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인문학적 질문을 한 형제에게…
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인문학적 질문을 한 형제에게…
필자는 몇 주 전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저서 160여 년 전의 “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라는 작품이 교보문고에서 인기 순위에 올려왔고, 요한계시록에 관한 연구와 세미나 그리고 집회가 유행처럼 일어나고 있다는 소개를 받고, 잠시 지인이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현재 국내외적으로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어려운 상황에서 하필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와 묵시문학적인 요한계시록이 왜 소환된 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작품에서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고민과 탐구에 공감할 수 있고 위로와 영감을 줄 수 있으며, 요한계시록은 혼란스러운 시대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언과 종말론적인 호기심에서 찾고자 하는 사회적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21세기 작금의 시대를 부카(VUCA)의 시대라고 한다. ‘변동적이고 (Volatility), 불확실하고(Uncertainty), 복잡하며(Complexity), 모호한(Ambiguity)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별 살았던 역사를 만들어가던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난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직면해서 표현하는 형식이나 방법이 다르겠지만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더욱더 부카의 시대가 될 것 같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해서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들이 다양하게 표출되지 싶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은 크든 작든 더 음험(陰險)하게 벌어질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 종교, 계층, 주의(ism), 이데올로기(Ideology) 등 다양하게 끼리끼리, 유유상종 (類類相從)하며 심화(深化)될 것이다. 지난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 시드니도 한국의 건강하지 못한 정치적 표현들이 거침없이 여과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서 어두운 컨텍스트(Context)는 뒤로 숨기고, 경직되게 포장한 텍스트(Text)만 들고나와 본질을 흐리게 하고 왜곡해서 자기들만의 의도된 대로 만들기 위해 조작과 요설(饒舌)만이 판치는 무법천지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히 우려스럽다.
최근 필자에게 인문학적 질문을 한 형제에게 어떤 의도로 질문한 건지 알아보기 위해 역으로 질문 몇 개를 던졌더니 지금까지 반응이 없다. 카톡이라는 공창에서 질문했기에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예의를 갖춰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적어도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공인으로서 최소한 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공동체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2가지 특징이 있다면, 바로 ‘사랑과 믿음’이다. ‘사랑과 믿음’은 일반 사회에서도 매우 가치 있는 담론 중에 하나다. 그러면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과 믿음’은 동등한 두 인격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한쪽이 열등하거나 종속되면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다(창1:27; 호2:19-20; 요3:16; 롬5:8). 그래서 ‘사랑과 믿음’은 서로가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 자발성을 가지고 자발적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필연적 조건 때문에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크게 두 개의 기둥이 있다. 하나는 ‘권리’고 다른 하나는 ‘책임’이다. 자유를 ‘권리’로 사용할지 아니면 ‘책임’으로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자유를 가진자의 특권이다. 문제는 자유를 바르게 사용할 건지 아니면 잘못 사용할 건지가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가 아닐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등한 관계로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시기를 바라는 것이 성서의 전체적인 주제다.(ex 창1:26-27; 창5:3; 창9:6; 골1:15; 고후4:4).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눅15:11-32;)에서 큰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삶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왜냐면 큰아들은 ‘책임’은 있었지만‘권리’는 찾지 못했고, 작은아들은 ‘권리’는 주장했지만 ‘책임’이 없어서 아버지의 ‘사랑과 믿음’을 제대로 나눌 수가 없었다. 두 아들들은 아버지의 인격과 성품안에 동등함을 잃어버려 참 자유 자가 아니었다. 가정이나 교회나 더 나아가 국가 안에서도 서로가 차이는 있겠지만 대등한 관계일 때 ‘사랑과 믿음’으로 서로에게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당신이 우리가 닮아야할 형상으로 오셨서 인간의 운명을 나누는 경계선(dividing line)이 되셨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과 성품을 대등한 관계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나누는 삶의 복음화, 성시화, 민주화, 세속화가 아니라, 제도나 위계나 서열로 줄세우고 갈라치기하는 복음주의, 성시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 같은 ‘프레임에 갇혀 길을 잃어버린 현대사회에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의 정점을 능가하는 ‘인간 존엄성’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비 콕스(Harvey Cox)의 [세속도시]에서의 엄중한 물음에 기독교인들은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응답 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인간의 운명과 실존을 위해서 실제적이고 가시적이며 희생적인 사랑과 선한 믿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끊이 없이 상기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음악 편지의 주제는 ‘자유와 삶의 조화’다. 그래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 (J.S.Bach)의 곡 중에서 소위 건반 악기의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소개하고 싶다. 이 [클라비어]라는 것은 건반악기의 총칭을 말하는 것인데, 바흐가 살았던 바로크 시대는 오늘날 같은 정교한 건반 피아노가 없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현(絃)을 탄젠트(Tangent)라는 금속 막대기로 때려서 소리를 내는 클라비코드인데 바흐는 이 악기의 섬세한 음색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새 날개 축(軸)이나 가죽으로 만든 갈퀴로 현을 튕겨서 소리는 내는 ‘쳄발로’가 있었다. 이 악기는 국가마다 호칭이 각각 다르다(하프시코드, 클라브생, 플뤼겔…ect)
바흐의 평균율은 음악에서 사용되는 음계 조성법 중 하나로, 음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음 간들을 특정 간격으로 조정하는 방법이다. 바흐는 평균율을 사용하여 음악을 작곡하여 연주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평균율은 바흐의 작품에서 특히 오르간 음악에 많이 적용되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음정의 정확성과 조화로움으로 인해 평가받고 있다.
바흐의 평균율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바흐의 평균율을 존경하여 내용을 연구하고 자신들의 작곡에 활용했다. 그래서 평균율은 서양 음악사에 중요한 음악적 기법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인문학적 질문을 한 형제의 말속에는 언중유골(言中有骨)이어서, “왜 그렇게 편향적이냐?”라는 질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필자는 편향적임을 인정한다.
왜냐면 필자는 매우 이기적이며 배타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이기적이라면, 먼저 기독교인들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런 면에서 이기적이다. 그렇다고 다른 일반사회인들을 편갈라 줄세우며 편견과 아집으로 대하는 이기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여기서 배타적이라면, 필자는 수많은 종교 중에 기독교만 신앙의 중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타 종교를 부정하고 차별하는 배타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신학 공부를 결심할 때쯤 필자의 어머니와 상의 할 때 엄중하게 물으셨다. “아들아 어느 곳이든 어느 장소든,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다짐해라” 40에 청상과부로8남매를 홀로 키우시며 큰아들과 둘째 아들의 정치적 상처로, 마음고생하셨던 어머니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지금까지 지키며 살아왔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보수와 진보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많아서 지금까지 역사가 발전되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극단적인 극우와 극좌들은 자기들의 폭력을 언제든지 정당화한다는 데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비난을 떠나 비평과 비판할 때는 합리적과 객관적 그리고 상식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영혼을 병들게 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말했던가? “산에 오르는 사람은 자기가 오르는 산은 보지 못한다”라고 했지, 필자는 늘 이런 마음으로 기도한다.
자기 생각
자기 꿈
자기 야망으로 가득해서
당신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실리(實利)가 아니라
진리(眞理)를 선택하고(요14:6)
자기 신념(信念)이 아니라
당신의 정념(情念:Pathos)을 품게 하소서
(요1:29)
자기 뒤에 숨고
자기 자신마저 속이며
결국 자기를 잃어버려
당신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진정 자신에게 돌아와
못난 자신과 화해하고
당신에 돌아오게 하소서(애3:40)
당신의 기쁨이(잠12:22)
당신의 뜻이(살전5:16-18)
당신의 삶이(시편143:10)
흔들림 속에도
떨림 속에도
깨짐 속에도
무너짐 속에도
당신의 대답을 듣게 하소서(욥38:1)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배경음악 : J.S. Bach [평균율 1번 Prelude in C Major]
구노의 [아베 마리아]와 비교 감상하세요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