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2월 21일, 중국 지도자•6대 주석 후진타오 (胡錦濤, 1942 ~ ) 출생
후진타오 (胡錦濤, Hú Jǐntāo, 1942년 12월 21일 ~ )는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을 역임했다.
– 후진타오 (胡錦濤)
.출생: 1942년 12월 21일, 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
.정당: 중국공산당
.부모: 후 징즈, Li Wenrui
.배우자: 류융칭 (1970년–)
.자녀: 후하이펑, 후하이칭
* 중국공산당의 제8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임기: 2002년 11월 15일 ~ 2012년 11월 15일
.전임: 장쩌민 (7대) / 후임: 시진핑 (9대)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6대 국가주석
.임기: 2003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전임: 장쩌민 (제5대) / 후임: 시진핑 (제7대)
후진타오는 이른바 “과학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한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과학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한다.
2007년의 중국 공산당 제17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 생애 및 활동
후진타오는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차(茶)를 판매하는 상점의 집안이였던 아버지 후쩡위 교사는 일본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으로 가문의 재산을 모두 잃고, 초등학교 교사로 상하이에서 일하던 중 어머니 리원뤠이를 만나게 되었다.
후진타오는 그 부부의 아들로 1942년 12월 21일 전쟁 중에 태어났다.
1947년 아버지가 장쑤성에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1947년 8월 후진타오는 따푸 소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해 어머니의 별세와 교사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매진하였다.
– 직장경력
칭화 대학교에서 수리공학을 공부하였으며,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일체의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아 혁명의 광풍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 수력발전소에서 노동자로 근무를 시작하여 기술자, 정치인을 거쳐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 정치경력
덩샤오핑은 국가 주석직과 당수직과 군권을 분할하되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의 집행자로 군림하였으나, 2002년 장쩌민으로부터 당 총서기직을 넘겨받아 당권을, 2004년 9월에는 국가 주석직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겨받아 공식적으로 정권과 당권,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 퇴임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공산당 총서기 직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시진핑에게 넘겨주었으며, 국가주석 직에서도 2013년 3월 퇴임하였다.
많은 관측자들은 후진타오도 전임 장쩌민처럼 인민해방군 통수권을 가진 직책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은 몇년 더 유지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실히 심어놓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중앙군사위 주석 직까지 시진핑에게 이양하고 퇴임했다.
– 업적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을 토대로 중국 내 자본가들을 잇따라 중국공산당 내로 끌어 들였으며 중국 내에서 이른바 제2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던 천산 고속도로의 공사를 마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2010년 11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제치고,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에 선정되었다.
○ 약사
1942년 12월 21일 – 중화민국 장쑤 성 타이저우 시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타이저우 시) 태생 (호적은 안후이성)
1956년 7월 – 장쑤 성 타이저우 시 제2초급 중학 (중학교) 졸업.
1959년 7월 – 타이저우 중학 (고교) 졸업.
1964년 4월 – 중국 공산당에 입당.
1965년 7월 – 칭화 대학 수리 공학과 졸업, 대학교 졸업 후 첫 직장인 수력 발전소에서 기사로 활동.
1974년 – 간쑤성 건설위비서
1975년 – 간쑤성 건설계관리처 부처장
1980년 – 간쑤성 건설위 부주임
1982년 2월 – 공청단 (공산주의 청년단) 간쑤성위 서기
1983년 8월 – 공청단 중앙서기처서기, 공청단주석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4년 11월 –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 서기 제1서기로 취임.
1985년 7월 – 구이저우성의 공산당 위원회의 서기에 임명.
1985년 9월 –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승진.
1988년 12월 – 티베트 자치구의 공산당 서기로 취임.
1989년 3월 7일 – 라싸에 계엄령을 선포.
1990년 10월 – 티베트 군구 제1서기의 겸임으로 임명.
1992년 10월 – 중국 공산당 제14회 전인대에서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이러한 후진타오의 발탁이 진행되어 21세기의 리더의 하나로서 위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1993년 – 중앙당 학교장 역임.
1997년 9월 – 중국 공산당 제15회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 위원으로 재선.
1998년 3월 –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국가부주석으로 선출.
1998년 4월 – 한국 방문,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
1999년 9월 – 중앙 군사 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되어 겸무하였다.
2002년 11월 15일 – 중국 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제1회 전체 회의에서 총서기로 선출됨.
2003년 3월 – 제10기 전인대 제1회 회의에서 국가 주석으로 선출됨.
2004년 9월 19일 – 중국 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제4회 전체 회의에서 당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하여 당, 국가, 군을 장악하는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2005년 3월 13일 –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
2005년 11월 – 한국을 방문,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 회담. APEC 정상회의 참석차 부산을 방문.
2006년 4월 – 미국을 공식 방문.
2007년 10월 22일 –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회 전체 회의에서 총서기로 재선출 (2기)
2008년 –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도 재선되었다. 후진타오는 일본과의 관계강화에 적극적이었던 자오쯔양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어 대일 관계 개선에도 전향적으로 나서고 있다.
2008년 5월 – 일본을 공식 방문하여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였다.
2008년 8월 – 대한민국을 방문,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 정책과 업적
– 과학적 발전관
과학적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사회와 조화를 이루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과학적 통치 체계를 말하며 불균형한 성장을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과학적 발전관이 제기된 것의 배경은 개혁, 개방 이전의 정치와 경제, 국제관계를 비판하고, 개혁, 개방 이후의 국가발전의 동력을 과학기술 및 사회적 균형의 증진에 둔 것이다. 과학적 발전관은 후진타오 지도부가 일관되게 진행한 중요한 전략 사상이었고, 후진타오 및 그의 싱크탱크로부터 집권 초기인 2004년에 공개되었다. 경제성장 일변도를 관철하였던 덩샤오핑, 장쩌민 시대로부터 부분적인 궤도 수정이 도모되는가에 대해 주목을 받았다. 2007년의 중국공산당 제17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의 중요한 전략 사상으로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대표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 팔영팔치
2006년 3월, 중국 인민들이 해야 할 여덟 가지의 일과 해서는 안 될 여덟 가지의 일을 고시로 표현한 팔영팔치를 제시하여, 경제발전 이후 불거진 양극화 문제와 개인주의의 확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국심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 조화로운 사회 건설
2005년 3월의 전인대 이후, 후진타오 지도부는 “조화로운 사회 건설”의 건설을 강조하였다. 현재, 중국에는 경제발전의 이면에, 빈부의 격차, 치안, 실업, 부패 등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생활고 및 토지수용이나 독직 등 당국에의 불만으로부터 중국 각지에서 데모와 폭동이 빈발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러한 사태의 악화를 염려하며, “조화로운 사회”의 건설을 중요과제로서 제기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부의 재분배 시스템을 확립하고, 빈부의 격차의 해소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이해에도 저촉하기 때문에, 그 실현에는 곤란이 뒤따르기도 했다. 조화로운 사회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인문학적 시야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외교
그는 임기 동안 대한민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는데 그 중 2005년에 APEC 정상회담을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방문하였고 노무현 대통령(당시)에게 시베리아 호랑이 1쌍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에 방한을 하여 이명박 정부에게 따오기 1쌍을 기증하기도 했다. 현재 경상남도에서 번식을 추진하여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한 바가 있는데 한 번은 북과 합작으로 만든 유리 공장을 방문했다.
○ 재임 중 주요 사건
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
2008년 쓰촨 대지진
2008년 중국산 유제품 멜라민 오염사건
2009년 7월 우루무치 소요 사태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