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인문학모임, 정원일 목사의 발제로 “기독교, 그 2000년의 역사” 나눠
손호현 저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3장 나눔… 다음모임은 7월 4일 (화) 오전 10:30 [6월 6일 발제전문 포함]
매월 첫째 화요일 “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목회자인문학’ 모임”은 지난 6월 6일 (화) 오전 10시 30분,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에서 주교재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손호현 저) 3장 “기독교, 그 2000년의 역사 2”를 정원일 목사 (이스라엘연구소 소장)의 발제로 나눴다.
정원일 목사는 지난 5월 모임에 “기독교, 그 2000년의 역사 1”을 발제하며 “많은 내용을 짧은 시간에 소개하는데 무리가 있어 저자가 언급한 책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 그 중 두 세 가지의 소주제에 집중하여 나누고,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도 나누고자 합니다.”라며 예수의 역사성, 교회의 시작, 콘스탄티누스황제, 신학논쟁에 대해 나누고 이스라엘 고난의 역사를 개관했다.
이어 6월 6일 모임에서는 한국의 선교, 네비우스 선교방법, 한국의 기독교 큰 스승들에 대해 살핀 후 이스라엘 관련해 “역사 가운데 분리로 점철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토라적 (성경적) 세계관과 다른 입장의 견해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라며 탈무드의 정의, 성자와 현자, 회당의 등장, 성경의 회개 등을 언급하며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 의미의 재해석 등의 시간을 가졌다.
정원일 목사의 발제후 질의응답 시간을 갖으며 여러 질의를 나눈후 정원일 목사는 “본서 저자의 글에서도, 말미에 소개한 신학자들의 학문과 저술에서 문화의 담을 뛰어 넘는 과감한 도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정치적 투쟁과 이데올로기와 교파에 편중한 해석 등은 그런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탈무드에서 전하는 몇 편의 해석을 첨부 하여 미흡하나마 토라적 세계관을 소개해 보려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인간의 관계성과 한 생명의 소중함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살게 하는 정신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야하는 근본적인 하나님 나라 세계관을 요약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입장차이로 분리된 세계는 세상을 치유하는 토라의 세계관 안에서, 다양성을 수용하는 능력을 배양해 가는 삶의 훈련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역할을 넉넉히 감당하는 세대로 세워져 가야 하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나눴다.
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목회자인문학 다음 모임은 7월 4일 (화, 오전 10:30)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 (L1 / 239 Church St Parramatta NSW 2150)에서 모인다.
[목회자인문학모임 6월 6일자 발제전문]
기독교, 그 이천년의 역사
(손호현 저, 동연 출판, 2015년)
기독교 역사- 분리의 역사, 입장 차이, 그리고 21세기 하나님 나라 세계관
예수가 외친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내용 (p83)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 말씀이 전해진 그 시대적 상황을 고려 한 해석이고 또한 시대에 따라, 명제적 해석을 해야 한다.
이를 설명하는데 있어, 바실레이아는 왕국 보다는 왕권(정치적 권력)을 의미 한다고 했다. 무기를 들고 무장 봉기를 한 젤롯당과는 달리 예수는 손과 발이 묶인 민중들을 수탈하는 유대교의 종교체계에 도전장을 내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호되게 회개를 외친 것은 그들이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과 역할에 대한 촉구였다는 의미가 더 적절 할 것이다.
예수가 약자와 가나한 자들 편에 섰지만, 그것이 가난한 자들이 가난함으로 헐벗음으로, 병듦으로 의로워 진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 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이 장소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이어지는 상태의 연속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설명 한다. 저자는 이를 추구해 가기 위해서 ‘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다분히 투쟁적이고 반항적이며, 정치적 행동을 야기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 공평한 삶을 살게 되는 기능적인 목적을 달성 할 수는 있지만, 더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인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사랑을 누리고 또 궁극적으로 영원한 영적인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에 대해 더 중요한 방점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 예수님의 요한복음의 지침을 리마인드 한다.
(요 6: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궁극적으로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지혜와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유지 됐던 하나님이 “좋다”라고 표현했던 에덴의 모습이 궁극적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고, 하나님의 긍극적 안식처는 ‘인간의 영혼 가장 신비하고 은밀한 곳’이라고 ‘하나님과 인간의 안식의 친밀한 관계’를 언급했던 랍비 Vilna Gaon의 주해와도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승천하며 가장 간곡하게 부탁했던 유언과 같은 것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유대인 공동체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시작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행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였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사도행전은 2000년의 역사를 써 내려가게 되었다.
1. 교회의 시작과 예수님의 약속
성령-마가의 다락방, 유대인 중심으로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
성령의 사역- 베드로의 욥바 피장 시몬의 집에서의 환상-고넬료의 집-성령이 임하고, 부정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의 집에서 심지어 며칠을 유숙함 = 이것이 의미 하는 것은 유대인 랍비들은 결코 이방인의 집에 가서 코셔를 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접시도 이방인들이 쓰는 것에는 이미 부정한 돼지고기와 금하는 여러 짐승을 담은 그릇이고 음식들도 야채라 할지라도 우리가 쓰는 드레싱이나, 용기 같은 것도 그들의 코셔 방식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 부정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들의 음식을 먹고 며칠 동안 유숙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은 베드로가 욥바 피장 시몬의 집에서 본 환상과 이방인 (이태리인-로마인)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유대인에게 임하듯 임재한 사건을 목도한 것에 기인한다. 이를 사도행전 11,15장에서 설명 할 때 듣는 유대인들이 “정녕 생명얻는 회개가 이방인에게 임하였느냐” 하는 놀라움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과연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아서겠느냐며 이 일이 주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공동체에 토로했다. 이로써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 교회 신자들이 피와 제사지낸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은 것을 제외하고는 할레를 비롯한 율법을 지키지 않도록 결정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 선교가 시작 되었고 이는 많은 이방 교회가 세워지는 복음의 진전을 가져왔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 스스로의 지혜와 판단으로 유대인으로 부터 서방을 향하게 된 것으로 손호연 교수는 설명하고 있지만, 이 역시 바울 스스로의 선견지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성령 안에 계획된 하나님의 청사진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하겠다.
사도행전 맨 마지막 28장에 복음이 서진하게 된 이유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인 이사야 6:9-10의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형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무진 애를 썼고 유대인 공동체로 부터 사도권을 인정받으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다가 가려는 그의 형제를 향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로마서 9:3에서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고 자신의 마음을 호소했고 (롬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라고 그들의 소중함과 자신과 동족인 그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뜻은 유대인들에 가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가 이방으로 가야 하는 분명한 뜻을 담고 있고, 그것이 베드로의 환상과 고넬료 집안에서의 성령임재의 사건과 맞물린 것이어서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의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행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그렇게 사도행전 28장은 끝이 나고, 그로부터 2000년이 흘렀고 시대는 변화했다. 그동안 복음은 서방으로 전해지고 19세기 말 대한민국에도 서구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다.
2. 서방으로 향한 기독교
서방으로 향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러 기독교의 국교화를 이루고, 더욱 강성해 지며 기독교 제국의 위세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이방인 교회는 숫자가 늘고 부흥의 길을 가게 된다. 뿌리를 같이하는 경전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서로 경쟁적인 관계로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보에서 끊어지게 되었고, 유대인 대신 이방인이 선택된 백성으로, 교회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슬람은 AD 621년에 무함마드가 기독교를 대체하여 그 계보를 이어 가게 되었고, 더 이상 이슬람의 알라가 대체하여 통치하는 세계가 왔다고 주장했다.
유대교는 예수와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간주하지만 결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거나 알라가 그들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X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하나님)
대체신학의 중심 사상은 아쉽게도 우월주의와 승리주의와 제국주의의 겉옷을 입게 되었다. 소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교회는 인간의 욕망과 야망을 바탕으로 정복과 배타주의적인 기독교 역사를 써 오게 되었다. 용납과 사랑과 평화로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함께 만들어 가는 파트너들이 아니라 경쟁자이며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사회 속에서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은 텍스트가 갖고 있는 중심 사상으로 부터 더욱 융통성있는 해석이 다양한 문화 속에서, 통일성을 갖춘 수용성의 능력으로 폭넓게 발휘 되어야 하겠다.
3. 루터의 면죄부 논쟁과 반 유대주의
4. 신학 논쟁 VS 하나님나라 세계관
유대인의 세계관, 윤리 신학의 기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일시적으로 사용할 뿐 하나님께 소유권이 있다. 그래서, 힐렐은 육체를 단련하고 건강을 유지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고 가르쳤다.
필로는 육과 영을 구분하고 육을 이성적인 영에 반대되는 감정적이고 비 이성적인 음모자라고 까지 폄하했다. (폴 존슨. 264)
랍비가 이끄는 주류 유대교는 선과악의 힘을 구분하는 영적 이원론인 영지주의를 거부했다.
육체와 영은 하나 이기에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함께 처벌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중요한 차잇점 중의 하나로, The Saint와 The Sage의 추구 방향이 다르다.
유대교는 금식과 금욕을 통해 영을 강화 한다는 기독교 사상을 혐오했다.
유대교에서도 1세기까지는 고행하는 종파가 있었다-에세네, 열심당파와 같은 은둔, 고행과 결별
대속죄일 같은 공동체적인 금식을 공표하지만 개인적 금식을 죄악으로 간주했고 포도주를 금하는 것도 역시 죄로 취급했다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학대한다는 의미).
채식주의, 독신을 권장 하지 않는다. -토라가 금하는 것이 부족해서 거기에 첨가를 할 필요까지 없다는 입장.
이들의 주된 관점은 자제, 절제 이지 금욕은 아니다.
따라서, 지나친 금욕과 나아가 자살은 신성모독 행위에 속한다. 쓸데없이 자기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현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인간에게 다른 사람의 목숨을 희생 시키면서까지 자기목숨을 구할 권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의무도 없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율법을 어겨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절대로 배제해야 하는, 세 가지 행위가 있었다.
다수의 목숨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죄가 없는 자가 희생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랍비 아키바-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포기하는 행위
필로-살인은 심각한 죄, 신성모독
마이모니데스-“살인자는 아무리 피해자에게 보상해서 고소인이 방면한다해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살해 당한 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인류의 상징이므로 한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생명의 원리를 파괴 하는 것이고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인류를 구한 것과 같다. (미쉬나의 중요 원리)
남이 보지 않는다고 죄를 짓는 것은 이 땅의 권력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천벌 보다 두려워 한다는 반증이다.
상황화
현대의 Missio Dei는 초문화 상황화
예) 1910년도에 홍콩에 들어와 선교한 노르웨이의 선교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칼 라이 하트 이다. 그에는 ‘홍콩 복음화‘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는 별의별 비방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결국 열매를 맺었다. 그는 슬라이드에서 보는 것 처럼 홍콩 변두리의 타우풍산이라는 곳의 불교 사원을 사들여서 그곳을 개조해 타 종교인들과 학문을 나누고 배우는 장소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불교에 대해서 배우고 옷도 행동도 그들의 것을 진지하게 배웠다. 그래서 그가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진리였지만 그는 다른 모양으로 그들과 관계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노르웨이 선교국에서는 그를 파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학문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리에 대해 서로 공부했다. 그러자 불교 지도자가 진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구원의 역사가 속속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23년 동안 542명의 승려와 281명의 지식인들, 40명의 도교승이 타우풍산에서 수학했고 수련생 56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 8을 활용한 팔각정 모양의 타오퐁산 교회를 건축해 홍콩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나중에 루터신학교와 기독교연구소, 세계교회센터, 수양관 등을 잇따라 건립했다.
겉은 ‘절’ 이지만 그곳에서 나눈 ‘학문’은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친구가 되고 친분이 쌓여 진리를 접할 기회가 되면 말씀의 진리가 모든 영혼을 자유케 하는 복음 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방법이 다르다고 사람들로 부터는 외면당했지만 결국 그는 더 큰 열매를 맺게 되었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상황화는 수용자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상황화를 그 지역의 담당자의 영적 판단과 결정을 따라야하는 위임해야 하는 것을 Mission Dei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폴 히버트는 초문화화 신학을 이루어 간 대표적 모범을 예수님이라고 보았다. 하늘의 문화에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죄인들의 눈높이까지 낮아지신 것이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죄인을 죽기 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상황화는 사랑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수용자 문화의 옷을 입고 그들의 진정한 벗이 되고 그들 편에 설 때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란 도식을 얻게 된다. 칼 라이하트가 보여준 선교에는 그 시대가 수용하지 못했던 문화적 상황화라는 현장 선교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초월할 수 있었던 사랑의 결단이다.
탈무드의 인문학적 세계관
탈무드의 ‘정의’란?
1. 칸트와 벤담의 견해
계몽주의 시대에, 도덕의 원리에 대해서 임마누엘 칸트와 제레미 벤담의 논쟁은 잘 알려진 사례이다. 칸트가 ‘도덕은 의무’라고 본 반면, 벤담은 ‘결과’라고 간주했다. 칸트는 정의는 인과응보이고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잘못을 범한 사람이 벌을 받고 사회에 도덕적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벤담은 사회에 결과적으로 최선이 된다면 그 행동은 정의가 된다는 공리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런 면에서 정의는 과거이기 보다 미래적이고 결과적으로 범죄가 줄어든다면, 정의가 실현되었다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는 현실에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벤담은 결과적으로 전체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면 체벌은 면제될 수 있다고 본 반면, 칸트는 체벌이 가해 지지 않은 범법은 정의가 구현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랍비 요하이와 요세가 정의에 대해 경고적 상징성과 인과응보로 견해가 나뉜 것같은 맥락이다. 성경은 패역하고 완악한 인물로 아브라함의 첫 아들 이스마엘을 등장 시킨다.
2.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
성경에, 사라는 90의 늦은 나이에 이삭을 낳았다. 그때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10대의 장남 이스마엘이 있었다. 사라가 어느 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고 토라가 기록하는데, 랍비들은 이 ‘조롱’이란 단어를 ‘중대 범죄’로 보았고 결과적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뜨거운 광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자 아들을 숲가에 둔 하갈은 하늘을 향해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외쳤고 성경은 이들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천사가 나타나 ‘거대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축복을 약속하며, 샘터로부터 물을 얻고 소생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몬 요하이는 이런 하나님을 ‘현재에 의를 행하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맥락으로 탈무드는 ‘각 사람들은 그 때의 행동으로 판단을 받고, 하나님은 그 소년의 소리를 현재 있는 그 곳에서 듣는다 (로쉬하샤나 16b)’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성경의 첫 번째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이고, 성경이 말하듯 ‘후에 거친 나귀가 될 것’이라는 미래적 판단으로 아버지와 계모 (사라)로 부터 거절을 당했다. 미드라쉬는 이에 대해, 요세의 견해 보다는 시몬 요하이의 편을 들었다. 그것은 신의 정의는 미래의 범죄를 미리 예방 하려는데 중점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래에 어찌 될 것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신은 현재의 그들을 판단하실 뿐이다.
탈무드는 정의의 원리에는 ‘인간의 자유’가 그 저변에 있다고 가르친다. 청소년의 비행이 나중에 반드시 살인자로 자라갈 것이라는 확실성을 예견할 수 없듯이 인간에겐 자유가 있고, 패악하고 완악한 아들이라던, 이스마엘도 나중에 회개한 것을 탈무드 (Bava Batra 16b)는 상기시키고 있다. 탈무드의 궁극적인 원리는 미래를 예단한 체벌과 심판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법이 없으면 사회가 혼동에 빠지지만 담화가 없으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삶의 이야기가 부재하게 된다.
3. 탕자 이야기
이스마엘 이야기에 이어, 신약에 등장하는 탕자는 전형적인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일 것이다. 부자 아버지의 돈을 갖고 나가 탐닉한 삶으로 모두 탕진하고, 돼지나 먹는 주염열매를 먹으며 겨우 생존하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종으로라도 살아야 겠다고 돌아 왔다. 그 때 아버지는 먼발치서 기다리던 아들을 보고 맨발로 뛰어나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그를 맞았다.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화려한 옷을 입히며 아들의 지위를 서슴없이 인정해 주고 잔치를 베풀어 기쁨을 나눴다. 예수는 과거의 잘못에 체벌 보다는 돌아온 것 자체를 귀하게 (의로)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천국의 모습으로 가르쳤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R. 시몬 요하이는 “처음부터 패역하고 완악한 아들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체벌 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자체를 정의로 간주하는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용서가 정의의 더 근본적인 성경적 가치임을 발견하게 한다.
탈무드는 과거의 잘못에 얽매여 허덕이는 많은 못난 아들들에게, 오히려 미래를 향한 위로와 소망의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토라의 ‘정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자와 현자?
‘자기 부정’이라는 단어는 한편 ‘자아성찰’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면을 내포하지만, 탈무드는 나실인이 하나님이 창조 후 ‘좋다’고 말한 세상에 담겨진 즐거움에 대해 ‘자기 부정’으로 출발한 나실인의 삶의 시작이 이미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엘리에저는 “와인의 즐거움, 인생의 다른 기쁨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한 논쟁은 내면의 확신에 관한 것이고 ‘자기 부정’의 왜곡된 이해에 관한 것이라고 탈무드는 정의 한다. 모든 종교의 거룩과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즐거움과 유혹을 멀리하는 삶을 산다. 그들은 동굴이나, 수도원, 경건한 장소를 택해 살았다. 사해 사본이 나온 쿰란 공동체도 역시 이러한 운동의 한 예라 볼 수 있다.
1. 세상과 자기 부정
중세에 이런 ‘자기 부정’의 삶을 세상에 적용하며 살았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 지역인 이란과 하시딕 아쉬케나지로 불리는 북유럽의 사제들이었다.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돌아보면 적어도 이러한 경향이 비 유대인 환경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랍비들은 주장한다. 십자군 시대에 왕성했던 아쉬케나지는 ‘자기 부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쳔 사이에서 살았다. 또한 남방의 무슬림들도 수피즘 경향의 이슬람 신비주의를 좇았다. 그래서 아마도 ‘자기부정’의 삶의 방식의 영향은 아마도 외부로 부터 유대교로 들여온 것이라 진단한다.
그리스를 중심한 서방과 이란을 주축으로 하는 동방은 실제 세상을 부패하고 타락한 곳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양성론자들로 진정한 ‘신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아니다’라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실질적인 세상은 ‘저급한 신’이거나, ‘악’, 또는 부패한 존재의 작품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진정한 신은 세상에서는 발견될 수 없고 따라서 즐거움 보다는 세상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살아야한다고 믿었다. 탈무드는 창세기에서 신이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좋다’라고 한 세상 속에 반드시 거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분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그래서 세상의 즐거움의 가치를 폄하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성화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별하게도 중세의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이 두 가지 극간을 모두 수용하였다. 나실인은 선지자로 간주 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한 극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의미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가지로 이를 조명하는데 하나는 성자 (하세드)와 현자 (하캄)의 삶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2. 탈무드의 현자 마이모니데스의 ‘성자와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성자를 ‘극단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한다. 성자는 분명 좋은 행동이지만 지나친 기준의 엄격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거침없이 극단적인 금욕을 추구하고, 지나치게 겸손하다면 그는 마땅히 성자로 불린다.”고 말했다.
반면에 현자는 총체적으로 다른 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금쪽 방안, 즉 중간지점을 찾는 사람이다. 즉 겸양과 균형의 길이다. 그들은 한쪽으로는 비겁한 겁쟁이의 극단을 피하고 인색하지 않지만 낭비하지도 않는 대신 관대함의 중간을 택하는 방식이다. 현자들은 과한 것과 부족한 것의 양면의 위험성을 모두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 논어의 ‘과유불급’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는 ‘소탐 대실’ (작은 욕심으로 큰 손실을 초래한다) 이라는 동양 사상을 상기 시키는 말이다. 그들은 다투는듯한 삶의 압력과 대응에 대해 극단을 피하려 했다.
성자는 자신의 돈을 가난한 자를 위해서 모두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가까운 가족들은 선지자 자신의 자기 부정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만약 성자가 전장에서 전투를 거부 한다면? 그렇다면 성자의 나라와 국방은? 성자가 자신에게 죄를 범한 모든 사람을 다 용서 한다 할지라도 국가의 법의 규칙과 사회의 정의는? 그래서 마이모니데스는 성자는 극단적으로 개인의 덕에 중심된 사람이다 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성자개인이 그런 거룩한 사회를 혼자 건설할 수는 없다. 진정, 성자는 사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외롭고 분리된 개인의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탈무드는 이에 관해 마이모니데스 만큼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는 다른 어떤 철학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자의 길은 이와는 다르다. 그는 완전한 사회를 원한다면 현자를 찾아야한다고 강조한다. 현자는 극단주의자가 아니라 사회 속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멤버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그 공동체 안에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동료들이 있고, 지켜야할 국가와 함께 세워야할 사회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탈무드의 ‘현자’ 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덕을 추구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유별나게 보자면, ‘성자’의 삶은 ‘자기몰입’이라고도 불릴 수 있다. 탈무드의 정신은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이 세상에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땅으로 부터 도망하거나 도전적인 압박으로 부터 타인들을 방관하지 않고 창의적인 삶으로 균형을 이루어 가야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개별적으로는 나실인들이 ‘성자’이면서도 사회적 입장에서는 삶의 마지막에 속죄 죄물을 드려야 하는 ‘죄인’이기도 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자’처럼 살기를 갈망했지만,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없었다. 우리 주위에도 자신은 종교적으로 영적이고 경건하지만 가정과 사회에 대해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많은 사례들이 즐비하다. 공동체와 주변의 책임질 사람들을 돌보며 또한 경건을 추구하는 겸양과 균형이 바로 탈무드가 찾는 ‘현자’, 마이모니데스의 가르침이다.
회당의 등장
랍비들은 회당을 ‘아래로부터 오는 경각심’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요청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구약성경에서는 회당이라는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철학자이며 교수인 M Stern은 “회당이 세워진 것은 유대교에 있어 종교와 사회적 역사 안에 가장 획기적인 변환이며, 과거 어느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총체적인 새로운 신적 임재의 환경으로 등장했다”고 강조했다.
1. 회중 중심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유대 역사학자로 알려진 ‘살로 바론’같은 인물은 “회당은 예배의 장소적 강조로부터 예배자들의 모임과 회중의 회합으로 중심의 전환이 이루어 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탈무드 학자들은 신은 세상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고 그의 창조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예배할 수 있도록 망명지의 예루살렘으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된 역사와 시대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마음을 신에게로 향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신적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출애굽 때, 광야에서 임재한 ‘움직이는 장막’에 주목한다.
장막은 임시적인 구조물 이었지만 지속적인 영향력이 주어졌고, 반면에 성전은 영원할 것을 의도했지만 오히려 일시적인 것이 되었으며, 장막은 형이상학적인 영향력이 다신교적인 21세기 세상에 더욱 이해하기 쉬운 이동식 성전의 개념을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어는 곳에서든 마음에 순전함을 가진 자들에게 언제나 찾아 가고자 하는 분 이었음을 상기 시키는 말이다. 유한한 장소에 무한 존재가 임재한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처음부터 존재할 수 있다.
2. 신의 임재
하지만 탈무드의 현자들은 출애굽기 25장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라는 구절이 영어로는, “Then have them make a sanctuary for me, and I will dwell in them.”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원래 장소가 강조 되어야 했다면 in it, ‘그 곳’이라고 기록해야 하지만 토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해, 사람들 가운데 (in them) 임재할 것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결국, 신의 임재는 성전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건물이 아니라 건물을 지으려는 사람에게, 어느 곳에든 마음을 신에게로 향하려고 한다면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 하는 영원한 장소가 된다고 가르친다. 이 개념은 ‘아직도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려 한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비판이, 마음에 신을 모시려는 것을 수천년 동안 가르쳐온 탈무드의 가르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시작된 오해임을 발견하게 한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이, 지난 수 천년 동안 성전이 없이 광야를 떠돌던 나그네 같은 유대인들이 21세기까지 생존 할 수 있었던 지속성의 원천이 되었다.
탈무드는, 신은 인간에게 매일 영원으로부터 새로운 하루를 쏟아 낸다고 가르친다. 이 말은 비록 어제, 실패와 시행착오가 있었어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상황은 비록 절망과 파괴로 어지럽지만, 영원에 속한 신적 평화와,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능력은 장소에 상관없이 신의 도움을 찾고자 하는 순전한 마음에 언제든 임재 할 수 있음을 조언하고 있다. 다만 성급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잠시의 멈춤이 우리에게 필요할 뿐이다.
성경의 첫 번째 회개
성경의 첫 번째 회개의 사건은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스토리에서 시작한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인 유다는 비정한 형제들이 모두 막내 요셉을 광야의 구덩이에 쳐 넣어 죽이고자 할 때,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느냐 그가 우리 혈육인 동생인 만큼 팔아넘기자 (창세기 37:26-27)고 제안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요셉은 살아남아 미디언 상인들의 손에 이집트로 팔려가게 된다. 유다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 아들이 죽고 셋째가 형수를 거두어 아내가 되게 하고 생존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랐지만 거절당하자 다말이 창녀로 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고 그와 동침해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1. 유다의 잘못 인정
그 시대에 결혼한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면 죄로 간주해 불로 태워 죽게 되었을 때, 다말이 징표로 가지고 있던 시아버지의 인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내며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창세기 38:25-26)” 하고 임신한 며느리 다말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 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비로소 자신이 주범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바로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였고 며느리가 삶의 심각한 위험에 처했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은 비정한 시아버지였다. 그럼에도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의 명예를 해치지 않으며 진실을 나타내는 재량을 발휘하는 지혜가 있었다.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하고 며느리 다말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인 것을 인정하였다. 탈무드의 현자들은 이것이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첫 번째 회개의 사건이라고 명명한다.
2. 유다의 변화
이 사건은 유다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었다고 탈무드는 설명한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를 긍휼히 여기고, 인생의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십 수 년이 지난 후에 그가 형제들과 함께 기근을 피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갔을 때 극적으로 동생 요셉을 만나며, 변화의 내실을 성경에 소개하고 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창세기 44:33-34).”
이 이야기는 요셉이 형제들을 만나자,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막내 벤야민을 포로로 남겨두고 가나안으로 가서 아버지를 데려 오라고 했을 때 유다가 나서 요셉에게 했던 말이다. 그는 막내 벤야민 대신 자신이 종으로 잡혀 있겠다고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결코 충격이 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장면이다. 그는 요셉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팔아넘기는 것에 동조한 형제 였다. 하지만 랍비들은 이 사건이 유다가 그동안 얼마나 참회의 시간을 보냈는지 잘 나타내는 회개의 정점이라고 평가한다. 야곱에게 레헬 만큼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가 네 번째 아들 유다를 낳으며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라는 뜻과 ‘받아들임, 인정’이란 ‘고백’ 뜻의 이름을 지은 것은 그의 삶에 무관하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묘사한다.
3. 왕들의 아버지, 유다
탈무드는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 요셉이 ‘왕에 버금가는 두 번째 인물’이 되었다면, 유다는 모든 ‘왕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실제 유다의 혈통을 통해 왕들이 배출되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을 맺고, 메시야가 오고 인간의 죄를 사하는 성경의 중요한 구속사의 핵심이 되고 있다. 회개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참회는 시간을 걸쳐 튼실한 내실을 갖추게 되는 것이며, 죄로부터 자유케 하고, 새로운 인생과 위대한 구원의 약속으로 연결되는 고리인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인기있는 드라마는 재미를 위해 ‘죄와 심판’의 두려움을 극대화하는 주제로 삼았지만, 토라는 ‘회개’를 통해 우리에게 죄로부터 자유와 소망과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
손호연 교수가 서술한 ‘기독교, 그 이천년의 역사’ 챕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입장 차이를 시작으로 전개 되고 있다. 율법과 말씀에 익숙한 유대인들과 이방 문화의 상황 차이는 유대인의 사도들이 초대교회의 회의를 통해 율법을 제하는 과감한 결정을 도출하였다. 이는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보여진 성령의 지침과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 임재의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유대인들이 듣고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서쪽으로 복음의 길을 진행 하였고 21세기에 이르러 무려 20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저자가 간략히 요약한 기독교 2000년 역사는 처음부터 다분히 분리와 갈등의 흔적을 남기고, 사도들이 본래 추구하려던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는 거리감 있는 양상을 산출해 왔다고 보인다. 그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제국주의화 되면서 타 문화보다도 우월하고 승리 주의에 입각한 기독교 세계관이 저변에 있고 통전적인 성경적 세계관이 간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글에서도, 말미에 소개한 신학자들의 학문과 저술에서 문화의 담을 뛰어 넘는 과감한 도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 정치적 투쟁과 이데올로기와 교파에 편중한 해석 등은 그런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탈무드에서 전하는 몇 편의 해석을 첨부 하여 미흡하나마 토라적 세계관을 소개해 보려 하였다.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인간의 관계성과 한 생명의 소중함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살게 하는 정신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야하는 근본적인 하나님 나라 세계관을 요약하고 있다고 하겠다. 입장차이로 분리된 세계는 세상을 치유하는 토라의 세계관 안에서, 다양성을 수용하는 능력을 배양해 가는 삶의 훈련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역할을 넉넉히 감당하는 세대로 세워져 가야 하겠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발제: 정원일 목사 (목회자인문학, 이스라엘연구소장)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