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11월 15일, 스코틀랜드의 발명가 윌리엄 머독 (William Murdoch, 1754 ~ 1839) 별세
윌리엄 머독 (William Murdoch, 1754년 8월 21일 ~ 1839년 11월 15일)은 영국의 발명가다.
증기 기관을 개량하여, 1784년 증기 기관차의 모형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증기총 등을 발명하였다.
1829년 석탄 가스 등을 조명용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 윌리엄 머독 (William Murdoch)
.출생: 1873년 2월 28일, 영국 달비티
.사망: 1912년 4월 15일, 대서양
.부모: 제인 머헤드, 사무엘 머독
.형제자매: 메리 맥마스터 머독, 지니 시발드, 마가렛 엘리자베스 머독, 아그네스 커밍 머독 등
.배우자: 플로렌스 머독 (1907 ~ 1912)
.직업: 발명가
.업적: 증기 기관 개량, 증기총 등 발명
산업 혁명 시대의 기계 기술자 머독은 증기 기관의 개량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더욱이 석탄 가스로 밝은 불꽃을 발생시키는 데 성공하여 가스등을 처음으로 실용화했다.
그의 발명은 새로운 조명법으로서 세계에 널리 퍼졌다.
○ 생애 및 활동
- 어린 시절
윌리엄 머독은 1754년에 스코틀랜드의 에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민이었는데, 물레방아를 만드는 목수 일 등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경작하는 밭 아래는 토탄 (이탄)이라 불리는 질이 나쁜 석탄이 가득 차 있었고, 그 곳에서는 석탄 가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린 머독은 땅에 구멍을 파고 구멍 위에 질주전자를 올려 놓고서, 그 입구에서 나오는 가스에 불을 붙였다. 불은 황색의 불꽃을 피우며 타올랐다.
불타는 가스의 발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이를테면 1739 년에 목사 존 클레이튼은 길가 하수구 물이 브랜디 (양주의 하나)처럼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온도는 달걀을 삶을 정도로 높았다. 그는 농민들을 설득하여 하수구 아래의 지면을 파 보았다. 마침내 지면에서 뿜어져 나온 가스에 불을 붙였더니 그것은 확 타올랐다. 그는 가스를 소의 방광에 넣고, 그것에 핀으로 구멍을 뚫어 점화하여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 와트의 공장에 취직
1777년에 머독은 와트와 영국의 볼턴 (Matthew Boulton, 1728 ~ 1809)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던 영국 버밍엄의 소호 공장에 취직하기를 희망했다. 볼턴, 와트 상회 공장에서는 증기 기관 특히 양수나 제분용 증기 기관을 만들고 있어서, 당시 젊은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입사 시험에는 중산모를 쓰라고 들은 머독은 그 충고에 따르기로 하였다.
시험 당일 와트는 외출하고 없어서 그는 볼턴의 사무실로 갔다. 그 무렵 회사에는 공석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볼턴은 멀리 스코틀랜드에서 찾아 온 머독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이것저것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부끄러워진 머독은 무의식 중에 손으로 중산모를 비틀기 시작했다. 그 중산모가 기묘함을 알아차린 볼턴은 “그 중산모는 모양이 달라졌군. 무엇으로 만들었나?” 라고 물었다. 머독은 부끄러워하면서 대패를 사용하여 나무로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이것으로 그가 타고난 기계공임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과 점수를 많이 받은 머독은 회사에 즉시 채용되었다.
- 증기 기관 연구
2년 후에 그는 버밍엄 남서쪽에 있는 구리와 주석 채굴로 알려진 콘월로 옮겼는데, 1799년에는 지배인이 되어 버밍엄으로 돌아왔다. 이 사이에 와트로부터 명령받은 일은 복동 (複動) 기관과, 상하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꾸는 증기 기관의 연구였다. 양자 모두 1781~1782년경에 일단의 성과를 올렸다.
전자는 증기와 연소 가스의 압력을 피스톤 양면에 교대로 받아 왕복 운동하는 기관으로, 이 연구에 의해 증기 기관의 출력이 그 때까지의 배가 되었다. 후자에는 태양, 행성형 관성 바퀴가 사용되었다. 기계 중심에 태양에 비교되는 관성 바퀴 (회전축에 부착된 큰 톱니바퀴. 플라이 휠), 그 주변에 이것과 맞물린 행성에 비교되는 관성 바퀴가 있다. 행성에 비교되는 관성 바퀴에는 축이 달려 있고, 이것이 상하로 운동하면 행성 관성 바퀴와 맞물린 태양 관성 바퀴가 돌아간다. 이렇게 하여 상하 운동이 회전 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 월야회 (lunar society) 활동
이 연구를 하고 있던 무렵 머독은 산소 발견으로 유명한 영국의 화학자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ey, 1733 ~ 1804), 진화론을 발표한 다윈 (Charles Robert Darwin, 1809 ~ 1882)의 할아버지이며 의사·박물학자인 다윈 (Erasmus Darwin, 1731 ~ 1802) 등이 속해 있던 버밍엄 과학자 그룹의 일원이 되어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원래 와트는 영국의 글래스고 대학에 출입하던 업자였는데, 같은 대학의 교수이며 화학자인 블랙 (Joseph Black, 1728 ~ 1799) 으로부터 기화열과 그 밖의 지식을 얻어 자신의 일에 응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일도 있어서 와트는 이러한 모임에도 나가고 있었다. 왕복편을 고려하여 월야 (月夜)에 개최되었기 때문에, 이 모임은 월야회 (lunar society)라고 불렸다.
이것보다 오래 전인 1645년에 보일의 법칙으로 유명한 영국의 화학자 보일 (RobertBoyle, 1627 ~ 1691) 등에 의해 이것과 유사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크롬웰 (OliverCromwell, 1599 ~ 1658)에 의한 청교도 혁명 시대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에 정치적 문제와는 관계 없이 오로지 학문 연구에 힘쓰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다. 물리학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뉴턴 (Isaac Newton 1642 ~ 1727)도 그 회원이었다. 1662년에 만들어진 이 모임은 보이지 않는 대학 (invisible college)이라 불렸으며,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왕립 협회의 전신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이 영국의 과학과 기술을 지탱해 온 것이다.
- 가스 조명
아직 콘월에 있던 1792년 무렵 머독은 자신의 방을 가스로 조명하고자 하여, 친구인 의사 포어즈와 함께 그 실험에 열중하였다. 그 때까지 조명용으로 사용되고 있던 기름 램프나 심지 달린 양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어린아이들도 흥미를 가지고 그들이 실험을 하고 있던 방의 문 밖에서, 당번을 정해 놓고 계속 방안을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머독이 방에서 나와 소년 중 1명에게 “미안하지만 가까운 가게에 가서 골무를 사다 주었으면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소년은 골무를 사가지고 와서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그들의 실험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안에 석탄을 채운 주전자를 불에 올리고 입구에서 나오는 가스를 태우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소년이 사온 골무를 받은 머독은 그것에 몇 개인가의 작은 구멍을 뚫고 주전자 입구에 갖다 댔다. 그리고 구멍에서 나오는 가스에 불을 붙였다. 불은 멈추지 않고, 또 기세 좋게 빛나면서 방을 밝혀 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석탄 가스에 압력을 주면 밝은 불꽃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험의 성공을 기뻐한 머독은 자신의 집 뒤뜰에 가스 공장을 만들고, 석탄을 쪄서 굽는 철제 가마를 만들고, 가마에서 나오는 석탄 가스를 파이프를 이용하여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파이프 끝에는 앞의 실험을 개량한 버너가 부착되었다. 버너 끝에서 점화된 불은 밝게 빛나며 방을 비추었다.
이 무렵 머독은 또 증기 기관을 차에 사용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쁜 가운데 마침 실마리를 발견하여 그를 위한 도면을 만들었다. 그것을 본 와트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변하지 않는 발명보다 지금의 일을 정확하게 하라고 주의를 주기도 하였다.
가스에 의한 조명 연구가 계속되던 단계에서 머독은 자신의 새로운 발견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으나 와트는 들어주지 않았다. 1799년에 지배인이 되어 버밍엄으로 돌아온 것을 기회로 다시 한 번 설득하여, 이번에는 드디어 허락을 받았다. 회사가 그의 가스 제조 장치의 제조·판매를 해 주도록 된 것이다.
더욱 멋진 기회가 찾아왔다. 1802년에 나폴레옹 통치하의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아미앵 조약이 체결되고, 잠시의 평화가 왔다. 이 아미앵 평화를 축하하여 전국에서 축제가 열렸다.
버밍엄의 소호 공장에서는 이 날을 축하하여 공장을 가스로 조명하기로 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공장 정면과 전시를 위한 방의 조명은 특히 멋져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버밍엄 사람들은 몇 번이나 찾아와 과학과 예술이 결합한 전시를 감상하였다. 1803년 이후는 소호 공장에 가스 조명이 상설되었다.
석탄 가스는 석탄의 건류 (공기를 차단하여 고체를 열분해하고, 기체를 얻는 조작)에 의해 얻어지고, 가스관을 통해 어디라도 운반할 수 있다. 불을 붙이는 것도 간단하고, 불꽃 조절도 쉽다. 이러한 이유에서 1807년에는 런던의 몇 군데 거리에 가스등이 설치되고, 산업 혁명 시대의 새로운 조명법이 되었다.
- 가스 회사
1812년에는 머독의 조수들에 의해 영국에서 최초의 가스 회사가 만들어지고, 가스공급을 시작하였다. 가스는 영국에서 프랑스, 독일로 퍼져 가고, 1816년에는 미국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 거리가 가스등으로 조명되었다.
1879년에 미국의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 ~ 1931)에 의해 전등이 발명되어 가스등의 세력은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마침 그 무렵 가스 맨틀 (가스등의 점화구에 씌워 열을 가하면 백색을 발하는 망 모양의 통)이 만들어져 다시 한 번 세력을 찾았다.
- 가스 조명에 관한 일화
가스등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머독 자신이 말하는 것에 의하면 1818년의 어느 날 밤, 그는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친구의 집까지 가야 했다. 그 날 밤 달이 뜨지 않아 밤길이 어두웠다. 이리저리 생각한 그는 석탄 가스를 채운 방광에 도자기로 만든 파이프 자루를 달고, 파이프 물부리를 마개로 막았다. 밤길에서 불이 필요해지자 그는 방광을 겨드랑이 아래에 끼우고, 파이프 물부리에서 마개를 떼어 낸 후 나온 가스에 불을 붙였다. 이것으로 무사히 친구의 집까지 갔다 올 수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가스 조명에 대하여 다양한 오해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운반하는 가스관 속에서 가스가 불이 붙는 것은 아닌가 하여 염려하였다. 템스 강 아래에 가스관을 지나게 하였더니 강물이 뜨거워져서 청어도 고래도 검게 탔다고 하는 소문이 번졌다. 의사당을 가스 조명하는 공사에 종사한 사람들은 건물이 타지 않도록 가스관을 될 수 있는 한 벽에서 멀리하였다.
과학자 중에도 가스 조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소 로듐 (원소 기호 Rh)과 팔라듐 (Pd)을 발견한 영국의 화학자 울러스턴 (William Hyde Wollaston, 1766 ~ 1828)은 그러한 것보다는 달 조각으로 런던을 조명한 쪽이 좋다고 하였으며, 염소와 불소를 발견한 영국의 화학자 데이비 (Humphrey Davy, 1778 ~ 1829)는 그들은 세인트 폴 성당의 둥근 지붕을 가스 탱크로 하고 싶지 않을까?라고 말하였다.
약 50년 사이에 정세는 일변하였다. 1873년에 런던을 방문한 페르시아 왕은 특별히 원하여 가스 공장을 견학하고, 여러 가지를 질문하였다. 마침내 왕은 가스 조명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 머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머리에 영감이 스쳐지나갔다.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에서는 머독은 빛의 신이다. 그 신이 스코틀랜드에 되살아나 윌리엄 머독이 되고, 가스 조명법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 이렇게 생각한 왕은 가신에게 명령하여 머독의 초상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서, 그것을 테헤란과 칼스 카쟈르에 있는 궁전에 장식하였다.
- 증기 기관차
1784년 무렵 머독은 증기로 도로를 달리는 기관차 모형을 만들었다. 모형의 길이 약 48cm, 높이 36cm이고, 바퀴 지름 1.9cm, 행정 (피스톤의 왕복 거리) 5cm였다. 그것이 모형으로 된 작은 짐마차를 끌고 실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한 후 실외 실험을 시작하였다. 집에서 교회에 이르는 비교적 평탄한 길을 골라 야간 실험을 하였다. 물론 레일은 없고 모형이 작아서 탈 수도 없었다. 모형 뒤를 걸어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엔진 밑으로 불을 붙여 그것을 표적으로 하였다. 모형 기관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마침내 앞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귀에 익은 목사님의 목소리였다. 잘 들어 보니 목사님은 악마, 악마라고 부르짖으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두운 밤 거리를 빛과 소리를 내면서 달려가는 기관차가 그에게는 악마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한 뒤 혼자 달려가고 있던 기관차를 뒤따라 가야 했다. 와트는 이러한 목적으로 증기 기관을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자신의 집의 임대차 계약서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증기 자동차를 집으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 라고 일부러 써 넣은 정도이다.
머독이 말을 듣지 않는 것에 화가 난 와트는 볼턴에게 그를 설득하라고 하였다. 볼턴은 머독을 설득하기 위해 콘월로 갔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기관차의 제조법 특허를 따기 위해 머독은 런던으로 가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마지못해서 그는 볼턴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전에 볼턴 앞에서 모형 기관차가 많은 짐을 싣고 달리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 주었다.
- 머독, 트레비식 그리고 스티븐슨
머독의 뜻은 영국의 트레비식 (Richard Trevithick, 1771 ~ 1833)에게 이어졌다. 그는 증기압을 높여 증기 기관의 열효율을 올리고, 그것을 소형으로 하는 데 성공하여 1804년에는 자신이 만든 증기 기관차를 레일 위를 달리게 하였다. 1814년에는 스티븐슨 (George Stephenson, 1781 ~ 1848)이 보다 실용적인 증기 기관차를 만들었다.
증기 기관만이 아니라 등불에도 석탄 가스가 사용된다는 것을 밝히고, 머독은 1839년에 버밍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석탄은 화학 공업의 원료로도 사용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 기타 : 워커의 성냥
1802년 무렵에는 아직 가스에 점화하기 위한 성냥이 없었다. 머독이 사용한 것은 부시와 부싯돌과 부싯깃 상자였다. 부시와 부싯돌을 쳐서 낸 불꽃으로 부싯깃 상자 속의 목면 등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으면 그것을 불어 붉은 불덩이로 만든다. 나무 조각 끝에 황을 칠한 것을 그 불덩이에 처 넣고 나무 조각을 그대로 태웠던 것이다.
1827년 어느 날, 나무 조각 끝에 황을 칠하는 실험을 하고 있던 영국의 화학자 워커 (John Walker; 1781? ~ 1859)가 잘못하여 나무 조각을 화로 속의 돌에 문질렀는데, 그 나무 조각에 불이 붙었다. 이렇게 하여 성냥의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