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폴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 (Charlotte Corday)
폴 자크 에메 보드리 (Paul Jacques Aime Baudry) / 캔버스에 유채(Huile sur toile) / 203 x 154 cm / 1860년
마리 안 샤를로트 코르데 다르몽 (Marie-Anne Charlotte de Corday d’Armont, 1768년 7월 27일 ~ 1793년 7월 17일)는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가인 장폴 마라를 암살하였다. 프랑스 미술가인 폴 보드리와 자크루이 다비드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마라의 암살 이후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후세에 그녀의 미모로 인해 “암살 천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거리에는 그녀의 덧없음을 사랑한 남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1793년 7월 9일, 고모 집에서 파리로 단신 상경했다. 7월 13일, 인민을 위해 문호를 항상 열어둔 마라를 찾아가 그들에 대한 음모가 있다고 말하면서 곁에 다가왔다. 피부병을 앓고 있던 마라는 욕조에서 그것을 듣고 있었지만, 샤를로트가 숨겨 온 식칼에 심장을 찔려 절명한다.
마라의 죽음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많은 화가가 그의 죽음을 그렸고, 그 작품들에 다비드의 걸작의 영향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후세의 작품 중 폴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는 프랑스 제2제국 시대인 1860년에 그려졌다. 당시의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피에 굶주린 무서운 괴물이라는 마라의 ‘어두운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 작품에서도 샤를로트 코르데는 프랑스를 구하는 주인공으로 젊은 세대에 미덕을 보여주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 샤를로트 코르데아티스트 (Charlotte Corday)
.작가: 폴 자크 에메 보드리 (Paul Jacques Aime Baudry)
.제작연대: 1860년
.종류: 유화기법 캔버스에 유채 (Huile sur toile)
.크기: 203 x 154 cm
같은 사건을 그리지만 보드리는 다비드와 생각이 다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가 의도한 것은 ‘마라의 죽음’이 아니라 ‘마라를 살해한 샬로테’이다. 역사에 기인한 대로 마라의 최후는 욕조안이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작품의 구도에서 조금 비켜나 있다.
구도의 중심에는 샬로테가 있다.
마라의 가슴에 단도를 꽂은 샬로테는 어딘지 의연한 모습이다. 민중을 위해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는 듯한 강한 자신감마저 배어있다.
이러한 의연함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린 유디트의 그것과 무척 흡사하다.
작품에 작가의 주관이 뚜렷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게 다문 입술에는 약간의 두려움도 나타난다. 창틀을 붙잡은 왼손이 그것을 더욱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샬로테가 응시하고 있는 곳은 바로 마라의 방문이다. 그녀는 다가오는 혁명군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으며 곧이어 문이 열리고 자신은 체포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그녀는 혁명군에 의해 투옥되고 정확히 3일 후,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다.
– 혁명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여성
폴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는 <마라의 죽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샤를로트 코르데>에는 <마라의 죽음>에서 볼 수 없었던 암살자 ‘샤를로트 코르데’가 등장한다. 폴 보드리는 살해당한 마라의 모습보다 암살을 자행한 샤를로트 코르데에 집중한다. 작품 속에 등장한 그녀의 표정은 당당하기까지 하다. 그렇다. 자코뱅파의 주목받는 지도자였던 마라를 암살한 사람은 바로 지롱드파의 한 ‘여성’이었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여성은 혁명의 주체로 역사책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10월, 만여 명의 여성들은 베르사유를 향해 행진했다. 당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던 여성들은 그 누구보다 ‘빵값’에 민감했다. 흉년으로 인해 치솟은 빵값을 견디지 못한 여성들은 루이 16세로부터 정상적인 빵 공급을 약속받았다. ‘빵의 행진’에서 승리를 거둔 여성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루이 16세를 튈트리 궁에 가둬 혁명의 포로로 만들었다. 혁명사에 처음 등장한 여성의 모습이다.
성공적인 행진을 마친 여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791년 9월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한다. 그녀는 권리선언을 통해 여성의 발언권과 의사 표현의 권리를 주장했다. 여성들이 혁명에 끼치는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마침내 1793년 5월 여성들은 ‘혁명적 공화주의 여성 시민 협회’를 정식으로 발족하기에 이른다.
여성들은 군대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자신의 남편들이 전투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그들은 전투에 나서지 않는 남성들을 ‘겁쟁이’로 부르며 전투로 내몰았다. 또한 당시 여성들은 군대에 소속될 수 없었지만 일부 여성들은 남장을 하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21명의 여성들이 전투에 가담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가담한 여성들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성들의 갈수록 폭력적인 활동들은 남성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793년 10월 국민공회는 마침내 여성들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과격한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한 자코뱅파가 도리어 과격한 여성들에 의한 사회 질서의 붕괴를 우려한 것이다. 이후 프랑스 혁명은 여성들이 철저히 배제된 채 남성들에 의해 진행됐다.
혁명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들은 결국 남성들이 작성해나간 혁명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여성들이 혁명기에 이뤘던 성과들은 물거품이 됐고 이들은 다시금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는 평범한 여성들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퍼트린 프랑스 혁명은 그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게 있어서 반쪽자리 혁명이 아니었을까? 마치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 사라진 샤를로트 코르데처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