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5년 11월 19일, 프랑스의 화가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1594 ~ 1665) 별세
니콜라 푸생 (프: Nicolas Poussin, 1594년 6월 15일 ~ 1665년 11월 19일)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출생: 1594년 6월 15일, 프랑스 레 엉델리
.사망: 1665년 11월 19일, 이탈리아 로마
.예술 사조: 고전주의, 바로크
.부모: 장 푸생, Marie de Laisement
.배우자: Anne-Marie Dughet (1630 ~ 1664년)
.제자: 가스파르 뒤게, 샤를 르브룅, Pierre Le Tellier, Pietro Santi Bartoli 등
.작품: The Four Seasons, The Seven Sacraments, The Seven Sacraments (II), 목자들의 경배 :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 (1637경) 등
그는 로마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고전주의적인 주제들을 많이 그렸다.
노르망디의 레장들리 (Les Andelys) 출생이며, 라파엘로의 작품에 감화되어, 1624년에 로마로 가서 당시의 유행 작풍이었던 카라치파의 작품을 배우고 고전적 교양을 쌓았다.
1628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유명해져 1639년에 고국 프랑스의 루이 13세로부터 수석 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 회화의 시조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루살렘의 파괴〉, 〈바쿠스 제〉, 〈아르카디아의 목자〉등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1594년경, 파리 근처 빌레르 ~ 1665년 11월 19일, 로마)은 군인 출신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루이 13세의 궁정화가로 지낸 2년을 제외하고 평생 동안 로마에 살았으며, 로마에서 만난 고대 유물 수집가 카시아노 달 포초는 푸생의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푸생은 달 포초를 통해 접한 고대 로마 문명의 유물을 통해 철저하게 로마풍 미술 양식을 발전시켰고 이후 푸생의 화풍과 미학은 자크 루이 다비드와 외젠 들라크루아, 폴 세잔 등 여러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바로크 시기에 회화 분야에서 고전주의를 이끌었다.
2년 동안 프랑스에서 루이 13세의 궁정 화가로 보낸 기간을 제외하고는 전생애를 로마에서 보냈다.
특히 〈목자들의 경배 :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 (1637경)에서의 화풍과 미학은 자크 루이 다비드와 외젠 들라크루아, 폴 세잔 등을 비롯한 프랑스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어린시절과 초기 여행
푸생은 센 강 근처의 작은 읍 레장들리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군인이었지만, 가난한 농부로서 빠듯하게 생계를 꾸려나갔다.
푸생은 레장들리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그는 16세 때까지 어떤 직업이나 기술조차도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화가인 캥탱 바랭 (1570 ~ 1634)이 1612년 르그랑장들리 교회에 여러 점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 마을을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미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그후 푸생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레장들리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처음에는 루앙으로 갔다가 그뒤 파리로 가서 적당한 선생을 찾았다.
그는 가난하고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여러 2류 화가들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들은 네덜란드 전통을 이어받은 마니에리스모 화가나 초상화가들이었다.
푸생은 다소 성공을 거두어, 푸아투 주 출신의 한 젊은 귀족으로부터 그의 대저택에 그림을 그려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 귀족의 어머니는 푸생을 평범한 하인처럼 부리려 했으며, 그래서 이 젊은 미술가는 몰래 그 저택을 떠나 파리로 돌아갔다.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푸생은 한푼도 없이 도보로 여행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는 파리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고향에 도착할 무렵에는 병들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1년 뒤 건강을 회복한 푸생은 공부를 계속하고 아울러 또다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그는 예전에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시종을 만났는데, 아마추어 미술가였던 그가 보여준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들을 통해 푸생은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전기작가인 파세리에 따르면, 이 판화들은 그에게 ‘그가 지금까지 갈망해온 빛’을 던져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유럽 미술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 가고 싶어했고, 3차례의 시도 끝에 결국 교황시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로마에 가려는 첫번째 시도는 피렌체에서 뜻밖의 재해를 만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2번째 시도는 파리에서 빚을 갚지 않고 떠나 리옹에서 경찰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마를 향한 마지막 시도는 마리 드 메디시스를 섬기는 이탈리아의 궁정시인인 기사 출신의 잠바티스타 마리노의 도움으로 성공했다.
당시 병약한 노인이었던 마리노는 젊은 푸생을 좋아하여 그에게 고대 로마의 시인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형담 : Metamorphoses〉에 삽화로 넣을 일련의 신화적인 소묘들을 주문했다.
마리노는 그당시의 시와 그림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이론적 기반에 관해 푸생과 토론했으며, 푸생이 로마에 갈 수 있도록 당시의 교황인 우르바누스 8세의 조카인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에게 그를 추천했다.
마리노는 또한 자신이 직접 로마에 갔을 때 (1623) 개인적으로 로마의 미술 전문가들에게 푸생을 소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에 걸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푸생이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폴리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푸생은 자신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리하여 다시 심한 궁핍을 겪었다.
- 첫 번째 로마 시절
푸생은 로마에 있었던 1624 ~ 40년에 로마의 주요인물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마 그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비서인 카시아노 달 포초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는 푸생의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포초는 고대 유물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였다.
푸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고전미술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대부분 포초가 수집한 고대 유물을 통해 배운 것이었다고 한다.
푸생의 후원자가 된 포초를 통하여 이 프랑스의 화가는 고대 로마 문명의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 카시아노 달 포초 (Cassiano dal Pozzo)
조국으로부터 자진해서 망명한 푸생은 프랑스 문화를 이유 없이 혐오했으며, 그리하여 당시 로마나 프랑스에 살고 있었던 다른 프랑스 미술가들의 화풍과는 두드러진, 대조되는 철저한 로마풍의 미술 양식을 발전시켰다.
푸생은 독신의 방랑생활을 계속했으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로마에서 머무르는 동안 자주 이사했다.
1620년대말 그는 심한 병 (전기작가 파세리에 따르면 매독이라고 함)에 걸려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그는 마침내 프랑스 출신의 한 과자 장수와 그의 이탈리아인 아내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는 1630년 건강을 회복한 뒤 감사하는 마음에 억지로 또는 단지 편의 때문에 그보다 18세나 어린 그들의 딸인 안 마리 뒤게와 결혼했다.
안 마리와 살면서 그는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작은 집에서 소박하고 조용하게, 은둔자적인 소시민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안 마리가 죽을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며, 그녀의 죽음에 그는 몹시 슬퍼했다.
그의 미술이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그의 명성이 높아져 로마에서 뛰어난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프랑스계 모임에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술 서클에도 잘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미술적 재능에 대한 두려움이나 회의 때문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상당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다른 미술가들은 당대의 일반적인 경향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 로마 바로크 미술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랐지만, 푸생은 그의 믿음대로 고대의 정신을 복원한 고상하고 위대한 라파엘로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이전의 로마 건축과 도덕적 주제의 라틴 서적들에 영향을 받아 당대의 양식을 좀더 높은 수준에서 극복하려고 했다.
- 루이 13세의 궁정화가 시절
1638~39년 그가 로마에서 이룩한 업적들은 프랑스 궁정의 관심을 끌었다.
루이 13세의 강력한 재상인 리슐리외 추기경은 푸생을 설득하여 고국으로 데려와서 그가 설립하려고 한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가입시키려고 했다.
공식적인 초청과 왕이 직접 쓴 개인적인 편지 등 오랫동안 사전의 편지 왕래가 있었지만, 푸생은 그 요청에 따를 의도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이나 자신의 작품이 프랑스 궁정의 분위기에 맞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년 6개월 동안 온갖 핑계를 대면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리슐리외와 루이 13세, 협상을 하기 위해 로마에 파견된 귀족 출신의 미술품 전문가이자 수집가인 프레아르 드 샹브레의 계속적인 강압에 마침내 굴복했다.
1640년 10월 28일 푸생은 여러 명의 조수들과 함께 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아내를 로마에 남겨두었는데, 이것은 그가 장차 ‘궁정화가’로 임명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푸생은 커다란 명예를 얻었지만 자신이 거만하게 대한 프랑스 미술가들뿐만 아니라 국왕의 대신들과도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익숙하지도 않고 자신이 진정한 적임자라고 생각되지도 않는 종류의 작품들 (제단화, 책 표지, 태피스트리나 루브르 궁전의 대 [大]회랑 장식 디자인 등)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가 만든 작품은 그가 기대한 만큼의 칭찬을 받지 못했으며, 그결과 그는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처럼 의기양양한 것이 아닌 매우 낙담한 심정으로 혼자 평범한 역마차를 타고 1642년 9월 파리를 떠났다.
불행히도 그는 17세기 후반에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그의 개성적인 양식을 극찬한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 두 번째 로마 시절
2번째 로마 시절에 푸생의 개인적인 태도와 행동은 바뀌었다.
그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기를 바랐는지는 2점의 자화상 (1649년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 박물관, 1650년 루브르 박물관)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단호한 태도를 지닌 고상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핀초 정원에서 산책하는 동안 그를 숭배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미술과 인생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듣고는 했는데, 그의 생각은 점점 일종의 이교적인 철학으로 발전했다.
그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화가 겸 철학자’의 태도를 취한 것은 실제로 생애 중 오직 이 시기뿐이었다.
창조적 활동의 이 마지막 시기에 푸생은 성서의 주제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신화의 주제들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대체로 인간 존재에 관해 다소 비관적이었던 푸생은 로마 생활에서의 사건들과 고국의 정치적 혼란들은 단지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건강이 나빠질수록 그의 정신적·미술적 재능은 더욱 고취되었다.
1660년 이후 그는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렸으며 그의 작업에도 지장을 주었다, 1665년초 결국 붓을 던지고, 그해 가을에 죽었다.
시신은 그가 다니던 로마의 교구교회인 산로렌초인루치나 교회에 묻혔다.
○ 주요 작품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The Inspiration of the Poet
Landscape during a Thunderstorm with Pyramus and Thisbe
The Four Seasons
The Victory of Joshua over the Amorites
Cephalus and Aurora, 1627, National Gallery, London
Acis and Galatea, 1629, National Gallery of Ireland, Dublin
Sleeping Venus with Cupid, 1630,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Mars and Venus, c. 1630, Museum of Fine Arts, Boston
Venus, a Faun and Putti, 1630s, Hermitage Museum, Saint Petersburg
The Adoration of the Magi, 1633, Dulwich Picture Gallery, London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 c. 1633–1634,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Adoration of the Golden Calf, 1633–1634, National Gallery, London
The Crossing of the Red Sea, 1633–1634,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Helios and Phaeton with Saturn and the Four Seasons, c. 1635
Diana and Endymion, 1630s, Detroit Institute of Arts
The Birth of Venus, 1635 or 1636
The Triumph of Pan, 1636, National Gallery, London
Sacrament of Ordination (Christ Presenting the Keys to Saint Peter) , c. 1636–1640, Kimbell Art Museum
Holy Family, c. 1649, National Gallery of Ireland
Discovery of Achilles on Skyros, c. 1649–1650, Museum of Fine Arts, Boston
The Holy Family with St Elizabeth and John the Baptist, c. 1655, Hermitage Museum
Landscape with a Calm, 1650–1651, Getty Center
The Annunciation, c. 1655–1657, National Gallery, London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