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지각의 현상학
원제 :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모리스 메를로 퐁티 / 문학과지성사 / 2002.12.20
메를로 퐁티의 신체 현상학은 세계와의 직접적이고 시원적인 접촉을 회복하고 그 접촉에 철학적 지위를 부여하는데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인간을 육화된 정신으로 확립하고 철학의 오랜 멍에였던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넘어서는 기념비적 대성과를 거두었다. 후설이 자연주의의 위협에대한 응전으로서 현상학을 창시한 것처럼 메를로퐁티는 경험주의 철학과 주지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신체의 현상학을 내세웠다. 그는 지각적 경험을 고전적 편견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극복하고 객관주의 철학의 뿌리를 분명히 하며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해명하고자 신체의 현상으로 복귀했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전통 철학의 도식과 접근, 범주와 개념을 현상학적으로 비판하면서 선험철학을 갱신시켰다. 특히 의식과 인식 그리고 세계를 체험된 신체에 복귀시키는 현상학의 놀라운 능력은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입증했고 철학과 현상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철학이 결코 삶의 무용한 반복이 아님은 틀림 없으리라.

○ 목차
서문:현상학이란 무엇인가/11
서론:고전적 편견들과 현상으로의 복귀
감각/37
연합과 기억의 투사/51
주의와 판단/70
현상적 장/104
제1부 신체
서론/123
대상으로서의 신체와 기계론적 생리학/131
신체의 경험과 고전적 심리학/154
고유한 신체의 공간성, 그리고 운동성/165
고유한 신체의 종합/235
성적 존재로서의 신체/244
표현으로서의 신체,그리고 언사/272
제2부 지각된 세계
서론 신체론은 이미 지각론이다/311
감각한다는 것/317
공간/370
사물과 자연적 세계/450
타인과 인간적 세계/518
제3부 대자 존재와 세계-에로-존재
코기토/551
시간성/612
자유/647
참고문헌/682
용어해설/690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대해서/696
옮긴이의 말/709

○ 저자소개: 모리스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Ponty)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현상학적 운동의 두 기념비적 저작을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의 로쉬포르 쉬르 메르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사르트르를 만나 현상학자로서의 길을 함께 걸었으나 나중에 정치적 적대자로 돌아서게 된다.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한 후 여러 국립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들 예컨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레이몽 아롱, 조르주 바타유, 자크 라캉, 에릭 베이유, 시몬느 드 보부아르, 알렉산더 코제브 등과 교유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1930년대 말에 후설의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평생 철학 사상의 기본 방향과 틀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여러 국립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행동의 구조 La Structure du comportement』(1942)를 저술했고, 그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지하 운동 시절에 『지각의 현상학』(1945)을 준비했다. 현상학의 두 대표 저작이 나온 이후 소르본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죽기 마지막 10년은 베르그송을 거쳐 라벨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프랑스 대학 철학 교수로 활동했다.
마지막 저술이자 논문은 『눈과 마음 LOeil et l’esprit』(1961)이고, 후기 사상을 담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Le Visible et l’invisible』 (1964)은 제자 클로드 르포 Claude Lefort에 의해 편집되어 유고작으로 발행되었다.
– 역자 : 류의근
경북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고, 버팔로 뉴욕 주립대학교 교환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신라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메를로-퐁티의 코기토 에르고 숨」 「메를로-퐁티: 시각과 회화」 「신오현의 메타철학」 등과 편역서로 『철학의 문제와 논증』 『현대 사회와 철학』 등이 있다.

○ 출판사 서평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현대 철학의 고전으로, 신체의 자기 체험과 그 구조를 기술한 명저이다. <지각의 현상학>은 의식 일변도로 흘러가던 서양 철학의 눈길을 신체로 되돌려놓는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후설의 선험적 의식으로부터 신체에로 이행하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출발점으로, 의식의 삶에서 신체의 삶으로의 전회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사르트르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으로부터 변별짓는다. 그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전통 철학의 도식과 접근, 범주와 개념을 현상학적으로 비판하면서 선험철학을 갱신시켰다. 이번에 출간한 <지각의 현상학> 한국어판에는 이 책의 주요 용어를 정리한 ‘용어 해설’과 메를로-퐁티의 철학 세계를 자세히 소개한 ‘메를로-퐁티의 철학에 대해서’가 실려 있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후자가 정신의 자기 운동과 그 구조를 상설한 것이라면, 전자는 신체의 자기 체험과 그 구조를 기술한 것이라고 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후자를 의식 중심주의로 대변되는 근세 철학의 완성본으로, 전자를 그 완성의 역전판으로 읽을 수도 있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의식 일변도의 서양 철학의 눈길과 발길을 신체로 되돌려놓는 신기원을 이룩한 역작이다. 그것은 서양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철학의 자기 변형을 초래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로티의 언어적 전회처럼 ‘신체적 전회’라고 명명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의 신체적 전회는 후설의 후기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하나의 사건으로서 현상학적 사유의 막힘없는 개방성을 실증함은 물론,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리면, “현상학을 실천하는 대로 존재하게 하면서” 서양 철학의 케케묵은 근본문제, 즉 경험주의와 주지주의의 기나긴 대립을 해결하는 데 빛을 던져주었다. “인식하는 정신은 하나의 육화된 정신이다”후설이 자연주의의 위협에 대한 응전으로서 현상학을 창시한 것처럼, 메를로-퐁티는 경험주의 철학과 주지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신체의 현상학을 내세웠다. 그는 지각적 경험을 ‘고전적 편견’으로 간주하며, 그것을 극복하고 객관주의 철학의 뿌리를 분명히 하며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해명하고자 ‘신체의 현상’으로 복귀했다. 후설의 선험적 의식으로부터 신체에로 이행하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선험적 자아에서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선험적 의식을 역구성하는 데서 성립한다. 아니, 그 이상을 이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독자의 평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모리스 메를로퐁티의『지각의 현상학』
서문: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1.현상학의 개념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이 양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가령, 현상학은 대상의 이념적 존재 방식인 ‘본질’을 탐구하는 동시에, 대상의 현실적 존재 방식인 ‘사실성’에 주목한다. 현상학은 세계에 대한 순수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일상에서 취하는 자연적 태도에 대해 ‘판단 중지’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우리가 ‘언제나 이미’ 일상에서 세계와의 소박한 접촉을 성취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현상학은 유럽 학문의 위기에 맞서 모든 지식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하는 ‘엄밀학’을 지향하는 동시에, 어떠한 학문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이념을 내세워 우리의 경험에 대한 ‘순수 기술’을 시도한다. 이러한 양면적 성격은 때때로 성급한 독자들이 현상학을 겉멋만 가득한 우리 시대의 신화와 유행 정도로 여기도록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현상학은 뚜렷한 자기 규정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에게 과장된 명성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다급한 독자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학설을 조망한다는 생각을 포기할 것이며, 자기 규정에도 이르지 못한 철학이 그 주위에 나도는 모든 평판을 과연 받을 만한가 하고 그리고 오히려 신화와 유행이 문제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15) 그러나 현상학은 사유를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그 가치가 확인되는 일종의 ‘실천’이다. “현상학은 실천으로 존재하며, 사고의 방식 또는 유형으로 인지되고, 완전한 철학적 의식에 도달하기 전에는 다만 운동으로 존재한다.”(메를로퐁티, 2002: 15, 원저자 강조) 현상학을 단일한 이론적 결과물의 형태로 고정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현상학’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현상학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작업은 현상학이 우리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철학이이 아니라, 헤겔, 키에르케고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등 이전의 철학 속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유와 연속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의 몇몇 동시대인들이 후설 또는 하이데거를 읽게 되는 경우, 새로운 철학과 해우하는 느낌을 갖게 되기보다 그들이 스스로 기다렸던 바를 인지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바와 같이 그렇게 우리에 대한 현상학을 확고부동하게 하고 객관화하는 것이 문제이지, 텍스트에 나오는 인용들을 세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현상학은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 따라서 현상학의 유명한 주제들을 마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 구체화시켜보자. 아마도 우리는 그때서야 왜 현상학이 문제와 희망의 시작 단계에 그토록 오래 머물러 있었는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15, 원저자 강조)

2.순수 기술
‘순수 기술’은 현상학을 성립시키는 방법이다. 현상학은 학문적 관점으로부터 제시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을 비판하기 위해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 체험으로부터 모든 대상 영역을 새롭게 정초한다. 가령, 우리 자신을 생물학, 동물학, 심리학, 사회학의 대상으로 애초부터 규정하고자 하는 태도는 그 학문들이 전제하는 선입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살아 있는 존재’ 혹은 ‘인간’ 같은 용어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의식의 관점을 상정한 채 우리 자신을 세계의 계기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독립된 세계를 상정하는 입장은 허구적이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 우리는 지각에 주어진 세계 너머에 세계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참이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실재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는 사물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실재’라고 일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적 원천이며 나의 실존은 나의 이전의 행적에서 나의 사회적·물리적 환경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향해 움직이고 그것들을 유지시킨다. [……] 그러므로 나에 대한 존재가 바로 ‘존재’가 나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의미이다.”(메를로퐁티, 2002, 16) 따라서 ‘사물 그 자체로’ 복귀하고자 하는 시도는 바로 우리 자신과 독립된 세계를 상정하는 의식의 관점을 벗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를 기술하고자 한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물 그 자체로 복귀한다는 것은 인식이 언제나 말하고 있는, 인식 이전의 세계로 복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숲, 초원, 강이 무엇인가를 맨 먼저 배우게 되었던 시골 풍경으로부터 지리학이 시작된 것처럼, 모든 학문적 규정이 추상적이고 파생적인 기호 언어로 되고 마는 그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16)
현상학이 강조하는 ‘순수 기술’은 데카르트와 칸트가 제시한 ‘반성적 분석’과 구별된다. 반성적 분석은 ‘주관’ 혹은 ‘의식’을 실재로부터 떼어내어 순수한 내적 영역을 바탕으로 실재를 구성하고자 한다. 즉, 우리는 가장 확실한 내적 영역으로부터 보다 덜 확실한 세계를 향해 일방향적으로 나아간다. 세계의 확실성은 내적 영역의 확실성을 통해 보장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 주관과 세계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해, 양면적이 아니다. 양면적이라면 데카르트에 있어서 세계의 확실성은 이와 동시에 코기토의 확실성과 함께 주어졌을 것이고 칸트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반성적 분석은 그 경험과 구별되는 가능 조건으로서의 주관에게로 되돌아가고, 보편적 종합은 이 종합이 없으면 어떠한 세계도 없다는 것을 보이게 한다. 반성적 분석은 이 정도에서 우리의 경험에 머무르기를 그치며 보고하는 대신 재구성을 제공한다.”(메를로퐁티, 2002: 17) 그러나 이러한 절차는 세계가 우리의 구성에 앞서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반성적 분석은 직접적 체험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계를 완전히 역방향으로부터 탐구하고자 하는 작위적 시도일 뿐이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반성적 분석은 그에 앞서 있어야 할 구성의 길을 역방향에서 추적한다고 믿고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내적 인간’에게서, 항상 바로 자신이었던 구성하는 능력에 도달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반성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존재와 시간의 이편에 있는 건드릴 수 없는 주체성의 자리를 새롭게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소박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출발 의식을 잃어버리는 불완전한 반성이라 해도 좋겠다.(메를로퐁티, 2002: 17)
순수 기술은 반성적 분석과 달리 실재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지각은 결코 내적 영역으로부터 세계를 구성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는 모든 구성과 구축 작업 이전에 우리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세계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해 내적 영역의 확실성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우리 자신과 독립된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세계가 바로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 체험은 언제나 이미 실재와의 소박한 접촉을 성취하고 있다. “실재는 기술해야 하는 것이지 구성하거나 구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지각을 판단의, 행위의, 술어의 질서에 속하는 종합과 같은 것이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메를로퐁티, 2002: 18)
직접적 체험을 넘어서 실재를 구성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회의주의를 발생시킨다. 애초에 우리 자신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세계 뒤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각에 주어지는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채 의식이 도달해야 하는 세계가 따로 남겨져 있는 것처럼 상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러한 생각이야 말로 잘못된 형이상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생생하게 주어지는 일상의 세계를 허구라고 아무런 근거 없이 의심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지각의 현실성이 ‘표상’의 내재적 일관성에만 기초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망설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나는 나의 개연적 추측에 내맡겨진 채 끊임없이 환상적 종합을 해체해야 하며, 내가 사전에 배제했던 이상 현상에 대하여 현실성을 도로 물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메를로퐁티, 2002: 18) 따라서 우리는 데카르트와 칸트가 제시한 반성적 분석을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실재’, ‘지각’, ‘세계’, ‘진리’는 순수 기술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실재는 잘 짜여진 직물이며 가장 놀라운 현상들을 첨가하기 위하여, 가장 그럴듯한 우리의 상상을 거부하기 위하여 우리의 판단을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다. 지각은 세계의 학문이 아니며 행위마저도 아니고 심사숙고 후의 입장에 대한 파악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행위가 떨어져 나오는 기초이며 모든 행위가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구성의 법칙을 내 수중에 넣어 가지고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 환경이며 나의 모든 사유의 장이고 나의 모든 명시적인 지각의 장이다. 진리는 ‘내적 인간’에 ‘거주’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말하면, 내적 인간이란 없으며 인간은 세계에 있고 자신을 아는 것은 세계 내에서이다.(메를로퐁티, 2002: 18-19)

3.현상학적 환원
순수 기술은 직접적 체험 속에서 실재와의 소박한 접촉을 성취하고 있는 ‘선험적 의식’을 드러낸다. 선험적 의식은 학문적 관점을 벗어나 완전히 투명한 세계를 지각한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세계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은 대상으로 주어진다. “오랫동안 환원은 선험적 의식에로의 복귀로서 나타나고 그 앞에서 세계는 절대적 투명성으로 펼쳐지거니와, 그 투명성은 철학자가 통각들의 결과를 기초로 해서 재구성하는 데 책임을 지는 그런 일련의 통각들에 의해서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철저하게 생명을 불어넣는 투명성이다.”(메를로퐁티, 2002: 19) 선험적 의식이 지각하는 실재는 ‘의미 세계’이다. 순수 기술을 통해 주어진 세계는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대상으로 여겨질 수 없다. 즉, 우리가 세계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따라 세계는 우리에 대해 여러 가지 면모를 드러낸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세계는 우리에 대해 수많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 세계’ 뒤편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의미 세계가 곧 실재이고, 실재가 곧 의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질료hylé를 고차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 부여Sinnengebung로, 의식을 규정하게 될 의미의 능동적 작용으로 파악함일 것이며, 세계는 ‘의미 세계signification monde’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19) 따라서 현상학에는 ‘실재론’과 ‘관념론’의 특징이 모두 포함된다. 한편으로, 현상학은 세계가 우리에게 순수 기술을 통해 주어진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재론적 특징을 지닌다. 가령, 폴과 피에르는 내적 영역으로부터 서로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적 세계를 모두 직접적으로 지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은 세계가 선험적 의식을 퉁해 이루어지는 의미 부여에 의존한다고 지적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 특징을 지닌다. 가령, 폴과 피에르는 ‘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단일한 체계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각각 두 가지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현상학적 환원은 세계를, 폴과 피에르에게로 분할되지 않는 그리고 그들의 조망이 그 안에서 다시 나누어지게 되는, 또한 ‘폴의 의식’과 ‘피에르의 의식’이 서로 소통하게 되는 가치의 통일성으로서 다루는 선험적 관념론의 의미에서 관념론적일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19) 즉, 우리는 현상학을 세계의 불투명성과 초월성을 제거한 ‘모순 없는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폴과 피에르는 모두 실재를 직접적으로 지각한 상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기술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의식인 한, 말하자면 어떤 사물이 나에 대하여 의미를 가지는 한, 나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지 않으며 피에르도 폴도 아니고 ‘다른’ 의식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세계에 직접적 현전들이고 그 세계는 정의상 진리의 체계이면서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순 없는 선험적 관념론은 세계의 불투명성과 초월성을 제거한다. 세계는 우리가 스스로 그려내는 대로의 그것이지만 인간으로서 또는 경험적 주관으로서의 우리가 그려내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의 빛이자 일자(一者)를 나누지 않고 참여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그려내는 대로의 세계인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20)
‘빛’은 현상학이 세계를 기술하는 방식을 해명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은유 중 하나이다. 순수 기술은 마치 대상에 빛을 비추는 작업에 비교될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원천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는 빛 속에서 이미 밝혀진 부분과 어둠 속에서 아직 남겨진 부분을 지닐 뿐이다. 따라서 빛이 더 밝게 비춰질수록 대상은 더 다채롭게 드러난다. 순수 기술이 더 다양하게 수행될수록 실재는 더 풍요롭게 존재한다. 의미 세계는 선험적 의식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의미 부여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과 자세의 배후에는 어떤 것도 숨겨져 있지 않으며 나에게 접근될 수 없는 어떤 풍경도 없거니와 다만 빛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인 음영(陰影)만이 있을 뿐이다.”(메를로퐁티, 2002: 20)
‘타자’의 문제 역시 세계의 존재와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반성적 분석은 타자를 코기토로부터 구성된 대상으로 평가하였다. “지금까지 코기토는 타자의 지각을 평가절하하고 있고 나에게 자아가 자아 자신에게만 접근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갖는 생각과, 적어도 궁극적 의미에서는 확실하게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메를로퐁티, 2002: 21) 그러나 ‘코기토’라고 일컬어지는 관점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아무런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다. 나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세계와 타자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세계는 동등한 의의를 지닌다. 두 관점은 모두 세계를 드러내는 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나의 관점을 타자의 관점보다 근본적 층위에 놓여 있는 ‘유클리드의 점’ 따위로 상정해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관점은 타자의 관점과 함께 세계에 참여한다. 두 관점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주관적 대화는 나의 관점에 내재된 주관성을 극복하도록 자극하여 실재를 점점 풍성하게 밝혀나간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진정한 코기토는 주관의 존재를, 그가 가지고 있는 존재한다는 사고에 의해서 규정하지 않으며, 세계의 확실성을 세계에 대한 사고의 확실성으로 바꾸지도 않고 필경 세계 자체를 의미 세계로 대체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나의 사고 자체를 파기할 수 없는 사실로서 인식하고 나를 ‘세계-에로-존재être au monde’로 발견하면서 모든 종류의 관념론을 제거한다.(메를로퐁티, 2002: 22)
‘현상학적 환원’은 판단중지를 통해 우리 자신을 선험적 의식으로 자각하는 작업이다. 내적 영역으로부터 세계와 타자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는다. 반성적 분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는 세계, 타자, 의식이 왜곡된 형태로 이해될 뿐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와 칸트가 전제한 입장에 대해 판단중지를 선언한 채 상식과 자연적 태도를 회복하고자 해야 한다. 즉, ‘세계’는 지각 너머에 놓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지각 속에서 언제나 이미 주어지고 있는 지평이다. ‘타자’는 코기토로부터 구성되는 대상이 아니라, 코기토와 함께 세계를 밝히는 주체이다. ‘의식’은 실재와 동떨어진 시선이 아니라, 실재에 참여하는 관계이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우리를 통각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은 바로 그 운동을 중지시키고 거기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후설이 자주 말하듯 가담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며 괄호 바깥에 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철저히 세계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식과 자연적 태도의 확실성을 단념해서가 아니라──정반대로 그것들은 철학의 탐구 주제이다──오히려 그것들이 모든 사유에 전제되어 있는 것들로서 ‘당연한 것으로’ 간과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것들을 소생시키고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한순간이라도 행동을 삼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메를로퐁티, 2002: 22)
그러나 현상학적 환원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작업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선험적 의식은 자신이 지닌 모든 사유를 검토할 수 없다. 미처 주목받지 못한 선입견은 현상학적 환원을 지나친 채 삶을 구성하는 요소로 사용되어버리고 만다.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다. 이것이 후설이 환원의 가능성을 항상 재차 물었던 이유이다. 우리들이 절대적 정신이라면 환원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정반대로, 우리는 세계에로 있기 때문에, 진실로 우리의 반성은 스스로 끌어대려고 애쓰는 시간적 흐름 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후설이 말하는 대로 함께 흐르기sich einströmen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사유를 포함하는 사유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메를로퐁티, 2002: 23) 따라서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을 매 순간 끊임없이 새롭게 수행할 수밖에 없다. 현상학은 특정한 시점에서 완결되는 체계가 아니다. 이전 사유는 더 철저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새로운 사유로 대체될 뿐이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후설의 미발표 저작은 다시 한 번 철학자는 영원한 초보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는, 일반이이건 학자이건 그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철학은 지금까지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당연하게 여겨서도 안 되며, 철학이란 그 자신이 시작함으로써 새로워지는 실험이고, 그 시작을 기술하는 데서 전적으로 성립하며, 마침내 철저한 반성은 철학의 최초의 항구적이며 종국적 상황인 비반성적 삶에 대한 자신의 의존 의식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상학적 환원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대로, 관념론적 철학의 공식이기는커녕 실존철학의 공식이다.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는 현상학적 환원을 기초로 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23-24)

4.형상적 환원
‘형상적 환원’은 선험적 의식을 바탕으로 본질직관을 수행하는 과정이다. 선험적 의식은 결코 자신 앞에 주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상하지 않는다. 대상은 선험적 의식을 통해 ‘본질’, ‘형상’, ‘이념’으로 지각된다. 가령, 눈앞에 책이 한 권 놓여 있다고 하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형체는 책의 앞면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의 앞면을 통해 ‘책’이라는 통일적 형상을 지각한다.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책의 뒷면조차 우리가 지각하는 통일적 형상 속에 언제나 이미 포함되어 있다. 선입견을 벗어난 순수 기술은 선험적 의식이 세계를 통일적 형상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지각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되는 세계는 이념의 영역인 것이다, “후설은 모든 환원이 선험적이자 동시에 필연적으로 형상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철학적 시선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위와 같은 세계론 및 우리가 규정하는 세계의 관심과 하나 되기를 그만두지 않고서는, 세계를 그 자체 하나의 광경으로서 나타나도록 하는 우리의 참여 저편으로 물러나지 않고서는, 그리고 우리의 실존의 사실에서 본성에로, 현존Dasein에서 본질Wesen에로 이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24) 우리는 살아 있는 체험 바깥의 다른 영역에서 본질을 찾고자 할 필요가 없다. 본질직관은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을 통해 언제나 이미 수행되고 있다. 가령, 논리실증주의는 “우리는 의식이다.”와 같은 유사 통사론적 문장을 유의미한 진술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식의 본질은 논리적 분석 이후에야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상학은 의식에 대한 직접적 체험을 다른 영역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의식의 본질은 모든 종류의 분석에 앞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주어지고 있다고 지적된다. “우리가 의식이라는 언어를 습득해 그 말과 개념에 궁극적으로 넘겨준 의미의 활주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에 접근하는 직접적 수단을 갖고 있으며,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가 존재한다는 그런 의식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고, 언어의 모든 의미가 측정되는 것은 이러한 경험 위에서이며 언어가 우리에게 몇 가지를 말하게라도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다.”(메를로퐁티, 2002: 25) 즉, 선험적 의식에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대상은 본질이다. 생생하게 주어지는 실재는 형상이다. 세계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념의 영역에 이른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의식이란 낱말의 어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닐 것이고 실제적인 자기 현전, 즉 의식이란 말과 개념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인 나의 의식의 사실을 회복하는 것이리라. 세계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논의의 주제로 삼으면서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관념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주제화에 앞서 그것의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 대한 사실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25)
존재와 본질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형상적 환원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이 곧 본질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을 넘어서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의미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다. 지각 속에서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을 성취하고 있다. ‘꿈’과 ‘실재’가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회의하고자 하는 상황에서조차 본질직관은 필연적으로 전제된다. 모든 지각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과 실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형상적 환원은 모든 복귀에 앞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 나타나게 하려는 결단이며, 반성과 의식의 비반성적 삶을 동등시하려는 야심이다. 나는 세계를 겨냥하고 지각한다. 내가 감각주의와 더불어 ‘의식의 상태’만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나의 지각과 꿈을 ‘기준’에 의해 구별하고자 한다면, 나는 세계의 현상을 놓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꿈’과 ‘실재’를 말할 수 있고 상상과 현실의 구별에 관해 물을 수 있으며 ‘실재적인 것’을 의문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구별이 분석에 앞서 이미 나에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고 내가 실재의 경험을 상상의 경험으로 가지기 때문이다.(메를로퐁티, 2002: 26)
회의주의가 발생할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 너머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실재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완전히 허구적이다. 선험적 의식에 생생하게 주어지는 세계가 바로 본질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선험적 의식은 직접적 체험 속에서 언제나 이미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 즉, 실재란 현상을 벗어난 장소에 따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 현상 뒤편에는 아무것도 감추어져 있지 않다. 세계가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선험적 의식이 매 순간 본질직관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리를 의심할 수 있다. 지각적 체험을 ‘환상’일지 모른다고 의심하기 위해서조차 ‘환상’과 ‘진리’ 사이의 구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가장 극단적 회의주의에서조차 진리가 의심에 앞서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우리가 세계를 정말로 지각하는가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명증성이 진정 진리의 명증성인가, 또는 우리 정신의 장난 때문에 우리에게 명증적인 것이 몇몇 진리 그 자체와 관련해서는 환상적이지나 않나 하고 의아스럽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환상을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환상을 인식했기 때문이요, 같은 시간에 참된 것으로 입증된 몇몇 지각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틀릴까 의심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오류를 폭로하는 우리의 능력을 동시에 입증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를 진리로부터 추방시키는 것일 수 없다. 우리는 진리 안에 있으며 명증은 ‘진리의 체험’이다. 지각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지각이 참된 것으로 가정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리에의 접근으로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26-27)

5.지향성
현상학은 선험적 의식이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지향성’ 개념을 통해 강조한다. 여기서 지향성이란 단순히 대상 없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현상학 이전에도 대상 없는 의식에 대한 비판은 자주 제기되었다. 가령, (1) 칸트의 「관념론 논박」은 외적 지각이 내적 지각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지적하여 대상이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의식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잡다에 끊임없이 통일성을 부여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2) 현상학의 지향성 개념은 대상 없는 의식에 대한 비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러한 입장은 의식이 그 자체로 통일성을 지닌 대상과 만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향성을 가능적 대상에 대한 칸트적 관계와 구별짓는 것은 세계의 통일이 인식에 의해서 그리고 명백한 확인 행위 속에서 정립되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서 체험되고 있다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28) 즉, 의식은 대상이 지닌 통일성을 구성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각을 통해 만나고 있는 대상은 실재이다. 의식과 대상이 언제나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특정한 시점에 이를 때에야 비로소 실재에 도달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통일성은 의식의 활동을 통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니라, 의식의 활동 속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칸트가 제시한 ‘작용적 지향성’과 현상학이 강조하는 ‘기능적 지향성’을 구별해야 한다. 현상학에서 지향성이란 결코 대상을 구성하는 활동이 아니다. 의식이 잡다로부터 대상을 구성한다는 주장은 지향성이 지닌 의의를 철저하게 내세우고 있지 못하다. 대상은 구성의 과정에서 특정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의식에 주어질 뿐이다. 오히려 의식과 대상이 언제나 이미 관계를 맺고 있기 위해서는 잡다 이전에 사물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 대상이 지닌 통일성은 의식이 수행하는 구성에 앞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후설은 우리의 판단의 지향성이자 자발적 입장에서 우리가 장악하는 지향성인, 『순수이성비판』이 말했던 유일한 지향성, 즉 작용적 지향성(l’intentionalité d’acte)과, 세계와 우리의 삶의 선술어적·자연적 통일을 형성하고, 객관적 인식에서보다는 우리의 욕망, 평가, 풍경에서 보다 더 분명히 나타나며, 우리의 인식이 정확한 언어로 번역하려고 애쓰는 맥락을 제공하는 지향성인, 기능적 지향성(l’intentionalité opérante)을 구별하게 된다.”(메를로퐁티, 2002: 28-29) 대상은 언제나 이미 통일성을 바탕으로 이해된다. 현상학은 지향성 개념을 통해 대상이 ‘의미’ 속에서 의식에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우리는 결코 잡다를 지각하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대상은 아무런 의미 없이 나열된 감각의 파노라마가 아니다. 의식은 매 순간 통일성 속에서 성립하고 있는 의미를 파악한다. 가장 순수한 지각이란 잡다에 대한 객관적 표상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총체적 이해이다. “이러한 확장된 지향성의 개념에 의해서 현상학적 ‘이해’는 ‘진실하고 변함없는 자연들’에 국한되어 있는 고전적 ‘지적 작용’과 구별된다. [……] 어떤 지각된 사물, 어떤 역사적 사건 또는 어떤 학설이 문제로 되어 있건 말건, 이해한다는 것은 총체적 의도──예의 그것들이 표상에 대해 무엇인가 하는 것, 지각된 사물의 ‘성질들,’ 무수한 ‘역사적 사실들,’ 어떤 이론이 소개한 ‘사상들’뿐만 아니라 조약돌, 유리, 밀랍 조각 등의 성질들에서, 모든 혁명적 사실들에서, 어떤 철학자의 사상 전체에서 표현되는 유일한 존재 방식──를 다시 붇잡는다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29) 지향성 개념은 역사가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역사가는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물리적·수학적 법칙에 따라 기술하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지닌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역사의 차원들은 지향성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미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의미 있게 이해한다는 사실이 역사에 대한 기술을 가능하게 만든다. “개개의 문명의 경우에는 저마다 헤겔적 의미의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인데, 말하자면, 객관적 사유로 접근 가능한 물리적·수학적 법칙이 아니라 타자, 자연, 시간, 죽음에 관한 유일한 행동의 공식, 즉 역사가가 되찾아서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세계에 관한 어떤 형상화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차원들이다. 이 차원들과 관련해서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 어떤 말도 없으며, 습관 상태이든 방심 상태이든 어떤 인간적 몸짓에도 의미가 없지 않다.”(메를로퐁티, 2002: 29) 즉, 우리는 언제나 이미 대상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대상과 관계 맺고 있는 의식이란 곧 대상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의식이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결국 역사는 현재에서 분리 불가능하듯이 연속에서 분리불가능하다. 역사의 근본적 차원에 관해서 모든 역사적 시기들은 유일무이한 실존의 현시 또는 유일한 연극의 삽화로서 나타나며, 우리는 그 연극에 대단원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로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에 선고되어 있고 역사 속에서 이름을 갖지 않는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메를로퐁티, 2002: 31)

6.평가
우리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의 딜레마를 해소하고자 해야 한다. 현상학은 대상의 이념적 존재 방식과 현실적 존재 방식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순수 기술’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세계 너머에 실재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현상학적 환원’은 학문들이 상정한 선입견을 벗어나 세계, 타자, 의식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한다. ‘형상적 환원’은 선험적 의식이 매 순간 본질직관을 수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향성’은 우리가 만나고 있는 대상이 곧 의미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세계는 지각 너머에 놓여 있는 순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선험적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실재는 언제나 이미 의미 세계이다. “현상학적 세계란 순수 존재가 아니라 나의 경험들의 교차, 그리고 나의 경험들과 타자의 경험 사이의 상호 맞물림을 통한 교차에서 비쳐 드러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는 나의 지나간 경험들을 나의 현재의 경험 속에서, 타인의 경험을 나의 경험 속에서 되찾음으로써 통일을 이루는 주체성과 상호 주체성으로부터 분리될 수가 없다.”(메를로퐁티, 2002: 31) 현상의 뒤편에 감추어진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 그 자체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는 세계가 우리에게 직접적 체험 속에서 주어지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의식이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어떠한 이론도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내적 영역의 확실성으로부터 세계의 확실성을 보장하고자 하는 태도는 의식에 생생하게 주어지는 세계를 간과한 채 지각 너머에 실재를 허구적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선입견을 벗어나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체험에 주목해야 한다.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의 딜레마는 우리가 세계와의 소박한 접촉을 회복하는 순간 사라진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철학은 그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처럼 현실적이거나 실재적이다. 어떠한 설명적 가설도 이 미완성의 세계를 총체화하고 사유하기 위해서 바로 그 세계를 회복하는 행위 그 자체보다 분명하지 않다. 합리성은 문제가 아니며 그 배후에는 우리가 연역적으로 규정해야 할 미지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줄곧 경험들과의 관계의 기적을 목격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우리보다 그것이 어떠한가를 더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관계들의 매듭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이성은 문제로 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것들은 신비라고 말해두자. 그러나 바로 그 신비가 세계와 이성을 규정한다. 그리고 어떤 ‘해결책’을 통해 그 신비를 없애는 문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해결의 피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메를로퐁티, 2002: 32)
따라서 현상학이란 실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세계를 직접적 체험 속에서 기술하기 위한 시도는 결코 완성에 도달하지 않는다. 모든 사유를 반성하여 완전히 순수한 현상학적 환원을 성취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계를 남김없이 포착하고자 하는 입장은 절대적 정신과 같은 ‘신의 관점’을 허구적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현상학적 환원은 무한히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철학이 받아들이고 있는 선입견을 매 순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세계를 이전보다 더 순수하게 기술하고자 해야 한다. ‘사물 그 자체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는 끝없는 운동으로 남는다.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계시는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기술보다 더 풍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상학은 세계의 계시로서 그 자신에 근거하고 더욱이 그 자신을 정초한다. 모든 인식은 요청의 ‘지반’에 의거하고 궁극적으로는 합리성의 최초의 확립인 우리와 세계의 의사 소통에 의거한다. 철학은 철저한 반성이기에 원칙적으로 자신의 원천을 금하는 셈이다. 그러나 철학은 있으되 역시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세계와 구성된 이성을 또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모든 인식에 대하여 제기했던 질문을 그 자신에게 제기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무한 증폭할 것이며 후설이 말한 대로, 철학은 대화이자 끝없는 성찰일 것이고, 자신의 의도에 충실한 만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현상학의 미완성과 그 행보의 기동성은 실패의 신호가 아니며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학은 세계의 신비와 이성의 신비를 계시하는 것을 과제로 삼기 때문이다.(메를로퐁티, 2002: 33)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