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단상
시드니인문학교실 제2차 인문학여행 성료
10월 11~22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24일 (강릉 오죽헌·허난설헌생가·남양주 다산생가·천도교중앙대교당, 2박 3일) 진행
시드니인문학교실 (The Humanitas Class For the Korean Community in Sydney)은 제2차 인문학여행을 2023년 10월 11일부터 24일까지 이집트, 이탈리아, 한국에서 33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했다. 10월 11일부터 22일까지 이집트와 이탈리아에서 10박 12일간,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2박 3일) 한국의 강릉 오죽헌·허난설헌 생가, 남양주 다산생가,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 방문 등으로 진행됐다.
10월 11일 (수) 시드니공항에서 출발한 일행은 다음날인 10월 12일 (목) 한국과 미국, 몽골에서 참여한 일행들과 합류해 총 33명이 기념사진 촬영 후 제2차 인문학여행을 출발했다.
13일에는 경유지인 이탈리아에서 바티칸 시국 박물관, 성베드로대성당 방문 후 다빈치공항에서 이집트의 카이로로 향했다. 바티칸 시국 (라: Status Civitatis Vaticanæ)은 이탈리아의 로마 시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경 역할을 하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위요지 도시국가이다. 바티칸 시는 바티칸 언덕과 언덕 북쪽의 바티칸 평원을 포함하며, 총 면적은 0.44km2에 인구는 수백 명에 불과한 극소 국가로서 면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전세계의 주권 국가 중 가장 작다. 하지만 교황이 통치하는 일종의 신권 국가로,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이다.
14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아침을 맞은 일행은 폼페이 기둥, 대표적 콥틱교회 마가기념교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카이르베이 요새를 방문했다. 현재 폼페이우스의 기둥이 서 있는 이 자리는, 원래 2세기 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권력통치의 일환으로 창출해놓은 혼성의 신 세라피스를 모신 신전인 세라페움 (Sarapeum)이 있었다. 그런데 4세기 말엽 ‘헬레니즘의 다원주의적 가치관’과 ‘헤브라이즘의 절대주의적 가치관’ 사이에서 발생한 격심한 충돌로 인해 400개의 화강암 기둥이 서 있던 장대한 신전 건물은 파괴되어 버린 채, 지금은 단 한 개의 기둥만 남아 지난날의 영화를 묵시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한편 마가기념교회 (The Church of St. Mark)는 콥트교회 (Copt Church)의 중심이다. 카이로에는 콥틱교회 총 본산인 교황청이 있고, 그 안에 마가교회가 있다. 마가 요한은 사도 바울과 전도여행을 떠난 최초의 선교사였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 마가 요한이 알렉산드리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운 것을 시작해서 이집트 곳곳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 교황청 안에는 건물이 여러 채 있다. 교황청 앞에는 주후 1200년에 세운 루이스교회가 있고, 주후 1968년 그 인접 지역에 마가교회를 웅장하게 건축했다. 이 교회는 2층 전체가 본당이며, 1층은 마리아교회, 비쇼이교회 등 교회와 용도별 부속 사무실이 있다. 마가교회 뒤편 지하층에는 마가의 묘 (Shrine, 廟)가 있어 마가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후 여러 곳에 흩어진 유해를 모아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15일에는 카이로 기자의 피라미드 (멘카우라, 카프레, 쿠푸)와 스핑크스, 파피루스 공장, 나일강 범선유람, 이집트 문명사 박물관, 쓰레기마을 모카람 동굴교회 등을 방문 후 야간 침대칸 열차를 이용해 카이로에서 룩소르로 이동했다. 피라미드 (pyramid)는 일반적으로 정사각뿔 꼴의 고대 유적을 가리킨다. 피라미드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피라미스인데, 이집트인은 “메르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특히 기자의 3대 (멘카우라, 카프레, 쿠푸)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카이로 (Cairo)는 이집트와 아랍 연맹의 수도이며, 나일강의 물줄기가 여러 지류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이다. 서기 642년에 건설된 도시로, 도시권의 인구는 1700만에 달한다. 지금도 도시 인프라구축에 집중하며 팽창이 계속되고 있다. 기자의 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대표적인 파라오 시대 건축물이며, 한국 현대사와도 인연이 있는 도시인데,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언급한 국제 협약인 카이로 선언이 발표된 의미있는 곳으로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역사적 도시이다.
16일 야간열차에서 내려 룩소르에서 맞은 아침은 카이로와는 또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멤논의 거상, 왕가의 계곡, 하트셉수트 장제전, 카르낙신전, 룩소르신전 등을 방문 후 룩소르 공항에서 카이로 공항으로, 다시 이탈리아 베르가모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집트의 남부에 위치한 룩소르 (Luxor)는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해 왔으며 인구는 40만여 명이고, 도시의 면적은 416km2이다. 룩소르신전, 카르낙신전, 멤논의 거상 등을 포함한 유적들이 위치해 있고, 서안지역에는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있어 이집트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매년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찾고있며, 룩소르 국제 공항이 위치해 있다. 시민들은 주로 사탕수수 농사에 종사하고, 경제는 관광업에 의존하고 있다. 룩소르 일대는 “고대 테베와 네크로폴리스”로 묶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17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밀라노두오모성당, 유럽 오페라의 중심지 스칼라 극장, 빅토리아 엠마누엘2세 갤러리, 브레라미술관 등을 관람했다. 밀라노 (Milano)는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도시로, 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로,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 강이 이 도시를 흐르고 있다. 인구는 2009년 현재 130만 명으로 수도 로마 다음으로 많다. 다국적 도시로 유럽의 주요 도시이기도 한데 주요 교통수단이 밀라노를 통과하며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 있고, 밀라노는 금융과 많은 비지니스 사업들이 본사를 두고 있어 유럽에서 손꼽히는 도시이다.
18일에는 베니스 (베네치아)로 이동해 바포레토 전세선을 이용해 본섬에 도착, 산마르코성당, 산마르코광장 및 종탑, 탄식의 다리, 투갈레 궁정, 곤돌라 탑승, 전세선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을 가졌다. 영어명 베네치아 (Venice)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네토주 베네치아 광역시에 속하는 도시로, 베네토 주의 주도 (州都)이다.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다. 또한 세계적 관광지이며, 수상 도시이자 운하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베네치아는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로서,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 동안 유럽의 해상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레판토 해전에 휘말리며 유럽의 중앙 정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던 도시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비단, 향료, 밀을 거래하는 주요 창구였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였다. 나폴레옹 전쟁과 빈 회의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고, 1866년에 이탈리아가 통일되며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꼽힌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은 중세부터 유명했고, 물의 도시, 아드리아해의 여왕, 가면의 도시 등 다양한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 베네치아는 또한 예술, 건축 분야에서도 매우 지명도가 높은데,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유명한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고향이다. 다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수면이 올라가며 도시가 물에 잠기고 있고, 관광객들이 밀려 들어오며 환경 오염 등에 시달리고 있지만 베네치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시이자 상징으로 한 손에 꼽힌다.
19일 친퀘 테레 (Cinque Terre)로 이동해 아름다움 해변마을 다섯 곳 중 두 마을을 방문해 바닷가 마을의 정취를 즐겼다. 친퀘 테레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청정지역으로 13세기 기원의 마을들이다. 친퀘 테레는 이탈리아 라스페치아 (La Spezia)의 서쪽에 있는 리구리아 지역에 위치하며, “다섯 개의 땅”은 몬테로소알마레 (Monterosso al Mare), 베르나차 (Vernazza), 코르닐리아 (Corniglia), 마나롤라 (Manarola), 리오마조레 (Riomaggiore) 5개의 마을이 해당된다. 사람들은 몇 세기 동안 절벽을 포함한 바위투성의 가파른 지형에서 테라스를 구축했다. 개발이 되지 않은 마을은 친퀘 테레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20일에는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프로렌스)에서 미켈란젤로 언덕, 우피치미술관, 시뇨리아 광장, 단테생가, 피렌체두우모성당, 산타크로체성당 등을 방문 후 로마로 이동했다. 피렌체 (Firenze, 영: Florence)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의 주도이다. 피렌체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인구는 38만 명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 명이다. 토스카나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메디치 가문이 다스렸고,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매년 수백만이 넘는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21일 로마에서는 대전차경기장, 고대로마 공화당터, 콜로세움, 포로 로마노 관람 후 다빈치공항으로 이동해 한국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로마 (Roma)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라치오주의 주도이며,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31 km2이고, 대도시의 인구는 400만이 넘지만 밀라노나 나폴리 대도시에 비해 면적이 3~4배 넓은 편이고 되려 로마시의 면적과 밀라노와 나폴리의 대도시의 면적이 비슷하므로 세 도시 모두 300만 정도로 비슷한 규모의 도시라 볼 수 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3000여년 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Caput mundi)’, ‘영원한 도시 (la Città Eterna)’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22일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해 곧 숙소 양양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에서 숙소 양양까지 이동하는 동안 홍길복 목사는 이집트와 이탈리아 방문중 기록한 여행일기를 읽어주며 여행중의 생각들을 나눴다. 한국에서는 강릉 오죽헌 · 허난설헌 생가, 남양주 다산생가,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 등을 방문한다.
23일 강릉 오죽헌과 허난설헌의 생가를 방문했다. 오죽헌에서는 신사임당의 발자취와 그의 아들 율곡 (栗谷) 이이 (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 (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한국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 (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편 허난설헌 (許蘭雪軒, 1563 ~ 1589)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로 이달 (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 (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 (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해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24일에는 남양주 다산생가, 서울 천도교중앙대교당 등을 방문했다. 정약용 (丁若鏞, 1762 ~ 183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로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 (마현(馬峴),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출생해 관직에 있었으나 천주교와의 연류로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다. 이어 방문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18년 4월 5일 천도교 부구 (部區) 총회에서 새로운 교당을 짓기로 결의, 이 해 12월 1일에 개기식 (開基式)을 하였고, 1919년 7월에 착공하여, 1921년 2월에 준공, 2월 28일에 이사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대지 1,824평, 건평 212평이며, 기초는 화강석으로, 벽은 붉은 벽돌로, 지붕은 철근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지었다. 당시 총건축비는 22만 원 (사무실까지 27만 원)이 소요되었고 나머지는 3·1운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 일정까지 진행한 후 다함께 만찬교제를 나누고 시드니인문학교실 제2차 인문학여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