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7월 29일,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 (Umberto I, 1844 ~ 1900) 타계
움베르토 1세 (이: Umberto I, 1844년 3월 14일 ~ 1900년 7월 29일)는 이탈리아의 국왕이다.

– 움베르토 1세 (Umberto I)
.휘: 움베르토 라니에리 카를로 에마누엘레 조반니 마리아 페르디난도 에우제니오 디 사보이아 (Umberto Ranieri Carlo Emanuele Giovanni Maria Ferdinando Eugenio di Savoia)
.출생: 1844년 3월 14일,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사망: 1900년 7월 29일 (56세), 이탈리아 왕국 몬차
.매장지: 이탈리아 로마 판테온
.가문: 사보이아 가문
.부모: 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모) 아델라이트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배우자: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아
.자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형제자매: 아마데오 1세, 프린세스 마리아 클로틸드 오브 사보이 등
.종교: 로마 가톨릭
*이탈리아 국왕
.재위: 1878년 1월 9일 – 1900년 7월 29일
.전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후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움베르토 1세는 1844년에 샤르데냐 왕국의 피에몬테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움베르토는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 1882년에 오스트리아, 독일과 3국 동맹을 체결했다.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도 전쟁을 했으며, 1878년 1월 9일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왕국의 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켜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려했으나 1896년 아도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은 끝이났다.
또한 사회불안이 심해지자 1898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밀라노를 탄압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움베르토 1세는 1900년 7월 29일 체육대회 연설을 위해 이탈리아 몬차로 갔다가 무정부주의자 G. 브래시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 생애 및 활동
-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 침략
그 당시 스페인, 포르투갈 등 라틴계 국가들은 온갖 혁명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82년 에티오피아 제국으로부터 에리트리아 지역을, 1889년에는 영국이 지배하던,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침략하여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남부 지역을 얻게 된다.
-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패배와 암살
1895년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더 얻기 위해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아도와 전투에서 대패하고, 영국의 반격으로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일부도 잃게 된다.
결국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전하고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1900년 7월 29일, 움베르토 1세는 무정부주의자 가에타노 브레시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01년에 노역에 시달리다 죽었다.
그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당시 이탈리아에 사형 제도가 없었기 때문으로, 그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왕을 죽이고도 사형당하지 않은 인물이다.
왕위는 외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넘어갔다.

○ 기타
왕비는 사보이의 마르가레타로 피자 마르게리타의 어원이 된 왕비다.
결혼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두었으며 그 이외의 자녀는 없다.
- 왕과 닮은 사람
움베르토 1세가 이탈리아 몬차로 가서 한 레스토랑에 있을 때 움베르토는 너무나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도 이름이 ‘움베르토’였으며, 태어난 날과 결혼한 날도 똑같았고 움베르토 1세가 왕위에 오를 때 그 사람은 레스토랑을 개장했다.
이렇게 너무나도 똑같은 사람을 본 움베르토 1세는 그 사람에게 큰 직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움베르토 1세는 그 레스토랑에 가 보니 그와 똑같았던 움베르토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었다.
움베르토 1세는 그의 장례식장에 가다가 결국 G. 브래시에게 자신과 똑같았던 움베르토처럼 총에 맞아 죽었다는 야화도 전해진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