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성지 답사기 중에서 (5)
<시드니 인문학교실 제 2차 인문학여행팀> 여러분! 모두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홍길복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 부터 어디 여행을 하게 되면 그때 그때 마다 여행일기를 쓰는 것이 하나의 습관 처럼 되어 왔습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썻던 여행일기가 아마도 한 200일 분은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더해 가는지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여행일기를 쓸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16년전에 썻던 글 중 일부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2007년 1월 15일 부터 약 3주에 걸쳐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 <성지 답사팀>과 더불어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등 5개국을 방문했을 때 썻던 <여행 일기> 중 한 부분입니다. 저는 그 때, 여행 중에 썻던 일기를 당시 시드니에서 발행되던 주간지의 요청에 따라 주 1회 씩 59회에 걸쳐 1년이 넘게 연재했었습니다. 물론 그 일기는 전문성을 지닌 글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이 읽으시면 잘못된 것들도 적지 않게 지적해 내시리라 생각되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2023년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 준비하고 있는 <제 2차 인문학여행>의 참가자들과 함께 오래 전에 경험하고 생각했던 보잘 것 없는 이런 작은 여행 이야기 이지만 나누고 싶어서 우리가 방문하게 될 <이집트> 부분만을 추수려서 1주일에 한번 정도씩 몇번에 걸쳐 올려드릴려고 합니다. 이 글이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서로 더 가깝게 사귈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집트 (Egypt),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카이로 (Cairo)
우리말 성서에서는 <이집트>가 <애굽>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글 성경의 번역이 우리 보다 먼저 번역된 한자 성경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자로는 이집트를 <애급, 埃及>이라고 쓰며 발음은 그리스어 <에귑토스>에서 옮겨왔습니다.
이집트는 국토의 넓이가 약 100만 평방 킬로미터 조금 더 됩니다. 한반도의 약 4.5배 정도이며 남한의 10배 정도나 됩니다. 이스라엘에 비하면 20배도 더 되는 넓은 국토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넓은 땅의 90% 이상이 사하라를 포함한 사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구는 약 1억 정도인데 그 인구의 99%가 나일강 좌우 편과 하류의 삼각지 근처에 모여 있습니다. 북동쪽으로는 홍해와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있고, 남쪽으로는 수단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리비아와 사하라 사막이 펼쳐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지중해가 있어 중동과 유럽을 만나게 해 줍니다. 1인당 국민 소득은 약 1만 5천 달라 정도인데 빈부의 격차가 심하여 전체 국민의 약 90% 이상이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찬란한 문명과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동시에 가는 곳 마다 하면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풍요 가운데 빈곤>을 보여주는 극과 극이 만들어내는 혼란을 접하게 됩니다. 국민의 90% 정도는 이슬람 수니파이고 기독교와 기독교의 한 교파라고 할수 있는 콥틱 정교회도 거이 10%에 이릅니다.
이집트의 역사는 기원 전 5천년 경으로 올라갑니다. 수천년에 걸쳐 31왕조나 이어온 나라입니다. 그후 기원 전 8세기 부터는 앗시라아와 페르시야의 지배를 받았고, 이어서 알렉산더와 로마의 손 아래 넘겨지기도 했습니다. 길고 긴 역사와 복잡한 흐름을 상세히 섭렵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나는 그져 조금은 배워서 알고 있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관계된 부분만 몇개 추려 보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땅과 이집트 사이에는 높은 산이나 깊은 강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홍해가 자리하고는 있지만 그외 지형지물에는 별다른 장애물이 없어 비교적 쉽게 이동이 가능한 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시대부터 히브리 사람들은 기근이 들 때 마다 자주 이집트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음으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하려고 그리로 내려 갔더라> (창12:10) 우리는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간 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왕으로 하여금 사래를 왕궁으로 끌여드리게 했다가 그만 그것이 발각 되어 크게 망신을 당한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창12:10-20). 그 후 요셉 시대에 이르러서는 여러해에 걸쳐 계속된 흉년으로 인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갔다가, 자기들이 오래 전에 팔아먹었던 동생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야곱 가문이 모두 이집트로 가족이민을 떠난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역사는 흘러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이나 노예같은 삶을 살게 되었고, 기원 전 13세기경에는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을 한 후 마침내는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고 다윗 왕조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기고 많은 백성들이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 때 <바벨론 포로, Babylonian Deportation>로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는 바벨론만이 아니라 이집트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산 유대인들이 꾀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철학자 필로(Philo)의 글에는 한 백만명 쯤 되는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 이집트로 피난온 유대인들이 세운 것으로 추측되는 <벤 에즈라회당, Ben Ezra Synagogue>은 아직도 카이로에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역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분이라 하더라도 꼭 한번 둘러볼 필요가 있는 역사의 흔적입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집트로 이주해온 유대인 학자와 랍비들 중에서 70여명이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약 3백 킬로 쯤 떨어진 지중해의 바닷가 도시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에 모여 히브리어로 쓰여졌던 <성서>를 그리스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흔히 <70인역, Septuagint>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그리스어 히브리 성서>는 이집트 땅,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ios)가 이집트 지역을 분활 집권한 다음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 그는 이곳에 기원 전 3세기에 거대한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이는 일종의 <알렉산더대왕 기념 도서관>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도서관은 그 터만 남아 있지만 당시로써는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두루마리 (scroll)와 파피로스 (papyrus)로 된 책을 최대 40만권 까지 소장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도서관 입구에는 <이곳은 영혼의 안식처>라는 현판을 달아놓았습니다. 도서관은 단순히 <지혜의 보물 창고>를 지나 성소 (Temple)인 셈이었고 그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들과 관장은 <성직자, Priest> 라고 생각했다는 뜻이겠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먼저 기도부터 드려야한다. 왜냐하면 여기는 영혼의 안식처이니까!> 나는 지금도 도서관에 들어설 땐 이 귀절을 되새기면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듭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한 나일강 삼각주 지역을 <영혼이 깃들어 있는 신전>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집트로 흩어졌던 초기 유태인들의 삶과 역사의 흔적을 찿아보려면 인류가 남긴 최초의 도서관이 자리했던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꼭 방문해 보라고 권유를 받았는데 이번 우리 팀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면 헤롯의 학정을 피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가서…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러 하심이라> (마태2:14-14)
물론 이외에도 성서에는 이집트와 관계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주로 부정적인 시각들입니다. 이집트는 항상 악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세상나라로 그려지는가 하면, 반대로 이스라엘은 선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애굽이나 애굽의 말 (馬)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일러줍니다. 신약의 계시록에 이르면 이집트는 늘 바벨론이나 소돔과 같이 예수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 Anti–Christ>의 세력으로 묘사됩니다 <그 성은 영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또 애굽이라고도 하나니 이는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곳이라> (계11:8) 성서는 세상사를 인간의 역사와 신의 역사로 나누어서 보려고 합니다. 땅의 역사와 하늘의 역사, 보이는 역사와 보이지 않는 역사로 분리해서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역사, 땅의 역사, 보이는 역사란, 바로 이집트의 역사요, 로마의 역사요, 중국과 미국의 역사이며, 그것들은 반듯이 끝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찬란한 이집트의 문명도, 강력했던 로마의 권세도, 빛났던 인도와 중국의 역사도 다 지나갔고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6-17)
<아흘란 와싸흘란 필까하라, – 카이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이로는 이집트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 전체에서 제일 큰 도시입니다. <카이로, Cairo>란 호칭은 영어식 이름이고 아랍어로는 <알 까히라>로 발음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유명한 <카이로 선언, Cairo Declaration 1943>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며 여기에는 <카이로 선언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올드 카이로에는 유명한 기자의 피라미드를 비롯한 파타마왕조가 세운 옛날의 성들이 있고, 신카이로는 영국의 통치 시절 부터 만들어진 신흥 도시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도시 한복판으로는 나일강이 흐르고 있으며 인구는 약 2천 백만이 조금 넘습니다. 단일 도시로써는 세계에서 1, 2위를 다틉니다. 카이로는 이슬람의 성지는 아니지만, 이슬람의 썬터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카이로 시내에만도 약 250개의 모스크가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대학을 비롯하여 이슬람 박물관과 이슬람문화와 교육기관들이 이 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약 31도이고 10월의 평균 기온은 약 29도 정도입니다. 성서에는 카이로라는 도시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요셉 이야기 중에 나오는 <온, On>이라는 도시가 현대의 카이로를 가르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비네아라 하고 또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니라> (창 41:45) 지금의 카이로와 마찬가지로 <온>은 옛부터 태양신을 섬기는 도시요, 온의 제사장은 태양신전의 사제였습니다. 16세기 이후 아프리카 노예 이민자들 처럼, 요셉은 그 옛날 이집트로 팔려간 히브리 이민자로써 그 땅에 일찌기 동화된 이민자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이름을 이집트식으로 고쳤으며, 이집트 여인과 국제 결혼을 했으며, 그 땅에 뿌리를 내려 이집트 국민이 되었고, 마침내는 이집트의 총리대신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한편, 끝까지 그의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카이로 시내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도 나와 같은 이민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민자 요셉 Joseph, A Migrant !> 同化와 正體性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하면서 3천 5백년 전 이집트로 이민했던 선배 이민자 요셉을 그려보았습니다. (계속)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