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년 1월 9일, 금나라가 개봉을 점령하여 흠종을 비롯한 황족들이 금나라로 압송됨에 따라 북송 (北宋, 960 ~ 1127) 멸망
북송 (北宋, 960년 ~ 1127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이다. 조광윤 (趙匡胤)이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의 공제 시종훈에게서 선양을 받아 개봉 (開封)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이다. 국호는 송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개봉에서 쫓겨나 남하한 뒤에는 남송과 구별하여 북송이라 불리었다. 북송은 한족(漢族)들이 세운 당나라를 계승한 국가이며 남송과 더불어 송, 송조 (宋朝)라고 한다. 거란은 송의 왕성을 차용하여 송나라를 지아우이 구르 (趙國, 거: ʤiauɡu-i ɡur)라고 불렀다.
○ 역사
후주의 전전도점검 (殿前都点検; 근위대장)이었던 조광윤이 후주 최후의 황제 공제 (恭帝)에게서 선양을 받아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남은 10국을 정복하여 분열상태의 중국을 재통일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다. 뒤를 계승한 이는 동생 조광의 (趙匡義)였는데, 이 계승에 관해서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촉영부성(燭影斧聲)라는 의혹의 말이 퍼졌었다. 태종 (太宗)이 된 조광의는 형의 사업을 물려받아 중국 통일을 이루고, 과거 제도의 충실을 노렸다. 과거 제도는 태종의 아들 진종 (眞宗)의 대에 완성되었다.
과거 제도의 확립은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과도한 문관 대우로 인해 군사력의 쇠퇴를 불러왔다. 1004년 북쪽의 요나라가 남하하여 송을 침공하였다. 진종은 전주로 친히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요에게 매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 (전주를 전연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이 조약을 ‘전연의 맹약’이라 한다). 또 요의 침공과 동시에 서쪽의 탕구트족은 서하를 건국하고 송에 반기를 들었으나, 이것도 1044년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화의했다 (경력의 화약).
이 맹세로 인해 평화를 얻은 송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배경으로 높은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에는 회화, 도자기, 한시 등 여러 분야에서도 중국 역대에서도 최고봉이라 칭해지는 작품이 적지 않게 있다. 또 경제 발전과 함께 일반 백성의 경제력도 향상되어 수도 개봉에는 밤이 없을 정도로 활기가 끊이지 않았고, 도시에서 자유롭게 시장을 열어 도단에서는 강담 및 예술인이 시민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했다.
또 후세에 이르러, 요와 서하 (후에 남송시대의 금도 포함)에 재물을 바쳐 평화를 얻은 것을 재정 별 및 민족주의적인 측면에서 비난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것으로 인해 요 및 서하의 지배 계층을 추락시켜 상대국의 군사력 약체화를 초래한 것도 있고, 견직물 및 도자기, 차등을 애호하는 습관이 이들 여러 나라의 사회 전체에 널리 퍼뜨려 수입량이 증가하여 바쳐진 재물을 상회하는 재물이 송 측으로 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어, 결과적으로 송의 경제력 강화와 연결된 측면도 있다.
- 신법-구법의 다툼
그러나 이 경제적 발전의 이면에는 사회적 모순도 진행되어 민중들 간의 경제적 격차는 매우 커지게 되었다. 또한 요, 서하에 대한 방어에 사용된 군사비가 국가재정에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었고, 그 외 대상인, 대지주의 세수 (稅收)의 감소는 무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어, 어떻게든 개혁이 요구되었다.
6대 황제 신종 (神宗)은 왕안석 (王安石)을 등용하여 국정개혁에 나섰다. 이 움직임을 신법, 왕안석의 신법이라고 불렀다. 이 신법은 주로 영세 농민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억제를 목표로 한 것이기에 신법은 지주, 상인세력과 그곳 출신인 관료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반대파들을 가리켜 구법파 (舊法派)라고 불렀다.
이 신법파와 구법파의 다툼은 나날이 격렬해져 갔다. 신법파의 왕안석에 대해 구법파의 대표자는 사마광 (司馬光)이었다. 이 두 사람이 살아있던 기간에는 당파의 다툼은 높은 이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당리에 의한 이념 다툼으로 추락했다. 신법파가 이기면 구법파의 관료는 한꺼번에 중앙에서 멀어졌고, 법률을 모두 개정하였지만, 그 후에 구법파가 득세할 때에는 오히려 반대의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다툼은 국가 체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서서히 송의 국력은 기울어져갔다.
- 멸망
8대 황제 휘종(徽宗)은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군주로써, 그의 회화는 북송시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제로써 한 일은 채경 (蔡京), 고구 (高俅), 이언 (李彦), 동관 (童貫) 등 황제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측근들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예술을 위해 거대한 정원석 및 정원목을 먼 남쪽에서 운반하는 데 거액의 국비를 사용하고 (화석망),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신법을 이용하여 증세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민중반란이 빈발하고, 군대는 이들을 진압하기에 바빴다. 이 시기 반란중 한 가지에 힌트를 얻어 이야기를 부풀리고, 강담으로써 널리 퍼져, 후에 이것을 집대성한 작품이 바로 『수호전 (水滸伝)』이다.
이때 북쪽의 숙적이던 요는 중국 동북지방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진족은 요의 착취에 대항해 부족이 단결하여 1115년 스스로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금이었다. 이 여진족을 주목한 송 정부는 금에 대해 공동으로 요를 공격하자고 약속하였다 (해상의 맹세).
1121년 연운십육주의 일부를 되찾았으나, 반환 전에 연운십육주 전 지역은 금나라의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북방으로 강제 이주 당했기에 당분간 이 지방에서 세수를 바라지는 못했다. 이 금에 대항하기 위해 요의 잔당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금의 분노를 사게 되어, 1127년 개봉을 함락당하고, 여진족들은 황제 흠종, 상황 휘종을 북쪽으로 연행해 갔다. 이것을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후 여진족의 금나라는 북송을 정복하였다. 흠종의 동생이었던 조구가 남쪽으로 도망쳐 항주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지형 및 기후 관계로 금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던 회하 이남의 땅을 확보하여 송을 재흥하였다. 이때부터 송을 남송이라고 불렀다.
○ 정치
- 문치주의
오대십국 시대의 병란까지 이르는 것을 본 태조 조광윤이 세운 송 왕조는 각지의 유력자 세력을 전시 (殿試)를 실시하는 등, 과거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해 명실 공히 문신 관료체제가 완성의 영역에 도달하였다. 진나라 이전, 오호십육국 시대, 남북조 시대, 오대십국 시대의 군웅 할거 상황은 이 이후 중화 왕조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송 시대의 지배체제는 당 (唐) 시대의 귀족층이 오대십국의 병란을 통해 몰락한 후, 사대부 (士大夫)라 불리는 새로운 계층이 중심이 되었다. 사대부는 교양을 지닌 부유한 시민이라는 뜻을 가진 존재로써 학문을 쌓고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으로 귀족이란 혈연에 의해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합격자를 배출해 현관으로 오르는 일이 주위의 존경을 모아, 지방의 간판 같은 존재가 되어 재산을 쌓았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재산을 쌓을 수 있는 출세한 인간이 이 일족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존경은 받지 못하고, 재산도 이윽고 소멸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황제가 이러한 사대부 출신의 관료를 수족으로 사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한 체제는 ‘황제전제’, ‘군주독재’라고도 칭하였다. 다만 또 한편으로는 진종의 사망 후, 어리고 병약한 황제가 차례로 즉위하고, 송 황실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황제의 직무를 대행하여, 정치를 안정시킨 일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대부 층은 관료이면서 동시에 지주, 대상인 이었기에 모든 문화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 이후 중국에서 다음 원나라 시대를 제외하고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거의 사대부로 제한되었고, 그 외로는 누르하치를 비롯한 왕조 창설기의 인물과 그 주위에 있던 존재로써 이자성, 홍수전이라 말 할 수 있는 반란 지도자들뿐이었다.
- 과거제도
수나라 문제에 의해 시작된 과거 제도였으나, 과거가 진정한 의미로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은 송 시대라 말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과거를 통과하더라도 귀족층의 방해를 받아, 몇 년이 지나도 관직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한유 (韓愈)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송 시대에는 귀족층의 몰락으로 인해 이러한 일은 없었다.
송 시대에서의 과거제도의 주요 변경 점으로 즉 전시를 시작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이때까지는 지방에서 1차 시험으로 실시한 해시 (解試), 중앙에서 2차 시험으로 실시한 회시 (會試)의 2종류가 있었는데, 이들 시험 위에 황제의 눈앞에서 실시한 전시를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전시에 의해 낙제한 사람도 있었으나, 낙제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없었다. 또 그때까지 많은 수의 과거 과목 (교과의 일은 아니고, 수험코스)을 진사 (進士), 명법 (明法)등으로 나뉘었으나, 신종시기에 진사과 하나로 만들었다. 이 이후로 과거의 합격자를 진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과거제도에 있어서 매년 시험관이 그 해 합격자와 사제관계를 맺어 이것이 관계 (官界)에 관련된 인맥의 기초가 되었다. 낙제자가 없었던 전시가 존재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기에, 황제와의 사이에서 사제관계를 맺는 일이 황제의 직속 관료라는 의식을 생겨나게 하였다.
송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과거가 성행하던 시대여서, 거의 3년에 1번 시행되었고, 1회에 약 3 ~ 400명이 합격하였다. 그 중에는 수석 합격자를 가리켜 장원 (状元)이라고 불렀다.
송 시대에는 그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개인이 국가를 책임지려는 기개가 보였다. 신법, 구법의 다툼에서도 그 기개가. 그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의해 실력으로 지위를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송 시대를 통해 관료와 관료 예비군인 학생들의 세력은 매우 강해져, 학생들의 운동에 의해 재상이 탄핵을 받은 일도 있었다.
- 관료제도
송 시대 관료제도는 북송의 원풍(元豊)년간을 경계로 크게 변화하였다. 송 초기 원풍개혁 때까지는 오대의 영향을 크게 받아, 당 제도에 의거한 관명이 기록관 (寄禄官; 봉급표, 俸給表)로 변화해 실제 직함을 표시하지 않는 등, 당 제도 및 명, 청 시대의 관료체계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육부 (六部)의 시랑 (侍郞) 및 원외랑 (員外郞)은 실제로는 육부의 일을 하지 않고, 봉급의 단계를 표시하는 데 쓰였다. 이 시대의 관료 제도를 간단하게 서술한다면 아래와 같다.
중앙관제는 형식상 예부터 내려온 삼성육부 (三省六部), 구사 (九寺), 오감 (五監)을 유지하였다. 그 중에 중서성 (中書省)이 문하성 (門下省)의 권한을 흡수하는 형태로 권한이 집중화된 재상부 (宰相府)가 있었고, 재상은 동중서문하평장서 (同中書門下平章事)라고 불리어, 1명이 아닌 3명이 선택되었고, 부재상으로써 참지정사 (参 知政事)가 여러 명 선택되었다.
재상부는 민정을 담당하고, 군사를 담당한 것은 추밀원 (枢密院)이었다. 추밀원의 장관 추밀사 (枢密使)와 부장관 추밀부사 (枢密副使)에 참가정사를 합쳐 집정 (執政)이라 불렸고, 재상과 집정이 전체의 정무를 맡았다.
행정기관인 육부, 구사, 오감이 있으나, 이들은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이 없었고, 대신하여 실제 행정을 맡았던 사직 (使職)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다.
삼사 (三司) – 재정을 담당.
어사태 (御史台) – 관료를 감찰.
심사원 (審官院) – 인사담당.
태사예의원 (太常礼儀院) – 제사담당.
심형원 (審刑院), 형부 (刑部), 대리사 (大理寺) – 재판담당.
등의 관직이 담당했다.
예부터 내려온 관직명은 일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그 일이 단계에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당나라 시대의 삼품 (三品)의 위라는 것이 구품 (九品)의 아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지방관제에 의거한 최대 행정구분으로 로 (路)가 있고, 그 아래에 부 (府), 주 (州), 군 (軍), 현 (縣)이 존재했다. 주의 장관은 지 (知)~주 (州; ~의 부분에는 주의 이름이 들어간다)라고 불렸다.
- 군사제도
송의 군사제도는 위병제였다. 태조는 절도사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동시에, 자신의 출신모체였던 금군을 강화시켜, 이것을 정규군으로 삼았다. 이 정책으로 인해 중앙의 힘이 강해지고, 절도사가 지방에서 할거하는 것을 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금군의 사령관에서 황제가 된 일을 교훈 삼아, 금군의 제도를 개혁하여 전군의 사령관직을 폐지하고 황제직속으로 그 하부의 존재로써 있던 장군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규군인 금군과 치중병이었던 상군이 있었고, 상비군은 북송 중기에 140만을 헤아렸다. 그러나 숫자만 많을 뿐, 실제 전투에서는 불안한 병사가 많았었다. 또한 문인중시주의로 다른 무인들은 경시 받아 그 결과 병사를 뽑는 것에 고충이 많아지게 되어, 병사들은 죄인출신자가 뽑히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대책 중 한가지로 왕안석은 보마법이라 말해지는 군제개혁안을 내놓았다. 보마법은 군마를 사육하는 일을 장려하는 것으로 보병이 많은 송군이 기병을 증가시켜 전력향상을 노리기 위해 실시한 것이었다.
- 개혁
송은 관료가 역대왕조 중에서도 가장 우대받았던 시기였다.
○ 경제
-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
당나라 시대에 내전이 자주 발발하자, 송나라는 정반대로 문치주의를 주장하며 군사력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군사, 외교적으로는 좋지 못한 행보를 보였으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송나라는 근대 이전 중국 역사상 손꼽힐 만큼 융성했다. 과거 중국 대륙은 오랜 대전쟁으로 전쟁터가 되었으나, 송나라 시대에 전 세계 무역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그 폐허를 극복하고 완전히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진화까지 했다. 상업 수도였던 개봉은 당시에만 인구가 무려 130만여명, 남송 수도 임안은 100만여명이었으며 중국의 산수화나 성리학도 이 때 기틀이 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력의 근원은 송나라가 당시만 해도 변방에 불과했던 강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선 이런 이미지를 반영하여 오나라가 ‘비옥한 강남의 토지’를 언급 하는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시기가 명나라 초기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지 실제론 고증 오류다. 후한 말 남양에서 강성한 세력을 지닌 군벌이었던 원술이 비어있는거나 다름없는 강남을 놔두고 중원에서 싸운 것도 그만큼 강남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강남에 자리를 잡은 손책과 그 뒤를 이은 손권 역시 지방 군벌로 끝났거나 독자적으로 제위에 올랐지만, 당시 한 (漢)의 천하에 군사적이거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대한 영향은 주지 못했다.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육조시대 이후로, 그것도 강북을 능가한 것은 남송 이후의 이야기이다.
- 송나라 대의 농경 발전
송나라때 드디어 강남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던 이유는 쌀에서 찾을 수 있다. 송 이전에 쌀은 주식이 아닐 뿐더러 강북에서는 자라기 힘든 작물이었다. 그러나 가뭄에 강하며 성장이 빠른 ‘점성도’ (占城稻) 품종이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와 강남 전역에 쌀 농사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쌀 농사에서 중요한 물 때문에 수차가 개발되어 계단식 논 또한 생겼다. 게다가 이앙법의 도입으로 2모작이 가능해졌다. 이런 연유로 백성들의 경제적 부가 늘어나자 상업이 발전하였고 운송업도 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숙박 시설이나 여관 수리업 등 서비스업도 발전했다. 또한 수나라 시절부터 개발한 대운하를 통해 정치 중심지 화북과 경제 중심지 강남의 교통상 연계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송은 이전 시대에 비해 강남 개발의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중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1억 명을 넘는 시기도 이 때쯤 시작되어, 화폐의 발전을 불러왔다. 그렇게 나온 것이 ‘천희통보’이나 연간 막대한 양을 찍어내도 수요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였다. 화폐 다음 거래 수단으로 어음이 지목되었다. 원거리에서 무거운 화폐 대신 어음동이를 가져가면 되니 매우 편리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가짜 어음이나, 어음을 주니 실제 가치하고 다르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1024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가 발행되었고 근대적 회계 방식인 복식부기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일본 후지와라 정권에서도 중국의 화폐를 잔뜩 배에 싣고 와 자기네 나라에서도 썼다고 한다. 나름 동아시아의 국제적 화폐였던 셈이다.
한의학에서 기존과 선을 긋는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상업 발달의 산물인 상인 동업 조합 (행, 작)도 번성했다. 도자기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차 문화가 발달해서 농민들은 차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찻집 같은 곳도 생겨났다. 예식을 대신 준비해주는 곳도 있었고 기계식 물시계가 등장했으며 시중에는 음식점 숫자가 너무 많아서 경쟁했다. 도시 내에는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극장이 존재했고, 각 가정에서는 석탄을 가정연료로 썼다.
- 송나라 대의 무역
또한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수출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때도 이 시점으로, 도자기의 도시 경덕진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외국 무역과 수출입 관리, 출입품 검사와 징세는 당나라때 설치된 시박사에서 담당하였다. 송대에는 광주를 비롯해 항주, 명주 (영파), 천주, 밀주 (칭다오), 화정 등 여덞 곳에 시박사가 설치되었다. 고려와의 무역은 주로 명주 시박사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의 성품이나 인심 역시 매우 후했다.
외지에서 새로 이사 와 옆집에 살게 되면 서로 도구들을 빌려주고, 뜨거운 탕과 마실 것을 갖다 주었으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 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 어떤 집에 경사나 흉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 그 집을 가득 메웠다.” – 《동경몽화록》 (東京夢華錄)
서구권 학자들 역시 송나라의 경제력을 높게 평가하는데, 앵거스 매디슨 (Angus Maddison)은 1인당 GDP를 450달러로 추산해 당시 송나라가 세계 전체 GDP 비율 중 23%을 차지한다고 추산했고, 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선 스티븐 브로드베리 (Stephen Broadberry)가 1인당 GDP가 1,200~1,500달러 사이였다고 추산했다. 참고로 산업혁명 초인 1750년 영국의 1인당 GDP가 1,710 달러, 1800년엔 2,080 달러였다.
그러나 동양학자들의 정치적인 목적과 일부 서양학자들의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 ‘오리엔탈리즘’ 에 입각한 송나라의 경제력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송은 그리 길게 유지된 국가도 아니며, 당장 방랍의 난만 해도 송휘종 치세 북송 조정의 가혹한 착취와 부정부패로 백성의 고달픈 삶이 원인이 된 것이다. 게다가 원말명초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예컨대 화북 지방의 철강 생산량은 송대에는 35,000톤이었지만 원대에는 8,000톤으로 격감했다. 이는 철강과 석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잦은 전란과 전염병으로 인구가 격감했기 때문이다. 북송 초기 송 전역의 인구가 5,000만 명이었고, 이후 정강의 변으로 화북을 점령한 금나라 후기의 인구가 여기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인구가 몽골의 침공과 흑사병을 겪으면서 1,000만 명까지 격감한다. 당연하지만, 거의 4,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그 중 상당수는 전란과 피난으로 통계에서 누락되었다. 그래도 잔혹한 전쟁과 전염병으로 정말로 죽은 인구도 엄청 많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전술했지만 송의 경제력은 많은 주목을 받는다. 일각에서는 송대에 이미 산업 혁명의 기반이 있었다는 주장을 개진하기도 한다. 이는 송의 발달된 기술력, 그리고 산업 혁명 시기 영국과 비슷한 석탄 사용량과 제철 능력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러나 산업 혁명이 단순히 석탄 사용과 제철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화는 삼가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흔히 주장하는 산업 혁명 근거라는 것이 송의 석탄 사용량을 주요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중국의 인구가 예나 지금이나 아주 많아서 그런 것이다. 석탄을 취사, 난방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이슬람과 지중해 세계에서도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 심지어 중국과 비견되도 지지 않을 인구와 국가규모를 지닌 로마 제국에서도 근세에 들어서 관찰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량이 한때 배출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수력 방적기는 유럽에서 산업 혁명 과정에 쓰인 방적기와 큰 관련이 없는 데다가 실제 사용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결정적으로 송대의 중국은 근대 서유럽처럼 산업 발전에 필요한 제대로 된 증기기관이나 외연/내연기관의 발명도 없었고, 기관을 대량 생산에 응용하려는 시도 또한 부재했다. 애당초 ‘송나라 산업 혁명론’ 자체가 마오쩌둥 시절 정치성 이론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중국판 자본주의 맹아론 부록이나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학술적인 연구나 고찰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파생된 이론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남송시대를 북송의 후계 구도로 보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재현으로 간주할 경우, 제1차 남북조시대가 호한체제 (胡漢體制)로 이어진 것과 달리 이 제2차 남북조시대는 오히려 강남인들의 선민의식으로 이어진 원인을 북송의 높은 경제력에서 찾기도 한다. 남쪽의 한족 입장에서 사마진 정도의 나라가 파괴당한 것은 어느 정도 극복이 가능했었지만, 북송이 파괴당한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큰 여파를 미쳤기 때문이다. 이는 먼 훗날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중화민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다민족국가로서의 길을 공언한 뒤에야 어느 정도 해소된다.
○ 평가
송나라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는 나라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융성했으며, 사회도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였고 이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가 무르익은 시대였다.
서민 문화가 발달하여, 송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많다. 수호전, 금병매가 대표적이다.
건축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서 구조가 복잡한 누각이 많이 출현하고, 의장이 풍부해졌다.
당송팔대가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문학도 융성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