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0년 2월 2일, 프랑스의 왕족 오를레앙 공 가스통 (Gaston d’Orléans, 1608 ~ 1660) 별세
오를레앙 공 가스통 (Gaston d’Orléans, 1608년 4월 24일 ~ 1660년 2월 2일)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왕족으로,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들이다. 루이 13세, 프랑스의 이사벨, 크리스틴 마리의 동생이며 앙리에트 마리의 오빠이기도 하다. 1626년 오를레앙 공작 및 블루아 백작, 샤르트르 백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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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통 도를레앙 (Gaston d’Orléans)
.휘: Gaston Jean Baptiste de France
.출생: 1608년 4월 24일,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퐁텐블로 궁전
.사망: 1660년 2월 2일 (51세), 프랑스 왕국 블루아 블루아 성
.매장지: 프랑스 왕국 생드니 대성당
.가문: 부르봉 왕가
.부노: 부) 앙리 4세, 모) 마리 드 메디시스
.배우자: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
로렌의 마르그리트
.자녀: 안 마리 루이즈, 마르그리트 루이즈, 엘리자베트, 프랑수아즈 마들렌, 장 가스통, 마리 안
*오를레앙 공작
.재위: 1626년 ~ 1660년
.전임: 오를레앙 공 니콜라 앙리 / 후임: 필리프 드 프랑스
어머니 마리와 손잡고 리슐리외 추기경과 대적하지만 실패하고 플랑드르로 도망친 끝에 형 루이 13세와 화해하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이후에도 여러 번에 걸쳐 리슐리외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다. 루이 13세가 죽고 루이 14세가 즉위한 뒤에는 프롱드의 난과 관련해 마자랭 추기경과 갈등을 겪어 자신의 영지인 블루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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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및 활동
오를레앙 공 가스통 (Gaston d’Orléans, 1608년 4월 24일 ~ 1660년 2월 2일)은 프랑스 왕 헨리 4 세 와 그의 아내 마리 드 메디치의 셋째 아들이었다. 이후 오를레앙 공작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1608년 4월 24일 퐁텐 블로 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는 왕실의 지도하에 자랐다. 1626년 8월 6일,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
로렌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한다.
1628년에 라로셸을 포위한 군대의 명목상 지휘권을 가졌고, 이미 남은 생애를 차지할 정치적 음모의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1611년 형 Nicolas Henri가 사망한 후 1638년 형의 장남이 태어날 때까지 프랑스 왕좌의 계승자였다.
1632 년 카스텔 노 다리 전투로 이어지는 전쟁에 실패한 후, 그는 플랑드르로 피난했다. 그의 형제 Louis XIII와 화해한 그는 1635 년 Richelieu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고, 다시 나라를 떠나 왕과 추기경에게 복종했다.
곧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Orléans는 후작 de Cinq-Mars와 공모하여 Richelieu의 암살을 시도한다. 1643 년 루이 13세가 사망하자 가스통은 왕국의 중장이 되어 프랑스 북부 국경에서 스페인과 싸웠다. 그는 Fronde (1648 ~ 1653)의 전쟁 동안 그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1626년 결혼해 딸 Anne Marie Louise d’ Orléans, Duchess of Montpensier (1627년 5월 29일 ~ 1693년 4월 5일, 후에 Grande Mademoiselle로 알려짐)을 낳았는데 부인 마리 드 부르봉 (Marie de Bourbon)은 출산 후 6일 (1627년 6월 4일) 사망하여 그녀의 딸을 부르봉 왕가의 몽 펜시 에르 계통의 마지막 계통으로 남겼다.
이후 가스통은 Charles IV, Duke of Lorraine의 자매인 로렌의 마르그리트 (Marguerite of Lorraine)와 첫눈에 반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로렌은 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공작의 여동생과 결혼할 수있는 왕의 허락을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통은 다시 Lorraine으로 도망쳤고 1632년 1월 2일 낸시의 가족 앞에서 비밀 의식에서 로렌의 마르그리트를 아내로 삼았다. 하지만 형의 사전 허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프랑스 법원에 출두할 수 없었고 결혼은 비밀로 했다.
루이 13세가 1643년 5월 임종할 때 그는 형의 용서 간청을 받아들이고 마거리트와의 결혼을 승인했고, 그 부부는 1643년 7월 파리 대주교 Meudon에서 세 번째로 결혼식 후 마침내 오를레앙 공작과 공작 부인이 부부로 법정에 접수되어 마거리트는 법정에서 부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642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가스통은 룩셈부르크 궁전을 물려 받았으며, 왕실의 호의로 복원된 후 Palais Orléans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거주했다. 그들은 또한 1645년에 첫 아이가 태어나 Loire Valley에 있는 Château de Blois에 머물렀다.
Marguerite와 Gaston d’ Orléans는 5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중 세 딸이 성인이 되어 살아 남았다.
1643년 가스통의 형제 루이 13세가 사망 한 후, 루이14세가 황제에 등극했다.
가스통은 1652년 Mazarin 추기경에 의해 Blois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의 모든 오를레앙 타이틀은 이제 유일한 그의 조카 필리프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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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1626년 부르봉 왕가 출신 몽팡시에 공작 앙리 드 부르봉의 딸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과 낭트에서 결혼하지만 그녀는 이듬해 딸 안을 낳고 요절했다.
.안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 (1627~1693)
- 1632년 로렌의 마르그리트와 낭시에서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 (1645~1721) 토스카나 대공비
.엘리자베트 마르그리트 (1646~1696) 기즈 공작 부인
.프랑수아즈 마들렌 (1648~1664) 사보이 공작 부인
.장 가스통 (1650~1652)
.마리 안 (1652~1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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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