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바울, 율법, 유대인
E. P. 샌더스 / 크리스천다이제스트 / 1995.2.28
이 책은 해당 분야 전공자들을 위한 교재 겸 전문서이다.
저자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1977)는 바울 연구에 있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전망’ 또는 ‘포스트-샌더스 연구’ 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covenantal normism으로 규정된 샌더스의 팔레스틴 유대교는 더 이상 바울의 적대자가 아니었다. 이제 바울 연구자들은 바울의 주장들, 특히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장이 유대교와 맺고 있는 새로운 관계를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샌더스는 ‘바울, 율법, 유대인’의 서문에서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에서는 바울의 유대인됨과 바울이 유대교 전승 및 사상과 맺은 개괄적인 관계를 탐구할 의도가 없었으며, 이 책(바울, 율법, 유대인)에서 바울과 당대 유대교의 일반적인 관계를 좀 더 꼼꼼하게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고 밝힌다.
이 책은 ‘율법’(제1부)과 ‘유대인의 구원’(제2부)이라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바울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피고, 그것이 당시 유대교의 입장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바울이 그러한 입장들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제시한다.
○ 목차
제1부 바울과 율법
1.율법은 입교 조건이 아니다
2.율법의 목적
3.율법은 이루어야 한다
4.옛 시대와 새 시대
5.결론 – 바울과 율법
제2부 바울과 유대인
6.그리스도의 사도 바울과 이스라엘 민족
결론 – 바울과 유대교의 결별
○ 저자소개 : E. P. 샌더스 (Ed Parish Sanders, 1937~ 2022)
샌더스(Ed Parish Sanders, 1937년 4월 18일 – 2022년 11월 21일)는 유니언 신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헬싱키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듀크 대학 문리대 종교학 교수로 재직했고 옥스퍼드 대학 성경 주석학 교수로 ‘딘 아일랜즈 프로페서Dean Ireland’s Professor’ 자리에 있었으며, 퀸스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을 역임했다.
신약성서 학자이며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주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의 주된 학자이다. 그는 예수는 유대주의 안에서 회복운동을 한 인물로 주장한 것에 공헌하였다.
대표 저서로 『바오로와 팔레스타인의 유대교』(1977), 『율법과 유다 민족』(1983), 『예수와 유대교』(1985) 등이 있다. 『예수와 유대교』는 그해 종교서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며 1980년대 ‘바오로 신학의 새 관점’을 정립했고, 이로써 그는 신약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주도하는 인물로 발돋움했다.
Duke University의 the Arts and Sciences Professor of Religion Emeritus이다. 그 전에는 McMaster University에서 신약학을 가르쳤으며, Oxford University에서 Dean Ireland’s Professor of the Exegesis of Holy Scripture이자 fellow of The Queen’s College였다.
저서로는 Judaism: Practice and Belief, 63 BCE?66 CE (1992), Jewish Law from Jesus to the Mishnah(1990), Studying the Synoptic Gospels (Margaret Davies 공저; 1989; <공관복음서 연구>, 대한 기독교 서회, 1999), Jesus and Judaism(1985; <예수와 유대교>, CH북스, 1995, 2008),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1983; <바울 율법 유대인>, CH북스, 1995), Paul: A Very Short Introduction (1991; <사도 바오로>, 뿌리와이파리, 2016), Paul: The Apostle’s Life, Letters, and Thought(2015)이 있다.
○ 출판사 서평
W. Davies의 영향을 받은 E. P. Sanders는 1977년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라는 책으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 책은 샌더스가 듀크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인 1977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저서는 샌더스가 1962-3년 옥스퍼드와 예루살렘에서 시행한 고대 및 현대 히브리어 자료 연구와, 1966년 집중한 굿이너프의 유대교 이론에 대한 탐구, 그리고 유대교 1차 저작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유대교 자체를 바울과 비교하는 집중적인 비교 연구가 한데 모여 태어난 작품이다.
그는 주전 200-주후 200년경의 팔레스틴 유대교의 패턴 (pattern)을 연구하여 기독교의 패턴과 비교했다. 그는 바울이 유대교를 행위구원의 율법종교로 이해했다고 보는 특별히 독일의 (루터파) 학자들 (F. Weber, E. Schürer, W. Bousset, R. Bultmann, , H. Hübner 등)에게서 反 셈족주의 (Anti-Semitism)의 경향을 발견했다.
샌더스는 바울 신학의 틀에서 유대교를 바라보지 않고 유대교를 바라본 결과, 바울 당시의 팔레스틴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라고 정의내렸다.
그리고 오직 유대교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부인할 경우에만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은 이런 (올바른) 유대교를 오해하여 율법을 지켜서 공로를 쌓고 결국 의롭게 되는 율법종교로 잘못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샌더스가 붙인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언약적 신율주의, covenantal nomism)에서 ‘nomism’ 이라는 말에서 ‘legalism’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샌더스는 이 언약적 율법주의와 개신교 학자들이 묘사하는 유대주의의 구원론 사이에 거의 유사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이 유대주의를 포기한 것은, 새로운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나은 무언가 (something better)를 발견했기 때문이지, 율법주의적 경건 (nomistic piety)의 열등함 때문은 아니었다. 바울이 거부하면서 공격한 ‘율법의 행위’ (works of law)는 구원과 의를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할례와 음식법’과 같은 것으로서 이방인 선교시에 기독교가 유대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바울의 유대주의 비판은 유대주의의 율법주의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이전 종교에 대한 종막이었다. 바울이 유대교를 바라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 (works of law)를 비판한 것은 율법주의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잘못된 정의였다. 즉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정의하는 표시 (defining mark)이다.
○ 독자의 평 1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1977)는 바울 연구에 있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전망’ 또는 ‘포스트-샌더스 연구’ 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covenantal normism으로 규정된 샌더스의 팔레스틴 유대교는 더 이상 바울의 적대자가 아니었다. 이제 바울 연구자들은 바울의 주장들, 특히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장이 유대교와 맺고 있는 새로운 관계를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샌더스는 「바울, 율법, 유대인」의 서문에서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에서는 바울의 유대인됨과 바울이 유대교 전승 및 사상과 맺은 개괄적인 관계를 탐구할 의도가 없었으며, 이 책(「바울, 율법, 유대인」)에서 바울과 당대 유대교의 일반적인 관계를 좀 더 꼼꼼하게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고 밝힌다. 이 책은 ‘율법’(제1부)과 ‘유대인의 구원’(제2부)이라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바울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피고, 그것이 당시 유대교의 입장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바울이 그러한 입장들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제시한다. 이 글은 샌더스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언급한(18, 제1부의 1장을 가리킴) 제1부를 중심으로 하였다.
샌더스는 바울 사상의 몇 가지 주요 특징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는데, 이 특징들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진술들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틀을 제공한다. 첫째, 바울의 진술들은 어떤 질문들과 관련해서 언급된다. “율법에 대해 바울이 말한 것들이 서로 다른 이유는 제기된 질문과 문제에 근거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각각의 대답은 그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다 바울의 중심적인 관심들 속에서 나오고 있지만, 그러나 그 다양한 대답들을 함께 나란히 두었을 때, 율법과 같은 문제를 논의할 때 기대했던 것처럼, 전체적으로 논리있게 정리되지는 않는다.”(18) 둘째, “바울이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중심적인 확신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 그 중심 확신들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 따라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그 주님은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 바울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18) 셋째, “바울의 사상과 그 사상을 표현하는 핵심 술어 간에 차이가 있는데……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은 상태로 옮겨진 것을 논의하고 있다.”(21) 넷째, 구원받은 상태로의 이동은 구원받는 사람들의 몸(집단)에 ‘들어감’ (getting in)과 ‘머뭄’ (staying in)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진다.(22)
이 글은 샌더스 논지의 핵을 이루는 이 네 가지 사항들을 중심으로 이 책의 공헌과 한계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첫째, 샌더스가 바울의 다양한 율법 진술들이 서로 다른 질문들에서부터 온다고 본 것이다. 바울의 편지들이 가지고 있는 상황적 성격을 고려할 때, 샌더스가 다양한 율법 진술들을 서로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들과 관련시킨 것은 바울 이해의 기본 전제에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샌더스는 바울 율법 진술들을 분류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네 가지 질문을 고안하였다: ① 어떻게 구원받을 집단에 들어가는가 ②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③ 구원받을 집단에 들어간 후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④ 옛(율법) 시대와 새(예수 그리스도) 시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샌더스의 질문들은 바울 사상의 특징으로 제시된 제3, 4 항목과 관련된다. 따라서 샌더스가 바울 사상의 특징이라고 본 것 중에서 제1, 3, 4 항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제1, 3, 4 항의 핵심은 결국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에 있다고 하겠다. 과연 이 구조가 샌더스의 계획대로 바울의 다양한 율법 진술들을 이해하는데 성공적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샌더스는 “바울이 율법이라는 용어를 최소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문맥 …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들어가는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가 율법을 지키면서) 행동하는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31)고 제시한다.(제1장, 제3장) 그는 바울이 ‘들어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으나 ‘머뭄’의 조건으로서의 율법(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43) 그러나 샌더스는 바울이 반대한 들어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행위), 그 구체적인 예인 할례, 절기 준수, 음식 규례의 경우는(43) 바울이 ‘머뭄’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제거되거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고(161) 한다. 이것은 샌더스가 바울의 율법 거부를 ‘들어감’의 조건으로 제한시켰던 시도에서 다소 물러선 인상을 준다. ‘머뭄’의 경우에도 거부되는 항목이 있다는 것이다.
샌더스의 주장은 바울의 율법 거부가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 즉 가입 조건으로서의 율법 거부가 아니라 유대인 선택 사상에 대한 거부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던(J. Dunn)은, 샌더스가 ‘들어감’과 ‘머뭄’에서 거부된 것으로 제시한 행위들이 유대인의 정체를 규정하는 행위들이라고 옳게 지적하였다. “율법의 문제는 … 유대인에게 있는 특권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라는 샌더스의 주장처럼, 바울의 율법 거부를 설명하는데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는 그리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바울과 유대교의 관계 차원에서 볼 때, 바울의 율법 거부를 유대교의 그리스도 거부와 유대인의 특권 주장에 대한 거부로(73-74) 인식한 샌더스의 주장은 정당하다. 유대인의 특권에 대한 바울의 거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외에 율법의 행위를 지킬 것을 주장하였던 어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동일한 토대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유대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율법의 행위들을 ‘들어감’과 ‘머뭄’ 모두에서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대교와의 관계에서든지, 율법 행위를 주장한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서든지, 바울의 율법 거부는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와 상관없이 의롭다 여김 받는 데는 믿음 이외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특히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중심 확신(샌더스의 주장대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샌더스의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는 바울이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샌더스는 그리스도인이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머뭄’ 곧 구원받은 집단에 들어온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샌더스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규율하는 율법과 모세의 율법을 이론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160), 바울의 권고, 특히 상급과 형벌에 관한 가르침은 율법과 유대교 전승에 매우 일치한다고 지적한다(162). 그러나 샌더스는 바울이 완전한 할라카 체계를 만들어 내지 않았고(143), 그의 권고가 모두 성경적이거나 유대교적인 것은 아니며(143, 161), 의도적이고 명시적으로 ‘율법’에서 율법의 요구 조건 가운데 세 가지 즉 할례, 날들과 절기, 음식 관련 규제를 제거하거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모세의 율법과는 다르다고 말한다.(161) 여기에 대해서 샌더스는 “바울에게서 율법이 율법으로 여전히 작용한 정도를 정확하게 평가하기란 어렵고 앞으로도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 점을 무시하고 싶지 않다. 또한 그 점을 과장하고 싶지도 않다”(167)고 논평함으로써 ‘머뭄’의 구조 안에서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루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또한 샌더스는 바울의 모순적인 율법 관련 주장들을 정리하는데 자신이 도입한 ‘들어감’과 ‘머뭄’의 구분이 지니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바울에게 믿음이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는 시점에만 요구되었다는 뜻을 내비칠 의도가 없다. 그 반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의지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 아마 믿음이 ‘선행’ 자체의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드러날 때, 바울이 선행에 대하여 즉 율법주의와 자기 성취에 대한 의지에 대하여 유대교를 비난했다고 생각해야 할 부담이 덜할 것이다 …”(234-235).
둘째, 바울의 다양한 율법 진술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중심 확신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이 점에서 바울의 율법 진술의 일관성을 변호한다. 샌더스는 바울의 율법 관련 주장들을 평가하면서, 이러한 주장들은 ‘체계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바울의 중심 확신들로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바울의 주장들이 ‘경험(바울의 회개/부르심)’과 그로 인해 생겨난 중심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사유의 연속 순서’(221-222), 바울의 흑백 사고방식(203)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샌더스는 이러한 설명이 “개별 구절의 성경 주해적 분석보다 더 설득력 있는 주장”(219)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다양한 진술들에 일관성을 부여했다는 중심 확신의 기원으로 제시한 바울의 경험이나 바울의 사유 순서,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논증하지 않고 있다.
샌더스는 바울 당시 유대교를 공적주의에서 구해주었지만, 그가 「바울, 율법, 유대인」에서 목표로 했던 바울과 유대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규명하는데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샌더스는 바울의 율법(행위) 거부가 입교 조건에만 국한된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의 율법(행위) 수용과 그에 따른 유대교와의 접촉점을 제시하고자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연구는 바울의 율법(행위) 수용이 모세의 율법과 갖는 관계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하였다.(167) 오히려 그의 연구는 바울이 유대교가 주장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고 유대교의 선택 사상을 거부함으로써 유대교와는 단절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샌더스의 바울은 공적주의 유대교와는 대결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특권적인 선택 사상을 지닌 유대교와는 여전히 대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독자의 평 2
본서의 저자인 E. P. Sanders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교수이며, 캐나다 맥매스터대학 종교학과 파트 타임 교수이다. 저서로 저작상을 수상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예수와 유대교」등이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바울과 율법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은 바울과 유대인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주제들 중의 하나는 율법과 유대인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바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또한 바울에 대한 바른 이해가 이러한 것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즉 ‘바울, 율법, 유대인’은 어느 하나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골고루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제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바울을 중심으로 해서 율법과 유대인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관찰해본다면, 결국 모든 문제는 유대교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 바울 자신이 유대인이었고, 율법 또한 유대교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개별 항목의 이해도 중요하지만 이를 위한 유대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아주 잘 쓰여진 책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유대교에 대한 상식을 교정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이다. 특히 그는 율법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편견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 책에 나타난 저자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저자는 자신의 연구범위를 한정함으로서 책의 범위를 분명히 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을 따라 충실히 자신의 견해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저자의 서술상의 문제는 한 가지를 너무 길게 나열하거나 문장을 너무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번역자의 잘못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를 쉽게 해 주지는 않는다. 또한 저자는 ‘증거가 없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이 보여주는 것은 저자가 근대적 패러다임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유대교 및 다른 것에 대한 바른 이해를 주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은 이 책을 통해서 유대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바울, 율법, 유대인, 그리고 현재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본서는 읽을만한 가치가 있으며 권장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 독자의 평 3
바울의 새 관점이란 무엇인가?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1. E. P 샌더스 “신율주의에 대하여”
한동안 W.Davies의 영향을 받았던 E.P.Sanders(이하 ‘샌더스’)는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이라는 책 (현재 장신대 도서관에는 없음) 그리고 최근의 ‘Paul, Law and Jewish People, 1983(번역서. “바울, 율법, 유대인”) 라는 책에서 바울연구에 있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가장 격렬한 토론을 야기시켰다. 그것은 James Dunn(제임스 던)에 의해 제기된 바울에 대한 새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던의 ‘바울에 대한 새관점’에 대해 알기위해서는 무엇보다 샌더스의 1977년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란 책을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샌더스는 그의 책에서 사도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율법을 지킴으로 공로를 쌓아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율법주의적 종교”(Legalism)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행적인 언약백성의 선택과 율법을 통한 언약백성의 의무를 강조하는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센더스가 제안한 새로운 유대교 관점에서 바울을 새롭게 보려는 “새 관점의 바울연구”(the New Perspective on Paul)가 태동되었다. 새관점의 바울연구의 기초를 제공한 샌더스의 의견을 보면, 율법 준수란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getting in)과 언약 안에 ‘머무는 것'(staying in)과 관련이 있다. 샌더스는 언약적 율법주의(이하 신율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은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여야할 계명들을 주셨다. 순종은 보상이 주어졌고, 불순종은 심판이 주어졌다. 그 수단에는 회개도 요구되어 있다.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머물려는 바람을 계속 유지하는 한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들에 들어있는 유업 다가올 세상에서의 생명을 포함하여, 누릴수 있을 것이다. 순종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언약에 머무는 조건이다. 그러나 그들이 언약을 보수로 받은 것은 아니다.”
샌더스는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200년 동안에 쓰인 기존 유대 문헌들인 구약 외경, 위경, 사해사본, 초기 랍비 문헌의 내용을 샅샅이 살펴본 결과 당대의 유대교도 하나님의 자비에 입각한 구원을 가르치는 은혜종교 였음을 확인했다. 즉 우리가 평상시대로 알고있는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을 준수하여 자기 의를 세움으로써 구원을 얻으려 한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유대문헌 분석에 근거하여 샌더스는 유대교의 종교 유형을 언약적 율법주의(또는 ‘신율주의’)로 규정하면서 유대교가 기독교와 매우 흡사한 은혜의 종교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1세기 당시 신율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으며, 바울은 당시 이방인의 사도로써 유대교와 유대인들을 왜 그렇게 비판했을까? 샌더스의 최근의 저서라고 할수 있는 “바울 율법 유대인”에서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로마서 6:14~8:8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죄와 육신과 연관되어 있는 율법아래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거나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육신에 속한 인간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할 수 없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율법을 행한다…..(중략) 바울은 의가 율법으로 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난다고 길게 주장한 (갈2:15-3:18)후에, 방향을 바꾸어 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는지 묻고(3:19) 율법이 죄와 연관되고 부정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고 설명한다.(3:22~24)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않다(3:25)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율법’ 혹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룬다.(혹은 이루어져야 한다)….(중략)다시 로마서 8:2에서는 율법의 요구가 그리스도인 안에서 이루어 졌다고 말한다. 바울은 13:8-10에서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고 다시 선언한다.”
즉 샌더스는 바울이 믿음으로 사는 것과 율법을 이루는 것 사이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율법과 동등하게 보고 있으며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법인 율법을 이루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논의할때에만 믿음과 율법의 명백한 대립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과 율법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논의할때에만 대립이 나타나며 바울은 단지 이런 대립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에 대해서만 비판한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비판은 율법전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고 한것이다.
바울의 유대교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역사적 판단이나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학적인 산물이다. 즉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적 종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구원자이며,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말하자면, 유대교의 문제를 의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결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구원이 나타났다는 문제의 해결을 발견하고 유대교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바울사상은 대체로 유대교적 이었으며 기독교운동을 유대교와 분리되게하고만 율법에서 벗어나는 일을 바울 단독으로 조정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낸다. 단지 샌더스에게 있어서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는 비기독교적 유대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다른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바울이 주장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 선민이 되기 위하여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믿음에 기초를 두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전에 성경(율법)에서 선포하던 것이다.”는 것을 말한다.
이 역시 믿음과 율법을 전혀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사도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신율주의와 다른 모순을 느끼지 않았음을 샌더스는 제시하고 있다.
샌더스의 칭의에 대한 의견
샌더스에 따르면 로마서의 중심주제는 죄인인 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문제였다. 말하자면 샌더스에게 있어서 “칭의”는 “이전용어”(transfer terminology)이며, 의롭게 된다는 것은 언약백성 안으로 들어가는(getting in)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의로움을 얻고 구원을 이루어(혹은 이루어져야 하는)야 한다. 율법을 주신 목적을 바울서신을 통해서 깨닫게 될 수 있다.
필자가 느끼기에 위의 샌더스의 의견은 이전 옛 관점 주장자들이 또는 개혁주의자들이 제시한 사도바울의 이신칭의는 잘못된 해석이며 재검토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샌더스가 주장한 사도바울의 이신칭의는 복음의 핵심에서 거리가 먼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단지 그것은 유대교와 이방인의 동등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샌더스는 당시 바울은 유대인들이 지켰던 율법과 그리스도인들이 지켰던 율법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 의견은 사도바울이 율법을 나누지 않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고 있는것이다.
이는 결국 사도바울의 다메섹의 회심사건의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데, 과연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은 소명사건인가? 아니면 회심사건인가?에 질문하도록 한다. 만약 사도바울이 그의 율법관과 관련하여 율법을 복음과 구분짓지 않는다면 그의 다메섹사건은 단지 소명사건에 불과한 것이 되며 율법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린다. 과연 율법은 동일하나 지위가 바뀐 것뿐일까? 과연 사도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복음과 연관 지어서 전혀 다른 부분으로 보는가 ? 아니면 연장선상으로 모순이 되지 않는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는가? 샌더스의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율법’이라는 말 자체도 필자에겐 거부감이 들게 한다.
이에 장신대 신약학의 김철홍교수의 2008년 여름 성서마당에 기고한 칼럼 ‘현대 바울신학 연구 동향: 바울신학의 새관점을 중심으로’ 에서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 심각성을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당시 1세기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the workes of the law)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샌더스는 사도바울이 율법을 포기하고 비판한 이유가 단지 새로운 구원의 길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더 나은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지, 율법자체를 포기하고 비판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비판한 율법의 행위는 구원과 의를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즉 신학적인 것보다는 유대사회에 포함되는 몇가지 조건 즉 ‘할례, 날들과 절기, 음식관련 규제’를 비판하고 거부한 사회학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을 배타적인 기독교로 인식했다.
샌더스의 의견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단순하게 이스라엘에 합류한 것이 아님을 다시 본다. 구분되는 입교조건(믿음)과 구분되는 입교 의식(세례)과 구분되는 사회적 실재(교회)가 있었다. 우리는 또한 기독교를 새 종교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그릇된 지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회개’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말했다….기독교운동에 속한 유대인인 이방인처럼 회개할 필요가 없었다….. 바울이 교회를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심할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새종교가 아니었다.”
만일 샌더스의 견해가 옳다면, 사도 바울은 왜 유대교를 비판했는가에 대한 바울의 유대교 비판의 내용에 대한 문제는 물론, 바울의 핵심 교리(갈, 롬)라고 할수있는 “율법의 행위”(works of law)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도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즉 샌더스의 ‘신율주의’는 구원의 동인에 있어서 인간의 율법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는 ‘신인협동설’을 주장하는 것이며, 이는 구원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works of law)가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롬9:15~18)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바울의 이신칭의(갈3:11, 롬1:17~18)와 전혀 다름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샌더스의 신율주의에 대한 의견은 율법과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참으로 신선한 문제제기였지만,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롬3:9~20) 아무도 “율법의 행위”(works of law)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 하고 있다. Timo Laato의 말처럼 바울은 죄 지은 인간에게 무엇이 선한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믿음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 샌더스의 신율주의는 제임스 던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됐으며 새관점의 신학자들이 샌더스의 신학을 기초로 등장하게 되었다.
2. 새 관점자들(Dunn의 의견을 중심으로)의 바울과 율법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영국 던햄의 신약학자 제임스 던은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샌더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이유를 샌더스와는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 김세윤 교수는 제임스 던은 분명 바울에 대한 새관점의 가장 탁월한 아니면 적어도 가장 지칠 줄 모르는 설파자다 라고 밝힌바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서 밝힌바, “바울에 대한 새관점 이라는 말은 사실상 던 자신이 바울 해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낸 문구로서 제 2성전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또는 신율주의)로 규정하는 샌더스의 정의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율법의 행위들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바울의 진술에 주목하고, ‘율법의 행위들’을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들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샌더스가 ‘율법의 행위들’을 언약을 유지하거나, 또는 언약 안에 머무는 수단으로 간주한 것에 비해, 던은 마카비 시대 이래 가장 분명하게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해 주는 계명들(boundary markers), 즉 할례, 안식일, 음식법 등을 지키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바울 당대에 이것들은 특정 개인이 유대 언약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정체성의 경계(boundary of identity)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유대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는 이방인들은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켜야 했다. 던에 의하면,
“율법은 정확히 말해 경계를 규정하는 역할(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분시키는) 이라는 면에서 바울의 일차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이 왜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 지며, 또한 동료 유대인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시도로서 바울신학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들이란….마카베 시대 이래 유대교를 가장 분명하게 규정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장 분명하게 구분시켜온 바로 그 관행들 (할례, 음식규정들,절기/안식일)이었다.”
이처럼 던은 신율주의를 주장한 샌더스의 의견을 기초하지만, 다른 각도로 접근한다. 즉 사도바울이 비판한 율법의 행위는 유대인들의 정체성 표지였던 할례, 음식물에 관한 규정 안식일법 과 같은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을 다른 민족으로 분리한 배타주의적 태도였다고 주장한다. 즉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행위는 이와 같은 ‘유대인의 표지’를 열심히 지키고 강조하는 것이지, 모든 율법을 지키는 행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던이 제안한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표지였던 율법의 행위에 관한 진술에 대해 바울이 비판한 것은 단지 유대인의 표지를 지키려고 하는 이 행위에 대한 비판이지 율법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슈라이너는 “율법의 행위가 율법전체를 가리키고 있으며 따라서 율법의 한부분만이 유용 하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게다가 롬 3:28 에 있는 율법의 행위와 4:2,6에 있는 “행위”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은 바울이 행위를 하나의 원칙적인 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분하는 ‘표지’로 한정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슈라이너는 사도바울이 비판한 것은 율법전체에 대한 비판이지 단지 율법의 행동에 관한것이다 라고 보는 던의 관점을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율법의 행위는 그것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 언약의 공동체가 되는 수단으로 보는 그들(새 관점자들)의 의견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그들의 노력과는 다르게 율법은 유대공동체 안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율법행위자로 만들어버리는 또 다른 딜레마를 형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주의는 토라의 헌신과 긴밀하고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를 가짐으로써 언약의 공동체에 들어 가는 것은 바로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 유대민족이 될 수밖에 없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율법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얻을 수 있는다는 여지는 조금이라도 남겨 둘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사람이 의롭게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갈 2:16)에서 율법의 행위란 율법전체를 말한 것이다. 즉 언약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율법행위만을 말 한것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율법을 구분하여 말한적이 전혀 없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없느니라 라는 바울의 주장은 던의 의견과 절대적으로 다르다고 볼수있다. 그리고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롬 10:4)는 바울의 의견은 더 이상 율법은 의롭게함에 있어서 어떤 효력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새 관점자들의 칭의에 대한 의견
바울과 율법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칭의의 문제로 이어진다. 바울의 옛 관점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에 따르면, 바리새인이며 율법에 열심히 있던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율법에 무관심하다고 그들을 핍박했다. 하지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율법의 저주아래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옳다함을 받은 메시아 이며 주님이라는 것을 보고 나서 그리스도의 죽임이 사실은 우리를 위한 종말론적 속죄였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율법의 마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롬10:4)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견지에서 그의 독특한 구원론적 복음을 서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근거하여 던은 바울의 칭의 교리에 대한 옛 관점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배격한다. 계속해서 던을 포함한 새관점자들의 칭의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던에 따르면, 이신칭의는 신자 개인의 구원을 규정하는 교리가 아니라, 안디옥 사건(갈 2:11-14) 이후에 바울이 확립한 일종의 논쟁적 교리, 또는 이방인 선교를 위한 교리다. 즉, 유대인들의 분리적이며 배타적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들 없이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옹호하기 위한 교리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율법의 행위들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바울이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또 다른 새관점 학자로 N.T Wright(이하 라이트)의 의견과 비슷하다.
“우리의 미래적 칭의의 현재적 표시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해 주신 언약적 의무에 대한 우리의 충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율법행위’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날것을 현재 표시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점에 있어 바울이 그토록 수고를 다하고 물리치려고 노력했던,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의 신학이 발생한것이다.”
라이트는 던의 의견과 굉장히 비슷하다. 라이트 역시 바울은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유대주의(분리적이며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율법의 행위야 말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그릇된 표지이기 때문에 유대주의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새관점자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적 의무로써 율법을 유대주의와 다른 것으로 여기고 율법에 관하여 바울은 긍정적인 태도(예를 들어, 롬3:31;8:4; 고전7:19; 갈5:14)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던의 말처럼 이신칭의는 단지 이방인 선교를 위한 교리인가? 라이트의 표현대로 언약적 의무에 대한 칭의의 현재적 지표인가? 새 관점자들의 이러한 시도들은 선교적인 지평을 열어주고 이신칭의의 확신 가운데 안주함에 머물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통찰일수 있다. 하지만 던과 새관점자들의 의견은 이신칭의의 새로운 면을 찾으려다가 본질을 잃어버린 결과를 얻게 되었다. 결국 새관점자들의 의견 즉 바울이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교로써 발전되었다고 보는 이신칭의 교리는 마침내 바울이 유대교안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슈라이너는 이들의 의견을 반대하여 갈라디아서 5:3절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며, 율법전체와 율법의 의무를 가진자에 대한 강조는 만일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례를 받는 다면 그들은 의롭다 함을 얻기위해 율법의 모든 명령을 실행해야 한다든 것을 보여준다. 즉 할례를 받은 자는 율법전체를 지켜야할 의무를 가지므로 율법의 행위는 곧 율법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로마서 3:9~20에서 율법의 행위가 율법전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얻을 이유가 인간이 율법전체를 지키기에 무능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실제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1:6~9; 3:1~5; 4:8~11, 12-20, 21; 5:1~6, 7-12등등을 보면 갈라디아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거의 넘어가 할례를 받고 스스로 율법의 멍에를 썼다는 것을 분명히 알수있다.
바울의 주요 율법에 관한 저서라고 할수 있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대한 그의 의견이 이렇게 확고하다면, 새관점자들의 의견대로 바울은 율법의 옹호자라고 할수있을까? 아니다. 바울의 자신이 율법의 저주 아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다메섹도상에서 하나님에 의해 옳다고 입증되는 것을 본 경험으로부터,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발전시켰다.
결론: 새관점에 대한 비판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필자는 바울신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주어진 연구를 통해 얻은 자료들을 보면서 샌더스의 영향, 더불어 던을 비롯한 새관점자들의 바울연구는 바울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았다.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새 관점 학파는 샌더스가 제2성전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 ‘신율주의’)로 규정한 것에 기초하여 바울의 복음, 특히 그의 칭의론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많은 면에서 바울 복음에 대한 종교 개혁의 해석을 사실상 뒤집어 버렸다.
결국 샌더스의 의견은 그대로 던(새 관점자들을 포함한)에게 이어져내려 오는데, 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 선교로 부르신 것은 “즉각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의 다메석 경험의 “일차적 특징”이었던 반면, “(그리스도를 즉시로 율법의 마침으로 보았다는 식으로) 다메섹도상의 사건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수록 왜 갈라디아서2장의 대결들이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고 다메섹 사건을 해석함으로써 던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의 여파로 뒤늦게 발전된 것이라고 보게 되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권리를 변호한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율법의 행위들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바울이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 있어서 절대로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갈3:10)
슈라이너 역시 이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데 롬2:29을 통해 이방인들이 성령을 소유하기 전에는 그들이 율법을 지킬수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 결코 어디에서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개념이 없음을 강력하게 말하였다. 특별히 사도바울이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행위들(안식일, 음식에 관한 규례들)을 배격하는데는 그는 할례를 십자가와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할례는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할례는 곧 율법이다(갈 5:3)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갈5:11과 6:12~14절은 할례를 받음과 십자가가 의롭게 되는데에 서로 배타적인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할례를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손상시키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배격하는 것은 곧 율법 자체에 관한 것이며, 율법의 어떤 행위로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은 행위에 의한 칭의를 가르친 적도 전파한 적도 없다.
바울이 전했던 것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였다.(6:14) 다메섹도상에서 그가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오직 그에게서만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충격과 함께 경험한후에 율법의 행위에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에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수 있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 롱거네커는 갈 3:2에서 바울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어떤 다른 가정된 수단도 매우 철저하게 배제하기 때문에 그런 복음을 한번 받아들였던 사람이 누구든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감히 그것을 보충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복음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의 목청을 다해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1:6~10) 그리고 그의 평생에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전파하며 다녔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기독교 복음의 중심 케리그마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유대인과 가장 명확히 구분해 주는 바로 그 복음의 교의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 관점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바울의 칭의교리에 대해 새로운 면을 보이기 위해 아주 값진 바울의 복음의 진수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