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 23일, 대한민국의 기업인•시인 김광균 (金光均, 1914 ~ 1993) 별세
김광균 (金光均, 1914년 1월 19일 ~ 1993년 1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 김광균 (金光均)
.출생: 1914년 1월 19일, 북한 개성
.사망: 1993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부암동
.학력: 송도고등학교
.저서: 와사등, 김광균 시선, 김광균 문학 전집, 김광균 전집, 초판본 김광균 시선
.자녀: 김은영
본관은 웅천 (熊川)이고 호는 우사 (雨社) · 우두 (雨杜)이며 경기도 개성 출생이다.
13세 시절이던 1926년에 시인으로 첫 등단한 그는 ‘시인부락’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에 자극을 받아 “시는 하나의 회화이다”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 · 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후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집에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등이 있다.
광복 후 한국 전쟁 중 납북된 동생이 운영하던 건설상회를 대신 운영하며 중견 기업으로 키워내는 등 후대엔 시인의 길이 아닌, 기업가로 활동했다.
○ 생애 및 활동
김광균 (金光均)은 1914년 1월 19일, 경기도 개성 출생으로 송도상업학교 (松都商業學校)를 졸업하고 고무공장 사원으로 군산 (群山)과 용산 (龍山) 등지에 근무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불과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발표한 「가신 누님」(中外日報, 1926)을 비롯하여 「야경차 (夜警車)」(동아일보, 1930) 등이 그의 습작품에 해당된다면, 『시인부락 (詩人部落)』(1936), 『자오선 (子午線)』(1937) 동인으로 가담한 이후의 활동은 본격적인 시단 활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설야 (雪夜)」는 그로 하여금 시단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게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와사등 (瓦斯燈)』(남만서점, 1939) ·『기항지 (寄港地)』(정음사, 1947) ·『황혼가 (黃昏歌)』(산호장, 1959) 등 3권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시작 활동은 1952년 죽은 동생의 사업을 맡아 경영하면서 중단되고 실업가로 변신하여 국제상사중재위원회 한국위원회 감사, 무역협회 부회장, 한일경제협력특별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말년 가까이 떠났던 시단 복귀의 신호이듯 이전에 간행한 시집을 정리하여 『와사등』(근역서재, 1977)을 출간하더니, 1982년 「야반 (夜半)」 등 5편의 시작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뒤 문집 『와우산 (臥牛山)』(범양사, 1985)과 제4시집 『추풍귀우 (秋風鬼雨)』(범양사, 1986) 등을 간행하였다.
김광균은 정지용 (鄭芝溶) · 김기림 (金起林)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을 선도한 시인으로 도시적 감수성을 세련된 감각으로 노래한 기교파를 대표하고 있다. 그는 암담했던 30년대의 사회현실로서 도시적 비애의 내면공간을 제시하여 인간성 상실을 극복하고자 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지적이고 이지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시인으로 고독과 슬픔 속에서 실존의 중요성을 확보하고 생의 의미를 긍정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감각적 이미지와 신선한 비유가 낭만적 정조와 융화되어 서정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 김광균 시의 특징
김광균은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시를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는 특히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 쓴 이미지즘 계열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적 소재를 바탕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나 강한 색채감,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 등의 기법을 시에 차용하였으며, 특히 사물의 한계를 넘어 관념이나 심리의 추상적 차원마저 시각화시켰다. 그의 시 속에는 소시민적 서정과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과 삶의 우수와 같은 정서가 깃들어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도시적 소재와 공감각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함,
②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을 시도함,
③ 강한 색채감으로 감각도 높은 정서를 형상화함,
④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 사물은 물론 관념이나 심리 등의 추상적인 것마저 그려내려고 함.
김광균의 시는 주로 시각적인 이미지에 치중하지만, 이미지스트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의 이미지스트에 가깝다. 비록, 감상(感傷)의 내면풍경을 억제하지 못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김광균의 모더니즘은 우리의 정신적 상황과 서정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 문명 비판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김광균의 모더니즘은 우리의 정신적 상황과 서정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 문명 비판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김광균은 최재서, 김기림이 제시한 모더니즘 이론을 작품으로 실천한 한국의 이미지스트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대체로 모더니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감정의 무절제한 유로의 배격
② 소재의 현대화, 다변화
③ 이미지의 중시
④ 언어의 조탁
○ 작품세계
김광균은 한국현대시사에서 1930년대 후반을 풍미한 모더니즘시 운동의 실천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주로 김기림에 의하여 도입되고 이론화된 모더니즘을 작품상에 구현함으로써 모더니즘시 운동의 한국 정착화에 공헌하였다.
특히 김기림이 모더니즘시의 본질의 하나로 소개한 회화적 수법을 매우 세련된 감각으로 추구한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따라서 그의 시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항상 논의의 촛점이 되어온 것은 소위 모더니즘이라는 사조적 관점에서 파악된 시각적 이미지의 제시와 도시적 가각에 의한 시풍이었다.
시각적 이미지는 당시 모더니스트 일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으로, 과거의 청각적인 노래류의 시에 비해 모더니즘은 다분히 의식적인 기법으로서의 시작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기림이 표방한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적인 내용의 하나가 바로 시작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기림이 표방한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적인 내용의 하나가 바로 이 시작의 기술적인 문제이며, 그 방법상의 탐구가 T. E. 흄, E. 파운드 류의 이미지즘에 해당된다. 30년대 모더니즘시의 주된 경향은 이미지즘에 경도된 선명한 이미지의 제시에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을 회화적 또는 색채적 수법으로 가장 뚜렷이 작품사에 구현한 시인이 바로 김광균이었던 것이다.
회화적 기법과 아울러 김광균의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공감각적 이미지’이다. 그의 공감각적 심상은 여러 가지 감각을 시각화하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시각→청각(<시계점 지붕 위에 청동비둘기 / 바람이 부는 날은 구구 울었다.>, 시각→촉각(<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청각→촉각(<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등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그의 중요한 특징은 애상적 분위기이다. 그의 시편에는 ‘서를픈’, ‘고달픈’, ‘고독한’, ‘흐득여 울며’, ‘눈물 지운다’, ‘창백한’, ‘여읜……’ 등의 말투가 많이 나온다. 이것은 그의 시의 주제가 ‘존재의 소멸’을 다루고 있음에서 연유한다. ‘존재의 소멸=죽음’의 현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자에게 상실감과 공맥감, 고독감 등을 안겨준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비애와 좌절감은 바로 이 상실감의 표현이다.
생명 있는 존재의 사라짐으로 인한 상실감을 바꾸어 말해, 사라진 생명에 대한 강한 미련이나 애착일 수 있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애착은 붉은 색 또는 눈부시게 화려한 이미지를 띤 ‘꽃’ 또는 ‘노을’ 그리고 열과 빛을 지닌 ‘등불’에 대한 집착으로 변조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애상성은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김기림과는 다른 참신한 기법 아래 농도 짙은 서정성을 지닐 수 있었다는 데서 그의 시의 한 강점이라 할 수 있다.
김광균의 시는 어느 것이나 한 폭의 산뜻한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매우 비사실적이고 작위적인, 시인의 주관적 감정에 의해 채색된 풍경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리움, 비애 등의 감상과 연결된 현란한 수식어들이다. 이러한 수식어들이 만드는 시각적 이미지들은 결국 산뜻한 눈요기로서의 풍경만을 연출할 뿐, 내면의 구체적 경험과 연결된 감동의 세계에 연결되지는 못한다. 그는 분명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과 그 속의 도시인의 방향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으나, 시 속에 그려진 현실이란 추상적 공간일 뿐 역사적 현실은 아니다. 그의 시 속에는 특이하게도 봉건적 질서를 파괴한 현대 문명의 여러 사물들과 봉건적 감정의 유물인 슬픔, 한탄 등이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
김광균은 도회적 소재와 공감각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했으며,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을 시도한 점 등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감각적인 언어를 통해 온건하고 차분한 회화적 이미지를 즐겨 썼다.
▶‘시는 하나의 회화(繪畫)다’라는 모더니즘의 시론을 그대로 실현한 시인으로, 흡사 그림을 보듯 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시를 썼으며, 그는 다만 풍경을 시화(詩化)할 때만 시각적 심상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연금술사와 같이 모든 무형적인 것을 일정한 형태로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시풍에서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볼 수 있으나, 급진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퍽 온화하고 주정적인 경향을 보여 주며, 회화적인 수법으로 도시 소시민층의 감정을 따뜻한 서정으로 감싸는 특징을 보인다.
▶불안정한 현실에서 형상으로 고정된 단절세계로 도피한 시의 기저에는 짙은 절망과 우수(憂愁)가 깔려 있다.
그의 시풍은 한국 전통적 서정시의 바탕에 일차적으로 영미의 이미지즘을 접목시켰으며, 이탈리아의 미래파,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수용했다. 그는 김기림,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의 시를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직접적으로는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의 음악성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특히 김기림이 지적했듯이,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 쓴 이미지즘 계열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적 소재를 바탕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나 강한 색채감,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 등의 기법을 시에 차용하였으며, 특히 사물의 한계를 넘어 관념이나 심리의 추상적 차원마저 시각화시켰다.
그의 시 속에는 기계 문명의 황량함을 바탕으로 소시민적 서정과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감과 삶의 우수와 같은 정서가 깃들어 있다
그의 시는 자신이 꾸며낸 세계와 상상력에 의한 사물 제시보다 정서적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시적 구조에 있어 공간성을 긍정하고 도시 문명의 혼란 속에서 현대성을 찾는 시어를 사용한 특징을 가진다. 특히 본격적인 의미의 모더니즘 시보다는 독특한 의미의 이미지즘 시를 보여주었는데, 그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간적 형식의 탐구로 현대 문명이 음악적 본질보다는 회화적 본질, 즉 추상보다는 구체, 청각보다는 시각으로 조직된 까닭에 문명의 탐구는 공간적 이미지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시에서 이러한 공간성은 자연과 문명 등 시간적·지리적으로 단절된 이중구조로 나타난다.
둘째, 대상을 시각적ㆍ회화적 이미지로 한정해야만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색채감각어를 자주 썼다. 이미지를 감각적 형태에 응결시키고 사물 자체를 직접적으로 정밀하게 한정하는 태도는 서구 이미지즘 시의 창작원리를 따른 것이다.
셋째, 그는 감상적 정서의 표출로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나타나는 낭만주의적 감상이 아닌, 객관화되어 특정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감상성은 주로 회복되지 않는 과거 및 실향의식으로 나타나 단절된 역사의식이나 현대 문명에 대한 소외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적 체험과 동떨어진 몽롱한 분위기를 강조해 모더니즘의 미학적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과거와 현실 사이의 불연속, 단절감에서 비롯된 감상성은 시 구조상 이질적인 공간 구조를 형성했지만 T. E. 흄이 제시한 불연속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있다. 또 문명비판의 태도 역시 전통과 역사의식에 의거한 문명의 재생을 바탕으로 하는 T. S. 엘리엇의 문명관과 다르게 소외의식만을 강조한 것은 모더니즘 시로서 그의 시의 한계였다.
한국문학에서 모더니즘 지향과 전통 지향의 두 갈래를 추출해 낼 때 1920년대의 프로문학 열도(熱度)가 식은 후의 1930년대는 모더니즘 운동이 그 극에 달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김광균은 그 대표적 시인의 하나로 꼽힐 수 있다.
1930년대의 모더니즘이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를 표방하는 이미지즘 내지 주지주의(主知主義) 계열과 다다이즘 계열로 나눌 수 있다면, 김광균이 전자에 속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가 김기림(金起林)의 말처럼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조(材操)’를 가지고 주지적 시를 써 내는 시인이었고, 또 ‘소리 없는 흐느낌’을 사람들이 깨쳐들게 한 시인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회화적(繪畵的) 시의 공과(功過)는 엄밀한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중략)
김광균의 가장 큰 공로는 시에 회화성 (繪畫性)을 도입한 것이며, 특히 그는 청각적인 것조차 시각화시키는 공감각 (共感覺)을 처음으로 의도적인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그의 극단적인 회화성은 구체적 사물은 물론이요, 관념이나 심리적 사상까지도 그림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시점은 현대 도시에 거주하는 소시민(小市民)의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이며, 안일주의적(安逸主義的)인 것에 머무를 뿐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현대적 사물들은 그의 슬픈 마음에 부딪쳐 그의 주저와 회한을 묘사하는 한 도구가 되고 있을 뿐, 그의 감정상의 갈등이나 세계 인식의 고뇌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다. 즉 현대 도시의 여러 대상들을 시 속에 끌어들여 새로운 회화적(繪畵的) 시의 가능성만을 보여주고, 시작(詩作)을 청산(淸算)한 것이다. 일종의 센티멘털리즘에 멈추고 만 것이다. _ 김윤식 : <한국현대문학명작사전>(일지사.1982) –
소탈한 성격과 늘름한 표정을 지니고 청산처럼 묵직한 인상을 가진 김광균은 예리한 그의 작품과는 달리 매우 중후한 맛을 풍기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해방 전에 오랜 은해생활을 하면서 1939년에 <와사등(瓦斯燈)>, 1947년에 <기항지(寄港地)> 등의 시집을 발간하여 당시의 시단(詩壇)에 놀라운 충격을 주었다. 그림보다 섬세한 시의 구성은 감정을 회화적 수법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기능을 가진 시인으로서 서정주ㆍ김동리와 더불어 [시인부락(詩人部落)]의 동인 활동을 거쳤다.
해방 후에는 <은수저> 등의 작품을 썼으나, 6ㆍ25 후에는 시작세계(詩作世界)를 떠나 기업계(企業界)에 투신했다. 김광균의 주지시(主知詩)의 세계를 보면, 시작(詩昨)을 하는 데 있어서 먼저 세밀한 언어의 선택과 배열과 배합을 조회시켜 그 의미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인식한 다음, 시어(詩語)에 대한 깊은 주의력을 쏟으면서 지적 감각을 형상화하는 데 누구보다도 두드러지게 성공을 했다. 특히 그는 회화적(繪畵的) 수법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양립시키면서 공존의 세계까지 끌고나가 심화시킨 시적 진실이 선명하여 언어 경제에 탁월한 시인임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일상용어가 현대어로서 시어화(詩語化)할 수 있는 길을 다졌으며, 언어가 각기 의미와 중량과 감각ㆍ청각ㆍ시각에 이르기까지 음양ㆍ광형(光形)ㆍ음률의 섬세하고 정밀한 식별과 인식으로써 구상하고 있다. 또한 현대적 언어에 있어서도 지적 감성에 의한 현대적 의미를 가진 언어를 선택하여 독특한 결합으로 말의 향기와 맛을 구축한 사인이다.
그의 작품으로 인해서 1930년대의 한국 자유시는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는데, 그가 시단에 나오기 이전의 한국시의 대부분은 기계적인 리듬과 시조(時調)와 창가(唱歌)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김광균은 구속적인 재래의 시의 기법과 세계를 넘어서서 일상용어와 대화어(對話語)를 그대로 시에 사용하여 현대시의 길을 다져놓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와사등>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일상용어가 이 작품에서 시어화(詩語化)한 다음 또 다른 의미로 표출되어 있으며, 1930년대에 있어 어느 시인의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시어의 놀라울 만한 배열과 배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감각이 물씬 풍겨오는 시어들이 싱싱한 바닷고기의 약동처럼 빛나고 있다.
그리고 1030년대에 있어서 자기의 시작법을 명확히 세워놓고 시작(詩作)을 한 시인이 드물었는데, 김광균은 자기의 독특한 작시법(作詩法)을 가지고 시작)詩作)을 했다. 김기림(金起林)은 <시론(詩論) – 시의 모더니티>에서, ‘시라고 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외부적 또는 내부적 감성에 의하여 충격되었을 때의 그 마음의 비상성의 표현이다. 그것이 독자의 의식면에도 거의 같은 진폭을 가진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김광균은 이러한 구체적 현실을 지성적인 주지주의의 시관 (詩觀)에 입각하여 시각적인 회화의 세계로부터 청각의 세계에까지 의인화 (擬人化)하고 있다. 그리하여 즉물적 (卽物的)이고 탐구적이고, 개성적인 인생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소재와 위상과의 관련을 표출하는 데 탁월한 조화력의 비법을 가진 시인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최일수 (崔一秀)는 <모더니즘의 백서 (白書)>란 비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지적인 경향은 곧 전체적이고 개관적인 사물과 소재에 대한 시적 (詩的) 시화 (詩化)를 의미한다. 이렇게 새로운 시 운동이 일어난 원인은 김광균 시인 이전엔 너무 안일하고 틀에 박힌 언어의 배열에 대한 반동반시적 (反動反視的)인 데서 온 것이다.
주지적 세계로 이끄는 동안 한국의 주지파 시인들의 시적 모험으로 새로운 정신 상태를 구축해 놓았다. 여기에 김광균 시인은 1930년대의 한국의 현대 시단을 대표하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시 작품을 가진 시인이다.“
이처럼 김광균은 자기의 독특한 주지주의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지시에도 재래의 서정시에서보다도 한결 풍부한 정서를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추일서정 (秋日抒情)>이란 시를 보면, 무형적 (無形的)인 자연을 한층 갚은 곳에서 유형으로 표상해 낸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명한 원색 감정을 주지적 시법으로 서정화하고 있다.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라는 결구(結句)는 앞 구의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처럼 표현한 추일 (秋日)의 서정 (抒情)과 더불어 어떠한 서정시도 이렇게까지 정감(情感) 짙게 표현한 적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김광균은 청신한 시각과 청각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문화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시작 (詩作)을 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의적 (情意的)인 지성이 종합되고 조화가 이루어진 즉물적(卽物的)이고 객관적인 지성의 발로에서 오는 것이다, _ 김해성 (金海星) : <한국현대시문학개설> (을유문화사.1978)
○ 업적
1930년대 후반 모더니즘적 기법을 도입, 정착시키는 데 기여함.
– 국문학사상 위치
1930년대 이미지즘의 시작 (詩作) 방법을 받아들여 모더니즘 시론을 실천하여 문단에 참신한 기풍을 일으켰다.
– 주요 경력
▷1914년 1월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는 포목도매업을 하는 사업가였다. 원종 제1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12세 때 아버지가 사망해 가세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13세 때 중외일보에 시 <가신 누님>을 실음.
▷1926년 개성 송도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친우들과 함께 등사판 동인지 [유성]을 발간.
▷1930년 시 <야경차>를 동아일보에 투고하여 발표.
▷1932년 송도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무 사원으로 입사해 군산에서 근무 시작.
▷1935년 김선희와 결혼하고 이 당시에 김기림과 처음으로 만나 교유.
▷1936년 서울 용산으로 발령이 나 거주지를 옮기고 많은 화가, 소설가, 시인 등과 교유 관계를 가짐.
▷1937년 이육사, 신석초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1938년 25세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경성고무 사직.
▷1939년에 제1시집 <와사등>을 간행. 이 시집에는 <성호부근> <와사등> <외인촌> 등의 초기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도심 지대> <추일 서정> 등의 작품을 계속 발표.
▷1947년 제2시집 <기향지> 출판.
▷1950년 전쟁 중에 동생이 북괴의 공작원에 체포돼 납북되자 동생의 사업체를 인수하여 경영하기 시작. 이후로 시 활동은 왕성하지 못함.
▷1959년 실업계로 진출해 국제상위 한국위원회 감사, 한일경제특위 상임위원 등을 지냄.
▷1960년 무역협회 부회장에 취임. 성북동으로 이사.
▷1969년 문단 고별시집 <황혼가> 간행.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취임.
▷1982년 69세 때 [현대문학]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중단했던 시 창작 활동을 재개.
▷1984년 건강악화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남.
▷1988년 김기림기념사업회 회장.
▷1993년 뇌졸중으로 사망.
○ 저작
– 평론
<경향파와 모더니즘 이 시대의 성격과 정신>(조선일보.1928.1.1.∼3) <개인의 소감-저술가와 출판가에게>(중외일보.1930.3.5.) <‘아귀도’의 전망-개조사 현상 장혁주씨의>(조선일보.1932.5.4.∼5) <문단과 지방>(조선중앙일보.1934.3.4.∼5) <작가연구의 전기-신예작가의 소묘>(조선중앙일보.1934.5.2.∼9) <김기림론>(풍림.1937.4) <오장환 시집 ‘헌사’>(문장.1939.9) <시단의 현상과 희망.(조선일보.1940.1.13.∼17) <서정시(抒情詩)의 문제>(인문평론.1940.2) <시인의 변>(중앙신문.1946.1.28.∼30) <시와 민주주의>(중앙신문.1946.3) <시문학의 수정>(현대일보.1946.4.23.∼27) <‘바다와 나비’ 서평.(서울신문.1946.5) <에세-닌 시집 서평>(서울신문.1946.6) <문학 출판의 성과>(예술신문.1946.7) <근대주의와 회화(繪畵)>(신천지.1946.9) <노신의 문학 입장>(예술신문.1946.10) <문학의 위기: 시를 중심으로 한 1년>(신천지.1946.12) <시단의 두 산맥>(서울신문.1946.12.3.) ,문학청년론>(협동.1947.3) <문학평론의 빈곤.(서울신문.1947.3.4.) <전진과 반성-시와 시형에 대하여>(경향신문.1947.7.27.∼8.3) <시의 정신-회고와 전망을 대신하여>(새한민보.1948.2)
– 시
<가는 누님>(중외일보.1926.12.14.) <옛 생각>(조선일보.1927.11.19.) <병(病)>(동아일보.1929.10.19.) <야경차(夜警車)>(동아일보.1930.1.12.) <실업자의 5월>(대중공론.1930.7) <소식>(음악과시.1930.8) <소식>(음악과시.1930.8) <창백한 구도>(조선중앙일보.1933.7.22.) <해안과 낙엽>(동아일보.1933.11.19.) <그날 밤 당신은 마차를 타고>(조선중앙일보.1934.2.7.) <파도 있는 해안에 서서>(조선중앙일보.1934.3.12.) <어두워오는 영창에 기대어>(조선중앙일보.1934.3.28.) <부두(埠頭)>(동아일보.1934.7.25.) <여름>(동아일보.1934.7.25.) <풍경화-No 1 호반에서>(조선중앙일보.1934.12.9.) <금풍(琴風)의 계절>(조선중앙일보.1935.4.8.) <황혼보>(조선중앙일보.1935.4.19.) <사향도-정거장⋅목가⋅교사의 오후>(조선중앙일보.1935.4.24.) <사향도-동무의 무덤⋅언덕>(조선중앙일보.1935.4.26.) <오후의 구도>(조선중앙일보.1935.5.1.) <석고의 기억(記憶)>(조선중앙일보.1935.7.3.) <외인촌(外人村)>(조선중앙일보.1935.8.6.) <해바라기의 감상>(조선중앙일보.1935.9.12.) <사향(思鄕)>(조선중앙일보.1935.9.13.) <벽화(壁畵)>(조선중앙일보.1935.9.26.) <창백한 산보>(조선중앙일보.1935.11.22.) <고도의 기억>(조선문단.1935.12) <향수의 의장(意匠)>(조선중앙일보.1936.1.16.) <고궁비(古宮碑)>(조선중앙일보.1936.2.3) <지등(紙燈)>(조선중알일보.1936.2.29.) <이원(利原)의 기억(記憶)>(조선중앙일보.1936.4.10.) <산상정>(조선중앙일보.1936.4.14.) <장미와 낙엽>(조선일보.1937.1.28.) <황혼화원>(풍림.1937.1) <강협과 나발>(풍림.1937.3) <산풍난림(散風亂林)>(풍림.1937.4) <월광곡(月光曲)>(조광.1937.5) (조광.1937.7) <다방>(조광.1937.9) <화속화장>(조선일보.1937.5.9.) <밤비와 보석>(풍림.1937.5) <성호부근>(조선일보.1937.6.4.) <대화>(자오선.1937.11) <설야(雪夜)>(조선일보.1938.1.8.) <공지>(비판.1938.5) <와사등(瓦斯燈)>(조선일보.1938.6.3.) <풍경(風景)>(비판.1938.7) <광장>(비판.1938.9) <소년>(비판.1938.9) <흰 구름에 부치는 시>(여성.1939.1) <등>(비판.1939.2) <정원(庭園)>(비판.1939.2) <뎃상>(조선일보.1939.7.9.) <조화>(시학.1939.10) <도심지대(都心地帶)>(인문평론.1939.12) <도심지대(都心地帶)>(인문평론.1940.4) <향수(鄕愁)>(인문평론.1940.4) <눈 오는 밤의 시>(여성.1940.5) <추일서정(秋日抒情)>(인문평론.1940.7) <황량(荒凉)>(문장.1940.7) <백화점>(조선일보.1940.8.8.) <수철리(水鐵里)>(인문평론.1941.1) <장곡천정(長谷川町)에 오는 눈>(문장.1941.3) <단장>(춘추.1941.5) <야차(夜車)>(조광.1942.1) <대낮>(조광.1942.1) <일모>(춘추.1942.5) <비>(춘추.1942.6) <녹동묘지(綠洞墓地)에서>(조광.1942.12) <반가(反歌)>(조광.1942.12) <상여를 보내며>(학병.1946.3) <복사꽃과 제비>(서울신문.1946.5.5.) <영미교(永美橋)>(신문학.1946.7) <은수저>(문학.1946.7) <비풍가(悲風歌)>(民聲.1946) <구의리(九宜里)>(금융조합.1946.10) <노신>(신천지.1947.3∼4) <상여를 쫓ㅌ으며: 여운형 선생의 장례>(우리신문.1947.8.3.) <황혼가>(새한민보.1947.8.15.)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곡배인철군(哭裵仁哲君)>(신천지.1947.10) <비랑신년>(자유신문.1948.1.1.) <기적⋅승용마차>(서울신문.1948.1.27.) <반가(反歌)>(현대문학.1957.11) <안방>(한국일보.1967.11.25.) <제당(霽堂)이 가시다니>(현대문학.1968.11) <목련(木蓮)>(세계의문학 2.1976.12) <목련>(세계의문학.1976.12) <편지-박재륜에게>(소설문학.1987.1) <추일서정>(한국문학.1987.2) <일기>(문학사상.1987.4) <혹설>(동서문학.1987.5) <11월의 노래>(문학정신.1988.5) <무료일일>(동양문학.1988.9)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곡 배인철군>(창작과비평.1989.3) <우수송>(현대시학.1989.7) <가을바람의 노래>(문학사상.1989.10)
– 소설
<조가(弔歌)>(조선중앙일보.1935.5.6.∼24)
– 수필
<문학청년론>(금융조합.1947.3)
– 시집
<와사등(瓦斯燈)>(남만서점.1939.제1시집) <기항지(寄港地)>(정음사.1947.제2시집) <황혼가(黃昏歌)>(산호장.1957.제3시집) <황조사>(산호장.1969) <와사등(瓦斯燈)>(광일문화사.1974) <세월이 가면>(근역서재.1977) <추풍괴우(秋風鬼雨)>(범양사.1986) <와사등(瓦斯燈)>(자유문학사.1987) <임진화(壬辰花)>(범양사.1989)
– 문집
<와우산(臥牛山)>(범양사.1985)
– 저서
<세월이 가면: 신인 박인환과 문학 그 주변>(공저.근역서제.1982)
참고 =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