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1년 10월 31일, 프랑스의 작곡가 필리프 드 비트리 (Philippe de Vitry, 1291 ~ 1361) 출생
필리프 드 비트리 (Philippe de Vitry, 1291년 10월 31일 ~ 1361년 6월 9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며 이론가이다. 본래는 성직자로 1351년에는 모의 주교 (主敎)가 되었다. 약간의 모테토 작품과, 정량음악 및 대위법에 대한 이론적 저작이 있다. 후자를 수록한 이론서의 책명 ‘아르스 노바’에 유래되어 14세기의 다성음악 (多聲音樂)에서의 새 경향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노트르담 악파로부터 13세기까지를 아르스 안티쿠아라고 한다.
○ 생애 및 활동
필리프 드 비트리(Philippe de Vitry)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이며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 동안 매우 노련하고 혁신적(accomplished and innovative)이며 영향력 있는 작곡가(influential composer)로서, 1320~1322년 사이에 쓴 주요한 음악 이론에 대한 논문(treatise)인 《아르스 노바(Ars Nova)》의 저자이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h, 1304-1374)로부터 빛나는 찬사(glowing tribute)를 들은 바 있는 그는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greatest musician)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초기 생애(early life)와 관련해서는 세부적으로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이로 인해 일부의 학자들은 몇몇 중세의 자료(some medieval sources)에 근거하여 그가 샹파뉴 지역(Champagne region)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였으나, 최근의 연구에서 그는 아라(Arras) 인근의 비트랑 아르투아(Vitry-en- Artois) 출신이란 가능성도 제기되어 있다. 이를 다시 사료적 근거(Based on historical)에 의하여 살펴보면 그가 종종 ‘마이스트로’(Magister)로서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파리 대학교(University of Paris : 일명 소르본 대학(Université Paris-Sorbonne)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문 전문 학부 대학으로 개편된 오늘날의 파리4대학교)에서 수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찍이 부제(副祭; deacon)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파리의 왕실에서 봉사하였고, 국왕 샤를 4세(Charles IV de Clermont, 1294-1328)의 궁전 비서(secretary)로 일하다가 나중에 고문(advisor)이 되었다. 이후 후임 국왕 필리프 6세(Philippe VI de Beauvais, 1293-1350)와 노르망디 공작인 장 2세(Jean II, Duc de Normandie, 1319-1364) 부자(父子)를 섬겼으며, 그는 1346년 영국 군대를 상대로 외기용(Aiguillon)에서 포위 공격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외교관(diplomat)이자 군인(soldier)이기도 했다. 1346년부터 섭정을 거쳐 1350년 장(Jean)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부르봉 왕가(Bourbon)의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Ⅵ)에 대한 사절로서 아비뇽(Avignon)에 파견되었다. 1351년에는 교황으로부터 파리의 동쪽에 위치한 모의 주교(Bishop de Meaux)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당대의 시인이자 대문호(大文豪)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h)를 비롯해 저명한 수학자(famous mathematician)이며 철학자(philosopher)이고 음악 이론가(philosopher)였던 니콜 오렘(Nicole Oresme, c. 1320/1325-1382) 등과 같은 동시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친분을 가졌다. 그는 일생 동안 정치와 예술 분야를 포함하여 교회 조직의 주요한 요직을 맡았으며, 시인이자 작곡가였던 그는 당대의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h)는 그를 “프랑스 최고의 시인”(best poet in France)이라고 지칭하며 “가장 치열하게 진리를 탐구했던 우리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The keenest and most ardent seeker of truth, so great a philosopher of our age)라고 그의 학식과 성실성(Learning and integrity)을 열렬히 칭송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주로 음악가로서의 업적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그는 1361년 파리(Paris)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가 저술한 권위 있는 음악 이론서 《아르스 노바(Ars nova)》(1320경)는 14세기 전반기 프랑스 음악의 이론적 양상들을 다룬 뛰어난 논문이었다. 이 책에는 정량기보법의 새로운 이론들과 착색 음표(着色音標)의 다양한 사용 및 의미 등이 설명되어 있고, 새로운 기보체계에 음길이를 나타내는 음표 등을 도입하고 있다. 〈Ars nova notandi〉(Art of the new notation; 1322)란 이 논제는 전(全) 시대의 음악에 바쳐진 음악사상 가장 탁월한 논문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근대 학자들은 《아르스 노바(Ars nova)》의 전체 24장 중 정량 리듬(quantitative rhythm)과 정량 기보(quantitative notation)를 다룬 마지막 10장만이 그 자신이 쓴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저서와 이 논문의 존재가 초기에는 의문시되었지만 그의 음악 작품(musical works) 중 소수(handful)가 엄연히 보존되었고, 그 음악적 표기법(musical notation)이 특히 정량과 리듬적(mensural and rhythmic)으로 매우 혁신적이라는 것(show the innovations)에서 그가 이론으로 주창한 지 1세기 만에 모두 인정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아르스 노바(Ars nova)》에 소개되어 있는 모테트(motet)에 대한 그의 여러 언급들로 미루어 짐작할 때 대부분이 소실된 것으로 확인된다. 제르베 뒤 뷔스(Gervais du Bus, c. 1260-fl. 1300-1338)가 쓴 프랑스 풍자시 〈장미 이야기(Roman de Fauvel)〉 문학 양식(stylistically- attributed)에 기인한 그의 모테트(motet)에서 그려진 혁신은 특히 중요했으며, 이른바 아르스 수브틸리오르(Ars subtilior) 악파에 의해 그 정점을 이루는 미래의 수 세기 동안 자유롭고 복잡한 음악을 가능하게 했다. 현존하는 작품들은 20세기 독일의 음악 학자 레오 슈라데(Leo Schrade, 1903-1964)가 “14세기의 다성 음악(Polyphonic Music of the 14th Century)”(1권, 1956)으로 출판했고, “오스트리아의 음악 사상가(Denkmaler der Tonkunst in Oterreich)”에서도 그의 작품으로서 여러 곡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언급하자면 어떤 측면에서는 “현대”(modern)의 리듬 표기법 체계(system of rhythmic notation)가 이 《아르스 노바(Ars Nova)》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음악은 개별적으로 표기되지 않고 반복된 리듬 모드(rhythmic modes)의 오래된 착상(older idea)으로부터 “자유롭게 깨졌다”(broken free)고 말할 수 있다. 현대적인 음조(meters) 개념에 의거한 표기법의 선구자(notational predecessors) 또한 《아로스 노바(Ars Nova)》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13세기 말은 역사학적으로 혼미한 시대(Confused Age)의 시작으로서 이해된다. 또한 사회적인 대변혁(Social revolution)을 예고하면서 폭풍우처럼 휘몰아친 사회적 혼란(Social confusion)은, 곧 교회에서 일하는 음악가들로 하여금 성직자로서의 본분(Position as priest)과 전례의 직무(Place of precedent)로부터 등을 돌리고 세속 사회로 눈을 돌리게 했다. 이러한 14세기 실제 음악상의 변화(Music changes)는 곧 그의 《아르스 노바(Ars Nova)》라는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아르스 노바(Ars Nova)》라는 명칭은 13세기에는 없었던 새로운 예술의 개화이며 14세기 이전 시대의 호칭으로 쓰인다. 무엇보다도 이 논문은 ‘기구의 음악’(Music of instruments)에 중점을 둔 실용적 논문으로서의 중요한 대목은, 현대의 표현 방식으로 말할 때 2박자와 3박자를 동등하게 다루기로 규정(제안)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아이소리듬(Iso rhythm; 같은 리듬)이라는 새로운 구성 원리가 도입되어 있는데, 이 기법은 음렬, 강약, 리듬, 음색이라고 하는 요소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쓰는 현대의 (12)음렬기법에 의한 작곡법과 매우 유사하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프랑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14세기 음악 문서로 “장미 이야기(Roman de Fauvel)”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개 론도, 발라드와 같은 단성 음악이지만 다성 모테트 또한 34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 “장미 이야기(Roman de Fauvel)”에 나오는 3성부의 모테트 중 5편이 그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h)는 그를 일컬어 “프랑스의 단 한 명뿐인 진실한 시인”이라고 격찬했다. 그의 다른 모테트는 최소한 다섯 곡을 1350년경에 만들어진 이브리아 사본(Ivrea Codex)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료를 전거로 볼 때 그는 14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작곡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모테트 테노르들(Motte Tenors)은 동일한 리듬(Isorhythm)에 의한 부분들로 구성될 때가 많다. 이러한 리듬 모형은 여러 번 반복된 후 변형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이러한 모든 방법들이 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나타난다. 테노르(Tenors)는 더 길어지고 리듬은 더 복잡하며, 상성의 빠른 음들 밑에서 매우 느리고 무겁게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의 선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체 곡이 구축되는 토대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이소리듬(isorhythm) 원리의 도입이다. 실제로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의 23개 모테트는 모두가 아이소리듬 원리를 채택하고 있으며, 그 중 상당수가 이 원리를 테노르(Tenors)뿐만 아니라 상당한 자유를 부여하여 상성부들에게도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와 그의 계승자들로, 그 역시 몇 차례 사용하지만 주로 그의 계승자들인 영국의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85-1453)과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397-1474)가 대략 1430년까지 사용하였던 바 있는 엄밀한 범아이소리듬 모테트(panisorhythmic motet)이다. 이것은 모든 성부에 엄밀한 아이소리듬 원리를 적용한다. 14세기 초의 영국 모테트들(Mottes)은 대부분 보수적인 13세기 양식을 유지하면서도, 성부 교환(Stimmtausch)을 전제하는 작곡 방법으로 폭넓게 사용하는 론델루스(rondellus) 기법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그의 다음 세대로서 중세와 르네상스 과도기에 활동한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는 미사 통상문에서 키리에(Kirie, 자비송), 글로리아(Gloria, 대영광송), 크레도(Credo, 사도신경),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양), 이떼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 : 미사가 끝나다)를 뽑아 그의 유일한 다성부의 미사곡을 만들었다. 아마도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한 랭스 주교좌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eims)의 토요일 미사 ‘레이디 매스(Lady Mass)’에서 부르기 위한 작품으로 추측된다. 악보 사본에 조금씩 수정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완성 이후 꾸준히 연주되었던 것 같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의 이 미사 음악 작품은 현존하는 최초의 미사(곡)이자 동일 작곡가가 썼다고 확인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악장이 있다는 점에서 음악사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음악적으로 서로 연결된 다성부 악장의 개념을 이해했다. 그 이해의 결과물이 바로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와 그를 잇는 초기 르네상스 작곡가들의 작품이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가 활동하던 시기의 전형적인 음악 양식이었던 ‘아르스 노바(ars nova)’의 특징들을 몇 가지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 번째 악장과 마지막 세 악장은 길고 느린 음들과, 정확한 리듬 패턴 및 단선 선율의 반복은 동일 리듬의 모테트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더하여 가운데 악장은 더욱 직접적인 화음 방식을 사용하며 4성부가 함께 진행된다. 이 가운데 두 개의 성부가 단일 멜로디의 음을 바꾸는 ‘호케트(Hocket)’를 사용하여 서로 흩어지는 효과를 일으킨다. 게다가 가끔씩 구성되는 불협화음(dissonance)은 화성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어주며, 몇 개의 음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악구의 종지부를 향해 치닫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이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의 음악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작품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의 〈Machaut a la maniere〉과 같은 현대 음악의 소재로도 사용되어 왔다. 그는 이 시기의 음악을 “구 예술”(아르스 안티콰, Ars Antiqua)로 대변되는 중세 다성 음악이 정점에 도달했던 파리의 노트르담 악파(Notre Dame school)의 음악과 구별하여 “아르스 노바”(ars nova)로 불렀던 것이었다. 이 시기는 음악의 역할이 신을 위한 예배의 목적에서 음악 자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서서히 바뀌게 되었고, 보다 아름답게 들리기 위해 반음계적 기법(Chromatic technique)이 나타났다. 마침내 작곡가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명망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음악은 작곡가의 이름이 없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프란체스코 란디니(Francesco Landini, 1325-1397),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이름이 음악사에 비로소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샹송(chansons)과 모테트(motets)를 쓴 것으로 유명하지만 일부의 모테트(motets)만이 보존되었다. 그 각각의 작품은 독특한 구조적 착상(unique structural idea)을 사용하여 놀라울 정도의 개인적 특성(strikingly individual)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종종 이소리듬(isorhythm)의 개념을 개발하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소리듬의 라인(isorhythmic line)은 반복되는 모형(repeating patterns)에서의 리듬(rhythms)과 피치(pitches)로 구조화되지만 이들 모형(patterns)은 서로 겹치지 않은듯하면서도 겹쳐져 있다. 예컨대 30개의 연속적인 음표(consecutive notes)의 줄에는 5음 리듬(five-note rhythm)의 선율이 여섯 번 반복(six repetitions) 또는 6개의 음표 선율(six-note melody)이 5번 반복(five repetitions)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모테트(three-part motets) 중 5개가 〈장미 이야기(Roman de Fauvel)〉 주제에서 보존되었다. 이브레아 사본(Ivrea Codex)에는 추가로 9개의 모테트(motets)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그가 구성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여전히 논쟁이 있지만, 여기에서의 처음 16개 작품(모두가 모테트(motets)로 확인되었다)은 일반적으로 그에게 귀속되는 경향이 우세하다.
○ 작품
뚜렷한 사료적 근거에 의해 그에게 귀속된 작품들 (Works attributed to Vitry on strong historical evidence)은 다음과 같다.
▶ Aman novi / Heu Fortuna / Heu me, tristis est anima mea
▶ Cum statua / Hugo / Magister invidie
▶ Douce playsence / Garison / Neuma quinti toni
▶ Floret / Florens / Neuma
▶ Garrit gallus / In nova fert / Neuma
▶ Impudenter circuivi / Virtutibus / Contratenor / Tenor
▶ O canenda / Rex quem / Contratenor / Rex regum
▶ Petre clemens / Lugentium / Tenor
▶ Tribum / Quoniam secta / Merito hec patimur
▶ Tuba sacre fidei / In arboris / Virgo sum
▶ Vos quid admiramini / Gratissima / Contratenor / Gaude gloriosa
Note: 모테트(motet) 〈Phi millies〉 〈O creator〉 〈Iacet granum〉 〈Quam sufflabit〉 그리고 발라드(ballade) 〈De terre en grec Gaulle appellee〉는 다시 그에게 귀속되었지만 더 이상 음악을 복원할 수 없는 상태이다.
애매한 사료적 및 문체의 양식적인 근거 미약으로 그에게 귀속된 작품
(Works attributed to Vitry on a combination of weaker historical evidence and stylistic grounds)
▶ Colla iugo / Bona condit / Libera me Domine
▶ Firmissime / Adesto / Alleluya, Benedictus
▶ Flos ortus / Celsa cedrus / Tenor
▶ Orbis orbatus / Vos pastores / Fur non venit (less widely accepted)
▶ Quid scire proderit / Dantur officia (less widely accepted)
그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문체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론이 존재한다)
(Works attributed to Vitry on stylistic grounds alone : not widely accepted)
▶ Almifonis / Rosa / Tenor
▶ Amer / Durement / Dolor meus
▶ Apta caro / Flos / Alma redemptorisa mater
▶ In virtute / Decens carmen / Clamor meus / Contratenor
▶ O Philippe / O bone
▶ Per grama protho paret
▶ Scariotis / Jure
▶ Se cuers / Rex
▶ Se paour / Diex / Concupisco
▶ Servant regem / O Philippe / Rex regum
Philippe de Vitry – Motets and Chansons (Sequentia)
Philippe de Vitry – In Arboris
Philippe de Vitry – Vos qui admiramini
Philippe de Vitry – Ars Nova – The Orlando Consort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