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프랑스의 화가 폴 시냐크 (Paul Signac, 1863 ∼ 1935)의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 (Portrait of Felix Feneon)
폴 시냐크 / Oil on canvas / 73.5×92.5cm / 1890년
폴 시냐크 (Paul Signac)는 조르주 쇠라 (Georges Pierre Seurat)와 함께 점묘법을 개발한 19세기 프랑스의 화가로 〈우물가의 여인들〉로 잘 알려졌다. 시냐크는 원색의 작은 점을 과학적으로 이웃하게 찍어서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섞이도록 표현했다. 그는 이러한 점묘주의 기법으로 프랑스의 해변 풍경을 많이 그렸다.
시냐크는 건축가를 포기하고 회화를 택한 뒤 아르망 기요맹을 통해 인상주의의 채색기법을 받아들였다. 1884년 앙데팡당전에서 쇠라를 만나 인상주의의 색채분할법을 소개해주었고, 같이 점묘법을 발전시켜 신인상주의 화풍을 이루었다. 인상파가 다소 직관적으로 색을 분할한 데 반해, 이들은 훨씬 정밀하고 거의 수학적인 방식의 점묘법을 사용했다. 이후 시냐크는 수채화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그 원리를 적용하면서 앙리 마티스 등 야수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해안을 배로 여행하면서 마주치는 풍경들을 그렸다. 노년에는 프랑스의 항구 도시들의 풍경들을 일련의 수채화로 그리기도 했다.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혼합 시점과 평면 처리에 아주 능했고 비교적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자유롭고 따뜻한 구성과 색채를 구사했다. 점묘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 신인상파 화법 (점묘법 · 색채분할)은 시냐크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그는 1887년 파리에서 반 고흐, 1904년 마티스와 생 트로페에서 함께 작업하면서 그들이 신인상파적 회화를 구성하는 데에 절대적 영향을 준다. 또 앙데팡당전을 기획하여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미술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고 1908년부터 마지막 회까지 이 전시회의 회장을 지냈고 신인상파의 성경이라 불리는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파까지’ (1899)를 저술하며 신인상파 지도자로서 정열적인 생애를 보냈다. 72살에 세상을 떠났다.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 (Portrait of Felix Feneon, Oil on canvas. 73.5×92.5cm, 1890)은 뒷배경과 인물의 대조에서 작가의 치밀하고도 꼼꼼한 준비가 엿보이며 형태나 구도는 고전적인 회화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멋진 양복을 입은 한 신사 뒤쪽 미로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경이 인상적이다. 그림의 모델인 펠릭스 페네옹은 화가의 절친한 친구, 비평가·이론가로 신인상파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고 신인상파를 옹호했다. 신인상파는 순간의 느낌을 강조한 나머지 형태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극단적인 인상파에 반발해 ‘그림의 질서나 구도, 형태 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점묘법으로 작업한 이유는 팔레트에서 색의 혼합을 피하고 원색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녹색은 원색이 아닌데, 녹색을 표현하기 위해서 파란색. 노란색의 점을 번갈아 찍어서 멀리서 보면 녹색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팔레트에서 섞지 않은 물감의 색점을 캔버스 위에 찍어, 병치된 색채가 관람자의 눈에서 혼합되게 함으로써 순수하고 밝은 화면을 만든 신인상파는 쇠라에 의해 개발되었다. 이후 이것을 이론화하고 실천하여 후대에 알리고, 이 새로운 회화 언어를 수많은 화가들이 시험하게 한 사람은 시냐크 였다.
낭만주의 이후 말초적 감각과 감성의 흐름에 치중해있던 분위기가 잠시 조형이론의 중요성을 염두에 둔 이 신중한 기법에 눈길을 멈추었으며, 구도와 형태의 기하학적 특징은 20C 입체파와 오르피즘 (색채보다 구성을 중시한 입체파의 한 분파)을 비롯한 추상회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 펠릭스 페네옹( Félix Fénéon)
펠릭스 페네옹 (프: Félix Fénéon ,1861년 6월 22일 ~ 1944년 2월 29일)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프랑스 미술 평론가, 갤러리 감독, 작가, 무정부주의자이다.
그는 1886년에 신인상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가 이끄는 예술가 그룹을 이해하고 열렬히 홍보했다.
Fénéon Prize는 1949년 그의 아내 Fanny Goubaux에 의해 그의 미술품 판매 수익금으로 설립되었다.
1894년 Fénéon은 정치인들의 인기 있는 모임장소인 Foyot 레스토랑에 대한 폭탄 테러로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 의한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 암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 나란한 점으로 자유를 꿈꾸다
시냐크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무정부주의 사상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체제의 변화 방향성을 찾으려고 했다.
시냐크는 아나키즘 잡지에 그림을 실을 만큼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산업화로 인한 부의 양극화와 신흥 자본주의가 사회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품 <펠릭스 페네옹의 초상>에서 시냐크의 이러한 무정부주의 성향이 드러난다.
작품에서 그는 미술비평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페네옹의 초상을 점묘로 표현했다. 추상적인 패턴과 색채를 사용했고 색조와 형태, 구도를 기계적으로 분할해 안정성을 보여줬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