할 뻔 했지만 운과 기회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써먹은 계산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서 일반인들에게도 퍼진 것. 그는 4대에 걸쳐서 선대 왕들이 해내고자 했지만 실패한 일을 자기 대에 이루어 프랑스를 강하게 만들었고, 로마시대 이후 프랑스 왕 최초로 상비군을 만들어 이를 굳히는 데 성공했으며, 왕권을 강화했다. 즉 샤를 7세는 유럽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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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