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문학 : 제5장 과학과 기독교
과학과 종교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에 대한 제임스강의 소감
과학 (Science)과 실재 (實在, reality)
.여러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사물의 구조, 성질, 법칙 등을 관찰 가능한 방법으로 얻어진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체계를 말하는, ‘과학’이라는 단어 그 이론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하게 하는 측정, 계산, 분석 등의 방법과 논리적 사유를 통해 예측할 수 있는 경험적인 결과물들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Cf. 과학철학 (philosophy of science)
“가상의 실재란 거짓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거짓말이란, 거기 사자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강가에 사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거짓말과 달리, 가상**의 실재는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통의 믿음이 지속되는 한, 가상의 실재는 현실세계에서 힘을 발휘한다.” (유발 하라리) **이런 상상력과 함께 인간의 내면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기에 추상적 명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아주 오래전에 반신반인 (半神半人)의 DNA를 가진 1대 단군, 아니 영적동물, 사람 (HERO : 영웅)
.반인반수 (半人半獸 : Hetero: 괴물, 사탄)
특히, 환웅J, 환인Y이라는 인격화 된 신 (god)이라는 추상적 명사를 만들어 냈다. → 기독교 세계의 인간관
“과학과 종교, 통섭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앞서, 아래 2태제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겠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의 발생원인은?
종교는 비과학 (원시과학)적인 환경과 그에 따른 상상의 사고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리고,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손호현 저)의 제5장 과학과 기독교 “물과 H2O / 당신은 뉴런 보따리일 뿐이에요 / 과학과 종교, 그 소통의 역사 1/ 우주가 재판정에 서다 갈릴레오 재판 / 돋보기: 천동설과 관계있는 성서의 구절들 / 원숭이가 재판정에 서다: 원숭이 재판 / 진화하는 인간, 진화하는 종교 / 자연신학과 시계공 하나님 / 자연의 신학과 고물상 의 보잉 747기 /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그 비판의 옹호와 비판의 비판 / 중국의 창조설화 / 불트만의 비신화론적 성서 읽기” 순으로 살펴보자.
이 책에서 말하는 과학과 종교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과학연구와 종교 (성서)연구, 서로 통섭될 수 없는 전혀 서로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내용을 갖고 있는 종교와 과학과의 통섭의 관계를 비교 분석한다며, 과학으로 증명됨이 없이 “갈등, 독립, 통합, 대화” 라는 식으로 분류한다는 자체부터 터무니 없는 “신학적 오류”**라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만날 수 없다.”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 교수의 스승인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말처럼, 인문(과)학, 사회(과)학들은 진화이론에 포함되어야 할 생물(과)학의 마지막 부분이 되어야 하지만, 종교(과)학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문헌학, 성서 비평, 형(양)식비평 등에서 제기되는, 대부분 성서 본문에 적용되는 비신화화 (Demythologization)는, 불트만 (Rudolf Karl Bultmann)이 제기하는 성서의 비신화화 (Demythologizing the Bible)가, 이 시대에 신학자들 세계를 리드하는 날이 온다면, 서구종교를 Support하는 신학 (Theology)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 과학의 간섭을 받는 현대바이블사상 (New Bible thought)이라는 새로운 컨셉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건 바이블 철학 (Thoughts of Jesus)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가 열린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종교와 과학이라는 것을, ‘타는 목마름의 물과 실험실의 H2O이기도 하다’ 라고 저자는 비교한다 (P158). 하지만, 그런 의미를 굳이 결부시키고자 한다면, 필자는 문학적 인문(학)적 사고와 과학적 실험적 사고를 말한다고 본다. 말하자면, 미신 (superstition, shamanism)과 그에 따른 신화적 상상 (mytical imagination)에서 나온 산물 (product)이 종교 (religeon)라는 것이고, 거기에 인문학적 사고를 덧입힌 것이 christianity에서는 기독교철학 (theology)이라고 본다. (JK)
우선, 이것 역시 과학과도 통섭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한, 여전히 자신들의 Hierarchy 보전을 위한 가톨릭 신학 .. 그리고 그들의 교리 지배하에 있던 시대에, 코페르니쿠스, 조르다노 부르노, 갈릴레오, 케플러, 뉴튼 등등과 같은 (이렇게 부르고 싶다=>) 과학 철학자(philosopher of science)들이, christendom 세계에서도 그들의 과학적 주장을 표현했다는 것에 존경의 마음을 먼저 표한다.
.그것과 아울러 진화론이, 올바른 영감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추구하게 해주었다는 요한바오로 2nd의 말에는 동의 못한다. 왜? 거의 절대적인 창조론 바탕에서 진화론에 의해 바른 신학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줬다면, 그와 동시에 창조론에 진화론을 이어 붙이겠다는 것인데, 과학을 신학의 시녀로 삼아 종교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어떤 종교에서 미신 (superstition, shamanism)과 신화 (mythical imagination, Mithology)를 배격하면, 종교 (Religeon)가 될 수 없기에 그렇다.
.과학의 대중적 전반적 논리의 ‘갈릴레오’나 전문적 논리의 ‘코페르니쿠스’, ‘부르노’, ‘케플러’ 등등의 과학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미의 천동설에다 지구평면설에 심취되어 있는 그래서 그런 바탕위에 있는 가톨릭 (루터파 역시) 성서연구에 방해되는 논리를 폈기에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20세기에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 속으로 더욱 가열차게 밀려들기에, ‘진화론 재판’까지 열려, 과학시간에 창조설이 아닌 오히려 헌법적으로 보호받게 되어, 진화론을 가르치게 되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종교를 문명사로 추적한,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진화하는 종교“라 할지라도
종교를 문명사로 추적한,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진화하는 종교”라 할지라도 .. 그런거 없다.
봉건제 (封建制, feudal system), 재봉건화 Re-feudalize의 가테고리에 갇혀 답습해오고 있다.
1. 배운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아이 처럼, 지난 신정시대 (Theocracy), 이어 왕정시대 (Monarchy)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에서 추출한 논리의 가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봉건적 생각들을 답습해 오고 있는 반-토마스 쿤, 아니 반-예수와 같은 앵무새들…
2. 성서 그리고 신학에서 미신, 신화를 제거한다고? 그게 종교가 될 수 있다고? 사상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종교가 될 수는 없다.
3. 마치, 대중을 향한 싯달타의 이야기들을, 대중이 도무지 알 수 없고, 접근하기 너무 어려운 설법의 논리로 변해 버린, 인도불교가 사라지고, 기독교의 “그림책 신학”, 그 “문맹자들의 성서”처럼, 보기만 하면 머리에 쑤욱 들어오는 신비한 그림들… 인도불교가 사라진 그 자리에, 미신과 신화가 장착된 아기자기 신비한 그림들의 힌두교가 다시 득세한 것처럼 .. (물론 인도불교에 미신과 신화가 장착되어 중국 대승불교, 동남아 소승불교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종교라는 것이, 애당초 미신 (superstition, shamanism)이 횡행하는 원시는 물론, 그것에다 고대-중세 시대에 신화적 상상 (mythical imagination)의 나래를 펼치는 신비감에 끄달려, 만들어 졌고 또 만들어져 여전히 오고 있는 중이다.
.헬라 신화세계에서도 펼쳐져 있는 신들의 인격화 .. 미신과 신화속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도 탄생했기에, 기독교 역시 JMS 신천지 등등 그리고 사랑제일교회 한기총 전회장 전씨 등등에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음은 물론, 날뛰고 있어도 속수무책 상태로 있을 수밖에 .. 하기사 50보 백보니까 … 기독교 나와바리에서 쫓가낼 수도 없고 ….
.39구약과 27신약은 진리로써 무오류라고, 가톨릭 (신학)은 물론 개신교 고전신학자들과 지금도 그들을 따르는 목회자들은 주장한다. 지금까지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무림비급 (武林祕笈)의 기서 (奇書)로서, 그것이 강호 (江湖, 세상)를 제압하는 천하제일검 (Swordmaster)이라며, 그것을 가졌다는 신의 왕국 (the kingdom of god)에 들어가기 위한, 주의 종들에 의해 지배되는 신정 (theocrcy)의 노예시대 (입틀막)를 여전히 재현해 가고 있다.
– 무림비급(祕笈) 두루마기
그땐 모르니까 믿어야 했지만, 알게된 지금은 못 믿는다.
.과학과 종교 단원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 그 기원과 운명 .. 저자는 이것이 종교의 발생원인이라고 한다 .. 아니다, 소위 운명의 결과에 대한 소감을 말할 수는 있겠으나, 운명을 점치는 것을 제외하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HUMANITIES (인간학, 인문학)의 정수요 내용인 것이다. 사람이 바로 Homo sapiens sapiens (생각하는 지혜 sophy가 있는 사람 Human)라고 하는 말로 표현된다.
.”역사적 과학적 사실에 관용하지 못하는 것은, 그대 가슴속 깊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느끼거나, 혹은 모르기 때문에 믿음으로 진리라고 여겨온 것들에 대한 두려운 마음 때문이다.” ㅡ 뉴턴주의자,** 볼테르 (Voltaire, 1694 – 1778)
**뉴턴주의 (Newtonianism)란 아이작 뉴턴 이후에 뉴턴의 과학적 방법론과 목적론을 따르려는 18세기 유럽 과학의 경향을 말한다. 뉴턴과학의 방법은 “나는 가설을 설정하지 않는다.”라는 프린키피아의 유명한 구절로 대표된다. 아르키메데스가 원주율을 알아내기 의해 수많은 실험이나 관측을 했기에 알아냈듯이, 뉴턴은 가설을,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설명이라 하여, 이를 배격했다.
.마치 기독교 신처럼,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봉건사상의 왕정시대에서도, 시민주권 사상을 보인 모든 과학철학자들에게 다시한번 존경심을 표한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과학적 사람’과 비과학적 (종교) 집단’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예수가 기독교와 관련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를 만들게 한 예수가 창시자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에 앞서, 예수가 기독교와 관련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독교를 만들게 한 예수가 창시자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3장 P81) 하지만 필자는 “그는 그런 <갈릴리 사람 나사렛 예수>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갈릴리 동포들의 형편없는 너무도 비참한 생활모습에서, 갈릴리를 수탈해 가버린, 로마와 헤롯왕정보다도, 그들에게 빌붙고, 야훼를 팔아 민중을 지배하며 상층부 삶을 누리면서 야훼의 뜻에 대한, 시대적 해석없이, 더구나 식민지가 되어 있는 땅에서 게으름을 전하고 있던 헤롯성전의 종교권력들, 그나마 같은 유대인들에게는 관용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절대적인 신 (YHWH)으로 부터, 사람을 <위로와 치유> 그리고 <평화와 소망>을 주며, 보호하고 인도하는 ‘우리아버지’로 대체하며, 갈릴리 땅 그 길위에서 갈릴리 동포들과 나누며 그들에게 <용기>를 말하던 예수. (‘아버지’라는 개념 자체가 ‘용기’다)
.그의 motherland 갈릴리에서 동포들의 그런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예수를, 헤롯성전의 산헤드린에서 보낸 율법학사들은 그를 시험하고, 왜곡하고, 나쁜소문을 퍼트리고, 그에 대한 것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그 리포트를 헤롯성전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상황을 포착했다.
.그것은 당시에도 어길 수 없는 계명이었다. 사실 제4계명은, 좋은 뜻에서 출발했던, 소위 ‘여섯 번의 날들에 창조’를 끝내고 전지전능한 야훼도 휴식을 취했다는 일곱 번째 날 .. 노동을 할 수 없는 안식일을 어긴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 일로 갈릴리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예수는 기독교 창시자도 아니고, 인류애를 펼친 것도 아닌, 그저 그의 갈릴리 동포들에게, 위로- 치유- 평화- 소망을 가져다 주는 ‘아버지’라는 ‘빽’, <‘그 용기를 갖고 살아가라’>는 <‘생활운동’>을 이곳 저곳의 갈릴리 길 위에서 전개했던 것이다.
.그런 예수를 하나님으로, 삼위일체 그리고 그런 신의 왕국 (the Kingdom of god)을 선사하는 등등의 교리 속으로 가두고, 이 땅과 별개의 인물로, 승천과 재림하는 ‘시간의 동시성’의 4차원의 존재로 변환시켜, 봉건화 (refeudalize, 입틀막)를 반복시키고, 그들의 하이어라키와 먹거리터 보존의 수단으로 이용해 오고 있다는 미신과 신화적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를 굳이 말한다면, 동생 야고보의 ‘개혁유대교’를 낳게 한, 유대교 개혁운동을 전개했던 《”유대교 개혁 운동가”》 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운동마저 헤롯성전 종교권력의 사라짐과 함께 AD 70년후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 바리새 회당으로 변화된 또 다른 유대교를 이어가게 되었고, 또 종말론과 함께, 참사람 예수를 4차원의 존재로 만들어 버린, 바울의 기독교가 서서히 불을 지피고 있었다.
.예수가 가르쳤던 것(들)은 무엇이었나? 이것은 => 예수 가르침 : 전승에도, 또 그것을 접하고 기록하는 자도, 주관이 실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그런 예수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무얼 가르쳤나? 이것은 《예수에 대한 것(들)》 – 특히, 이것에 대한 주관성이 들어간 자료들과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기록하는 자(들)의 주관 역시, 반드시 들어 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예수에 대한 것들은 그들 생각과 함께 편집되어 왔던 것이다.
예수가 인류애 (Humanity)를 말하고자 했다고? Never & Ever!! 아니다.
.갈릴리에서 태어나 자라온 나사렛사람 예수는 어느 누구보다도 갈릴리 동포들의 처참한 생활 모습을 보고 자라왔고, 그것이 그에게 동포애 (Brotherhood)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원동력으로 변화해 갔다.
.그가 대상을 이끌고 장사하던 그의 친척을 따라 여러 지역을 다녔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의 갈릴리 동포들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동포애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에 대한 기록의 범위를 봐도 그렇다. 거의가 갈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때의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보다도, 당시 비참한 생활 속에서 하루를 연명하길 바라던 갈릴리 하루 삶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일용할 양식”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갈릴리 길위로 떠 밀게 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동포애 (Brotherhood)다. 그 처참한 당시 갈릴리 사람들 삶속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면, 어느 누구나 그래야만 했던, 예수의 처지를 알게 될 것이다. (전태일 선생님과 이태석 선생님이 생각난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비록, 선택의 의지마저 미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지만, Not ‘Good Luck’, ‘신의 가호’가 아닌, But ‘Good Courge’, 예수님이 주신 ‘용기’로 살아가라. 천지은 (대자연의 기원 天地恩)ㆍ부모은 (어버이 父母恩)ㆍ동포은 (형제의식 同胞恩)ㆍ법률은 (만유의 자연법칙 法律恩)과 함께…
※ 소망의 예수, 교리에 가두다
과학의 속성 (성질) 입니다.
.“정치나 종교에 있어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 혹은 지배자들이, 그들에게 불편한 생각들을 억압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지만, 그것들은 지식에 이르는 길은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의 노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과학은 스스로 수정하는 작업입니다.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모든 새로운 아이디어가 엄격한 증거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누가 근본적인 통찰력을 발견할지는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과학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 칼 세이건(Carl Sagan)
“Many hypotheses proposed by scientists as well as by non-scientists turn out to be wrong. But science is a self-correcting enterprise. To be accepted, all new ideas must survive rigorous standards of evidence. The worst aspect of the Velikovsky affair is not that his hypotheses were wrong or in contradiction to firmly established facts, but that some who called themselves scientists attempted to suppress Velikovsky’s work. Science is generated by and devoted to free inquiry: the idea that any hypothesis, no matter how strange, deserves to be considered on its merits. The suppression of uncomfortable ideas may be common in religion and politics, but it is not the path to knowledge; it has no place in the endeavor of science. We do not know in advance who will discover fundamental new insights.”
발제 : 제임스강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