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11월 17일,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 1729 ~ 1796) 타계
예카테리나 2세 (러: Екатерина II Великая, 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 (1762 ~ 1796년)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 예카테리나 2세 (Yekaterina II)
.본명: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독: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개명: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출생: 1729년 5월 2일, 프로이센 왕국 포메른 슈테틴
.사망: 1796년 11월 1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배우자: 표트르 3세 (1745 ~ 1762)
.자녀: 파벨 1세, 안나 페트로브나, 알렉세이 보브린스키, 옐리자베타 그리고리예브나 템키나
.형제자매: Elisabeth Ulrike of Anhalt-Zerbst, Frederick Augustus, Prince of Anhalt-Zerbst 등
*전러시아의 여제
.재위: 1762년 7월 9일 ~ 1796년 11월 17일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대제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 예카테리나 벨리카야)라고도 불리며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 (女帝)이기도 하다.
차르 대신 차르의 여성형인 차리차, 차리나로 호칭하기도 한다.
측천무후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측천무후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제에 등극한 게 아니라 다른 쿠데타 주동자들에 의해 등극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경우이다.
나중에는 조금이나마 전제권력을 회복하긴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 초창기에는 귀족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표트르 1세 사후 니콜라이 1세 이전까지 거의 모든 러시아 황제들이 귀족 쿠데타에 의해 옹립되고 폐위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때 대제임은 틀림없다.
○ 생애 및 활동
1729년 5월 2일에 프로이센군 소장인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와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장녀로 프로이센 왕국의 슈테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독일계 공족으로 본래는 그냥 순수 독일인이었으며, 러시아로 시집가기 전의 본명도 안할트체르프스트의 조피 공녀 (Princess Sophie of Anhalt-Zerbst)였다.
세력이 미약한 귀족의 딸이었지만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과 본인의 총명함과 부지런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이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와 약혼했던 인연 덕분에 1744년, 러시아의 제위 계승권자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고 불리게 된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류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직접 정무를 결재받음으로써 황권을 강화시켰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했다.
본래 이름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독: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러: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다.
루터교 세례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러시아 정교 세례명은 예카테리나, 이후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1796년 11월 17일에 6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외아들 파벨 황태자와 사이가 정말 안 좋아서 파벨의 장남이자 자신의 장손자인 알렉산드르를 후계자로 키웠다고 한다.
또한 사망하기 전 손자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알렉산드르가 거절했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딴 데 있던 파벨이 어머니의 위중 소식을 듣고 전력질주로 달려와서 무사히 황제에 즉위한다.
사망하기 몇 달 전에 파벨의 장녀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를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종교 문제로 거절받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 평가와 비판
러시아인들과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러시아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그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하여 예카테리나를 오래도록 찬미하였고 이반 뇌왕 등과 함께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과 유럽계의 시각에서는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제정 러시아의 결함은 그녀의 치세에서 심화되었다.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황제가 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특권을 더욱 강화시켜 줄 필요가 있었고 귀족들은 납세와 군사적 의무로부터 거의 대부분 자유로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삐풀린 특권을 누렸다. 대신에 이러한 부담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지게 되었고, 더욱이 귀족들이 러시아의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하자 농민들은 본래의 땅을 잃었으며, 먹고살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귀족들의 농노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노들의 삶은 피말릴 정도로 처절하였으며, 특히 성격파탄의 귀족들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농노들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학대도 감수해야 했으며, 귀족들의 교활함은 농노들에게 일부러 싼 봉급을 시간제로 줌으로써 그들이 일주일 내내 노역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도박장에서 돈 대신에 거래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농노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하층민들의 처절한 삶은 그들로 하여금 분노가 누적되게 만들었고,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에는 빈번하게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당시에 러시아 외부에서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만큼 재정 러시아를 뒤흔든 내부적인 사건은 푸카초프의 반란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3세를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축출한 것에 의문을 품은 하층민들은 이윽고 계속되는 비참한 삶 속에서 “좋은 임페라토르”가 나타나길 기대했다.
푸카초프는 자신이 축출된 표트르 3세라고 말하며 러시아 각지의 농민들과 농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군사를 조직했으며, 이 중에는 타타르인을 포함하여 러시아 전체에 퍼져있던 다양한 소수민족들도 푸카초프를 지지하였다. 이 푸카초프이 반란은 무려 3년을 지속하였고, 결국은 푸카초프의 패배로 끝났다. 그는 사지가 오체분시되는 형벌을 받았으며 그와 함께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도 마찬가지로 처참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카테리나 2세와 귀족들이 더욱 더 민중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도록 만들었다.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