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2)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아피아가도를 따라 카타콤베로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단은 2023년 10월 13일 (금) 새벽부터 줄을 서 바티칸 박물관을 입장해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와 천장화 감상, 성 베드로성당과 광장일대를 둘러보았다.
내부를 둘러본 후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의 본명은 산 피에트르 광장이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으로 바로크 건축의 특징을 잘 담았다고 한다.
로마 4대 광장중 하나이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아 광장은 르네상스식 건축으로 두 광장을 비교하면 바로크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비교가 가능하다.
산 피레트로 광장은 284개의 원기둥이 광장을 감싸안고 있다.
바티칸 관람후 우리 일행은 옆문을 이용해 인근 식당에서 오찬을 나누며 다음 장소인 카타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아피아가도 (Via Appia)를 따라
우리 일행은 아피아가도를 따라 형성된 카타콤베로 향했다. 우리는 아르데아티나 가도 (Via Ardeatina)를 따라갔다.
아피아 가도 (이: Via Appia)는 이탈리아의 로마 공화정 시대에 지어진 도로이다. 고대 로마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도로이기도 하다.
이 도로는 로마에서 시작되어 풀리아주의 브린디시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은 로마의 감찰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삼니움 전쟁 중이었던 기원전 312년에 처음으로 군사 도로로 사용한 뒤에 붙여졌다. 아피우스가 도로 건설을 입안하고 직접 총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로마 수도 (水道) 중 최초의 수도 (아피아 수도) 역시 같은 시기인 기원전 312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로마 군대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기지에 의존했다. 이 기지는 전장에서 바로 공격할 기회를 기다릴 수 있도록 많은 수의 로마 병사를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지들은 수도인 로마에서부터 연결되어 출입이 쉽고 물자 공급이 수월한 좋은 도로를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자르반 4세 중반, 아피아 가도는 군사적 물자 교류를 위한 중요 수송로로 건설되었다. 특히 제 1차 삼니움 전쟁 (BC 343 ~ 341)에서, 로마인들은 늪지 건너의 삼니움인들에 맞서 평원에서 군대를 지원하거나 재공급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도로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지배했던 초기의 로마 시대에 지어진 몇몇 도로들은 대개 로마를 벗어나서 에트루리아를 이어주었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인들은 도로 건설의 주역이 되어 이탈리아 내의 도로들을 확장했다. 이 도로는 로마의 영역을 벗어나서 건설된 최초의 도로다.
이러한 도로들은 이티네라리움 (Itinerarium) 을 통해 목적지가 결정되고 계획되어, 로마 시에서 영토 경계선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대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아피아 가도의 중요성은 당시 스타티우스가 문헌에 기록했던 이름에서부터다.
“Appia teritur regina longarum viarum” (아피아 테리투르 레지나 론가룸 위아룸)
“아피아 가도는 도로의 여왕이다.”
팔라티노 언덕
한편 카타콤베를 향하는 로마 거리 곳곳에서는 여러 유적지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로마의 일곱 언덕중 ‘팔라티노 언덕’을 지나며 감회가 깊었다. ‘팔라티노’ (이: Palatino)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이다. 로마의 일곱 언덕들 중 가장 핵심적인 언덕으로 꼽혔으며, 로마 왕정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정도로 로마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이다. 로마 포룸에서 40m정도 위에 위치해 있으며, 이 곳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지은 황궁이 있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후에 이 황궁을 확장했으며, 후대에도 계속 로마의 정식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황궁 외에도 부유층의 저택들이 밀집해 있었다. 언덕의 직경은 약 2,182m이고, 면적은 63에이커이다. 로마 시대에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곧바로 대경기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였다. ‘팔라티노’라는 이름에서 궁전 (palace)라는 단어가 유래된 것이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팔라티노 언덕에 있던 동굴에서 늑대 루파가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발견하여 그 곳에서 키웠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에 의하면, 이 곳에서 영웅 헤라클레스와 괴물의 전투가 벌어졌고, 헤라클레스가 괴물을 몽둥이로 너무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언덕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며 경사로가 생겼다고 한다. 이 설화는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고, 후에 팔라티노 언덕에 계단이 생겼을 때 그 괴물의 이름을 따 ‘카쿠스의 계단’이라 불렀다.
로마 제국의 시작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굴 조사 결과 기원전 10세기부터 이곳에서 사람이 살았음이 밝혀졌고, 20세기에 조사했을 때는 장례 예식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9세기의 오두막들을 발굴하였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사비나 족과 아비나 부족이 로마로 이주하였을때, 본래 로마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계속 팔라티노 언덕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팔라티노 언덕은 루파를 숭배하는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많은 부유한 로마인들이 이 곳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곳에 거대한 황궁을 지었고, 그때부터 이곳은 제국의 황궁으로 기능하게 된다. 후임 황제들이 이 곳을 계속 개축, 확장하였고, 아직까지도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곳에 태양신 아폴로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기도 했다.
기원후 64년에,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나 당시 황제였던 네로의 궁전을 불태워버렸으나, 네로는 더 큰 황금 궁전을 지어 자신의 황궁으로 사용하려 하였다. 하나 반란이 일어났고, 황금 궁전은 미완으로 남게 되었고, 다른 건물이 대신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도시 로마가 오랜 시간동안 그 영광을 잃으며 황궁은 약탈되었고, 그 자재들은 다른 곳으로 빼돌려졌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남아있는 유구들 뿐이다. 당시 있었던 건물군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 리비아의 궁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궁전, 세베루스 황제의 궁전, 키벨레 신전, 아폴로 신전,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전 등이 있었다.
수도교
카타콤베로 향하는 길에 로마의 수도교를 볼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은 머나먼 수원지에서 도시나 마을로 공중목욕탕, 공중화장실, 분수, 사유지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다양한 수도교를 지었다.
또한 농장이나 정원에 공급되었고, 사용하고 남은 물은 하수처리를 위한 복잡한 하수도를 통해서 오수와 폐수 등을 배출하였다.
수로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물을 흘려서 공급하였다.
경사도는 평균 0.2~0.5%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16.5%가 되었는데, 공사지역의 기후와 특성에 따라서 돌과 시멘트를 사용한것과 벽돌을 사용한 것도 있다.
언덕이 그리 넓거나 크지 않다면, 갱도를 파고 들어가 관통하는 방법을 택했고 일정한 간격으로 언덕에서 수직으로 굴을 파서 수리구멍과 환기구를 만들었다.
골짜기가 나오면 다리를 놓거나 사이펀 원리로 밑을 파고 들어갔다.
로마의 첫 번째 수로는 성벽안의 도시에 물을 공급하였고, 3세기 무렵에는 로마에 11개가 되는 수도교가 건설이 되었다.
수도교는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 로마의 경제를 지탱하였다.
물의 대부분은 공동수조나 분수, 목욕탕 등에 사용이 되었고, 로마제국이 성장하면서 다른 도시나 자치구역에 수도교가 추가로 건설되었다.
이 튼튼한 수도교는 현재도 일부 지역을 그대로 쓰이고, 유물 보호때문에 현대식 수도관을 내부나 아래에 설치하여 지금도 시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서적을 출간하였던 적이 있는데, 기원전 1세기의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이나 프론티누스의 수도론이 대표적인 서적이고, 유명한 수도교 건축물로는 세고비아 수도교의 다리와 콘스탄티노플의 수도교가 있다.
로마에 공급되던 수도교와 유사한 수도망을 제국 곳곳에 건설하였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세고비아 수도교, 프랑스 퐁 뒤 가르 등이 있고, 일부 지역은 복구해서 지금도 사용하는 곳이 많이 존재한다.
지하무덤 카타콤베, 카타콤베 디 산타 도미틸라 (Catacombe di Domitilla)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의미하는 카타콤베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지하 묘지로 사용되었다.
로마에는 카타콤베가 여러 개 있는데, 가장 큰 카타콤베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있는 것들로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카타콤베, 도미틸라의 카타콤베가 유명하다.
아르데아티나 가도 (Via Ardeatina)를 따라 우리 일행은 카타콤베 디 산타 도미틸라 (Catacombe di Domitilla; Via delle Sette Chiese 282, 00147 Rome Italy)를 찾았다.
이 지하묘지, 카타콤베는 이탈리아 전국에 걸쳐서 분포하지만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곳은 역시 로마이다.
그리고 카타콤베 중에서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와 더불어 가장 원형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 이 도미틸라 카타콤베이다.
도미틸라 카타콤베 주변에는 약 25개에 이르는 카타콤베가 있고 이들 카타콤베는 땅 속에서 무려 500km라는 믿기지 않는 길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미틸라 카타콤베 (Catacombe di Domitilla)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하 5층 규모의 카타콤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길을 따라 좌우에 무덤이 층층이 들어서 있다.
크기가 작은 것은 어린이의 무덤이며, 넓은 공간은 가족 묘지이다.
석관에 안치된 것은 일부 부유층의 무덤이며 일반적으로 관 없이 헝겊으로 감은 후 올리브 오일을 바른 채 안치하였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와 같이 아마천에 덮여 돌을 파서 만든 관에 매장되기를 원했는데 신자들 대부분은 빈민층이나 노예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지상의 영묘에 묻힐 상황이 아니어서 지하에 묘지를 쓰게 된 것이다.
지하 10에서 15m 정도에 계단을 만들어 지하 5에서 6층을 이루게 되었는데 로마법에 의하면 묘지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에 마련된 공동묘지의 미로로 피신할 수 있었다.
카타콤베 디 산타 도미틸라 (Catacombe di Domitilla)는 3세기 초부터 5세기 까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서 약 1마일 떨어진 아르데아티나 가도 (Via Ardeatina)를 따라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카타콤베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조카딸 플라비아 도미틸라가 소유한 땅 지하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도미틸라와 그녀의 남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1세기만 도미니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클레멘스는 처형되고, 도미틸라는 유배당했다고 한다.
현재 이 카타콤베는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의 무덤 위에 이들을 기리기 위해 축조된 4세기 바실리카식 교회의 측면 복도와 입구가 연결되어 있으며, 상당수의 크리스트교 벽화와 비문들을 보관하고 있다.
지하 묘소에는 양쪽 벽면에 시신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장방형의 공간들을 만들고 조금 넓은 공간에서는 종교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로마에 있는 지하 공동묘지들의 구조는 모두 동일하며 여기에 남겨진 많은 벽화들은 고대와 중세 기독교 미술을 보여 준다.
카타콤베 디 산타 도미틸라 (Catacombe di Domitilla) 역시 중요한 성지로 이곳에서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종교 벽화와 그리스어로 쓰인 비문들을 볼 수 있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순교했던 성인 네레우스와 아킬레우스의 유해가 여기에 모셔지면서 순교자들의 묘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 뒤에도 신자들은 성인들 곁에 묻히고 싶어했기에 이곳의 묘지가 많아졌다고 한다.
두 성인의 무덤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는 4세기 중엽의 벽화가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소녀가 천국의 정원에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카타콤베는 897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19세기 중엽에 발굴되었다.
지하 4층까지 발굴되었는데, 2층까지만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다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제 땅 밑에서 밝은 햇볕 속으로 나왔다.
지하에 있던 공동묘지는 모두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되어 바티칸 관할에 속하는 여러 수도회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교회가 공인된 이후에도 카타콤베는 길고 긴 수난과 약탈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로마를 약탈했던 이민족의 침입 때 무덤 안에 있는 귀중한 자료와 보석 등이 훼손되고 도난당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무덤 속에 평소 지니던 귀한 물건을 넣어주는 장례풍습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보더라도 관 뚜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베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례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카타콤베 디 산타 도미틸라 (Catacombe di Domitilla)를 둘러보고 나와 카타콤베 입구의 야외 벤치에 앉아 잠깐 쉬었다.
가이드의 쉼없는 안내를 들으며 햇빛을 피해 앉아있던 나무그늘은 참 편했다.
다빈치 공항에서 이집트 카이로로
우리 일행은 경유지인 이탈리아 로마를 하루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나눈 후 예정지 이집트를 향하기 위해 다빈치 공항으로 달려갔다. 공항에서 삼삼오오 티타임 후 카이로행 MS794편에 올랐다.
몸은 피곤했지만 여러 생각할 거리들이 많은 일정이었다.
특히 카타콤베를 방문할 때는 1차 인문학여행 때 방문한 튀르키예 (구 터키)의 데린쿠유 (‘깊은 우물’이란 뜻) 생각이 났다. 그때도 “과연 종교의 무엇이 이들을 그 깊은 땅속으로 이끌었나”를 생각했는데 카타콤베를 방문하며 또다시 그때의 생각이 되내어졌다.
로마 박해를 피해 숨었던 이스라엘의 쿰란공동체, 박해를 피해 숨어든 데린쿠유공동체, 그리고 로마의 카타콤베 신앙공동체, 이들이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땅속생활을 감내했던 모습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 그 이상의 세계를 생각해 본다.
참고 = 위키백과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