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9년 5월 31일, 포르투갈왕 마누엘 1세 (Manuel I de Portugal, 1469 ~ 1521) 출생
마누엘 1세 드 포르투갈 (포: Manuel I de Portugal, 1469년 5월 31일 ~ 1521년 12월 13일)은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제5대 국왕이다.

– 마누엘 1세 (Manuel I)
.별호: 행운왕 (O Venturoso)
.출생: 1469년 5월 31일, 포르투갈 왕국 알코셰트
.사망: 1521년 12월 13일 (52세),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묘소: 제로니무스 수도원
.부모: 비세우 공작 페르난두,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형제: 주앙, 디오구, 레오노르, 이사벨
.배우자: 아스투리아스 여공 이사벨 (1497년 결혼 / 1498년 사망), 아라곤의 마리아 (1500년 결혼 / 1517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1518년 결혼)
.자녀: 미겔, 주앙 3세, 이자벨, 베아트리스, 루이스, 페르난두, 아폰수, 엔히크 1세, 두아르트, 카를루스, 마리아
.종교: 가톨릭
*포르투갈 왕국의 왕
.재위: 1495년 10월 25일 ~ 1521년 12월 13일
.대관식: 1495년 10월 27일
.전임: 주앙 2세 / 후임 주앙 3세
행운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성장기 때부터 즉위할 때까지 그리고 재위 중에도 일생토록 많은 행운이 따랐다.

○ 생애 및 활동
- 출생
1469년 5월 31일 포르투갈 왕국 알코셰트에서 제2대 비세우 공작 페르난두와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아들 주앙의 딸인 베아트리스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로 주앙, 디오구, 레오노르, 이사벨, 두아르트, 시마우, 카탈리나, 디니스가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중세 흑사병이 종종 발생해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기에, 왕족들은 인적이 드문 알코셰트로 거주지를 옮겨 자식들을 돌봤다.
1484년, 마누엘의 형이자 비세우 공작인 디오구는 주앙 2세가 세루발 해변으로 행차했을 때 등 뒤에서 단검으로 찌를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주앙 2세가 해변이 아닌 육지로 여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고, 기밀이 샐 것을 우려한 공모자 몇 명이 왕에게 밀고했다. 주앙 2세는 디오구를 궁전에 소환한 뒤 그를 단검으로 직접 찔러 죽였다. 그 후 비세우 공작의 어머니 베아트리스에게 2명의 사절을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알리게 했고, 디오구의 형제인 마누엘 1세에게도 서신을 보내 “그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찔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아폰수가 죽고 더 이상 합법적인 자녀가 없다면 마누엘이 국왕 직위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1491년, 주앙 2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폰수가 타구스 강을 따라 산책하던 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했다. 이후 주앙 2세는 사생아인 호르헤를 합법화하고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1493년 마누엘에게 왕궁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누엘은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주앙 2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확정지었다.
- 재위
1495년 10월 25일 주앙 2세가 사망하면서, 마누엘이 ‘마누엘 1세’로서 포르투갈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마누엘 1세는 주앙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을 이어갔다.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3차례 개최해 귀족, 성직자, 상인 계급으로부터 충성서약을 새롭게 받아냈다.
또한 20년간 작성된 모든 헌장을 수집한 뒤 새롭게 정한 양식에 따라 체계화한 을 반포하면서, 앞으로는 이 양식에 맞춰 헌장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1504년부터 1522년까지 법률을 편집 및 개정한 <마누엘 조례>를 제정 및 반포했다. 이중 1514년판 조례에 등장하는 6개의 판화에서, 그는 오른손에 “DEO IN CELO TIBI AVTEM IN MVNDO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땅에 계신 당신을 영원히 축복한다”)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힌 리본이 달린 왕실 홀을 들고 있다. 이 판화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된 왕이라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왕권 행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삽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공공 재무부를 개편하고 행정 구조를 체계적으로 조직했으며, 정국의 도시, 마을 및 주요 시설 관리를 담당한 위원회를 설치했고, 회계 및 식민지 관리에 필요한 행정 및 법률 집행에 관한 서류들 역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마누엘 1세는 주앙 1세 이래 역대 포르투갈 왕들이 추진한 해상 진출에도 힘썼다.
선왕 주앙 2세의 해양 개척 사업을 계승하여 인도 신항로 개척 (1498)과 브라질 발견 (1500)에 이어 유럽-인도를 잇는 해상무역에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였다.
15세기 초 엔히크 왕자 (1394~1460)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해 온 아프리카 서안, 대서양 탐사가 드디어 결실을 맺어 치세 중 포르투갈에 경제적인 풍요를 듬뿍 안겨다 주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을 꿈꾸며 친 (親)에스파냐 정책의 일환으로 정략결혼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선대왕들의 정책과 반대로 종교순혈주의에 입각하여 유대인과 무슬림의 강제개종과 추방을 추진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506년에 리스본에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치세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약 7,000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 재위 기간 중에 건축되며 꽃피운 르네상스 건축장식은 ‘마누엘 양식’이라 불린다.

- 주요 업적
1498년 – 신항로 개척 (by 바스코 다가마)
1500년 – 브라질 발견 (by 가브랄)
1501년 – 래브라도 발견 (by 가스파르와 미겔)
1505년 – 초대 인도 총독 임명 (알메이다)
1515년 – 인도양 무역의 주요 거점 점령, 고아 (1510), 말라카 (1511), 호르무즈 (1515)
- 사망
1521년 12월, 흑사병에 걸리자 리베이라궁 안에 격리되었다. 12월 4일부터 심한 열이 발생하였고 12월 13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죽은 다음날인 12월 14일, 그의 시신은 검은 벨벳으로 덮인 관에 담긴후 리스본의 벨렘 지구로 이송되었고, 추모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는 레스텔로 교회에 임시로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아라곤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와 함께 1551년에야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 가계
부 : 페르난두(두아르테 1세의 삼남)
모 : 베아트리스(두아르테 1세의 조카)
이모 : 이자벨(카스티야의 왕비, 후안 2세와 결혼)
사촌(겸 장모) : 이사벨 1세
누나 : 비제우의 레오노르
매형(겸 사촌) : 주앙 4세
.첫 번째 아내 : 아라곤의 이사벨(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장녀)
아들 : 미겔(1498~1500)
.두 번째 아내 : 아라곤의 마리아(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삼녀)
아들 : 주앙 3세(1502~1557) 포르투갈 국왕
딸 : 이사벨(1503~1539), 신성 로마 제국 카를 5세의 황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생모
딸 : 베아트리스(1504~1538) 사보이 공작 부인
아들 : 루이스(1506~1555) 베자 공작
아들 : 페르난두(1507~1534) 구아르다 공작
아들 : 아폰수(1509~1540) 추기경
딸 : 마리아(1511~1513)
아들 : 엔리케(1512~1580) 추기경
아들 : 두아르테(1515~1540)
아들 : 안토니오
.세 번째 아내 : 레오노르(펠리페 1세와 카스티야의 후아나의 딸, 이사벨 1세의 손녀)
카를로스(1520~1521)
마리아(1521~1577)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