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매너의 역사 : 문명화과정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 신서원 / 2001.3.25

- 인간이 문명화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행 동양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매너
에 주목한 책
식사, 생리적기능, 코풀기, 침뱉기, 침실, 성관계, 공격본능 등과 관련 된 예절의 변천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특히 항목별로 풍부한 실례를 끌어들인 다음 각각의 사례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
○ 목차
‘문명’과 ‘문화’개념의 사회적 기원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개념 차이의 사회적 기원
-프랑스에서 문명개념의 사회적 기원
문명화 : 인간 행동양식의 특수한 변형
-‘예절’개념의 발전
-중세의 매너
-르네상스기 행동양식의 변화문제
-식사중의 행동
-생리적 기능에 대한 태도의변화
-코풀기에 대하여
-침뱉기에 대하여
-침실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성관계에 대한 태도의 변화
-공격본능의 변화
-기사적 삶의 한 풍경

○ 저자소개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 ~ 1990)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 1897년 6월 22일 ~ 1990년 8월 1일)는 유대계 독일인 사회학자로,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는 1897년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다.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철학과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신칸트학파 철학자 리하르트 회니히스발트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념과 개인 : Idee und Individuum’을 발표했다. 1925년 엘리아스는 당시 사회과학과 철학의 중심지였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가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문화사회학자인 알프레트 베버 밑에서 근대 과학의 발달에 관해 연구했으나, 1930년 이를 포기하고 친구였던 젊은 교수 카를 만하임을 따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그의 조교가 되었다. 엘리아스는 이곳에서 교수자격청구 논문으로 ‘궁정사회’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1933년 나치 집권으로 만하임의 사회학연구소가 문을 닫으면서 엘리아스도 파리로 도피했다. 1935년 다시 영국으로 망명한 엘리아스는 대작 ‘문명화 과정’을 써서 1939년에 출판했다.
그후 케임브리지에 머물며 여러 곳에서 강의하면서 집단심리치료 공부도 했다. 1954년 레스터 대학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었고 1962년 정년퇴임 때까지 이곳에서 8년간 강의했다.
일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사이에서만 회자되던 ‘문명화 과정’이 1969년 재출간되면서 엘리아스는 뒤늦게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현대 사회학계의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1977년에 ‘아도르노 상’을, 1987년엔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 상’을 수상했다. 그밖에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1970), ‘죽어가는 자의 고독’ (1982), ‘인간의 조건’ (1985), ‘개인의 사회’ (1987) 등을 저술을 남겼다.
1990년 8월 1일, 암스테르담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역자 : 유희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서양중세사학회·프랑스사학회·서양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제와 광대』 『서양 중세사 강의』(공저) 『서양의 가족과 성』(공저) 『몸으로 역사를 읽다』(공저)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서양 중세 문명』 『매너의 역사』 『몽타이유』 『거룩한 도둑질』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중세의 소외집단』(공역) 『기억의 장소』(공역)가 있다.

○ 독자의 평 1
“식탁 위로나 식탁에 침을 뱉지 마라.”
“손을 씻을 때 물그릇에 침을 뱉지 마라.”
“사냥꾼들처럼 식탁에다 침을 뱉지 마라.”
-술잔과 나이프는 깨끗이 닦에 오른쪽에 놓고 빵은 왼쪽에 놓아라
-손가락을 소스에 넣는 것은 촌스럽다. 필요한 음식을 나이프와 포크로 떠가야 한다.
-스푼으로 케익이나 파이가 제공되면 접시를 내밀거나 그 스푼을 받아서 음식을 접시에 놓고 스푼을 되돌려 주어라.
-식사 때는 냅킨이며 접시며 나이프며 스푼이며 포크를 사용해야 한다.
-빵은 왼쪽에 잔과 함께 나이프를 오른쪽에 놓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것을 식탁에 놓고 잠깐 자리를 뜨고 싶거나 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잘 놓고 싶을 때 하는 요령이다.
식사예절의 대표적 예는 손가락 대신 포크의 사용, 손수건이나 냅킨의 사용, 그리고 개인 그릇을 이용해 수프를 스푼으로 떠먹는 방식 등이다. 처음에 사람은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지만 그 다음에는 포크를 사용해 음식을 덜게 되었다. 손수건이나 냅킨도 애초에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도구로 기능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는 꼭 필요한 도구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수프를 먹는 법 또한 그릇을 공통으로 사용했지만 공통의 스푼을 사용하여 먹는 행위에서 다음엔 각자 개인 그릇에 덜어먹는 행동으로,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스푼을 한번 쓴 다음에는 다른 깨끗한 스푼을 이용하는 것으로 바뀌어갔다. 식사예절은 궁정에서 그 주변부로 퍼지는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비단 식사예절에 국한되지 않고 언어 습관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궁정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은 서로 영향을 끼쳤다. 다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차이는 프랑스가 궁정 언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데 비하여 독일은 비교적 문어에서만 황실과 대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언어는 상류 귀족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사회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습관에서도 문명화한 행동을 권장했던 이유는 위생적인 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행동의 기준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중심 계급, 보통 어떤 시대 상황 위에서 상층 계급이 이런 방향으로 변화하면 나머지는 그 변화를 따라가게 된다.

○ 독자의 평 2
‘문명 (文明)’이라는 단어는 참, 사실 여러모로 애매합니다. 사전상의 정의를 따라가자면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의 총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사실 잘 따져보면 우리는 이 문명이라는 단어를 그런 용도로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령 TV에서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문명’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문명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자연 고유의 상태’ 따위의 수식어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습은 점은 정작 이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도 나름에 물질적, 기술적 부분과 사회정치적인 틀들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내린 문명에 정의에 따라 우리는 이들을 또 하나의 문명이라고 불러야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왜죠? 우선 힘의 역학적인 관계에 따라 19-20세기에 서구열강이 동양을 식민지배한 역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구는 대포만 들이민 게 아니라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자신네들의 침략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함포로 동양의 나라들을 무력으로 찍어 누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 전쟁의 명분은 우월하게 발달한 자신들의 ‘문명’을 통해서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의 동양을 ‘문명화’시켜주기 위함이라는 데서 찾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문명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본래상의 정의와 아무 상관없이 실제 역사에서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할 때의 배경이란, 우월함과 지배라는 요소들로 얼룩진 개념이었다는 것입니다. 1789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죠? “병사들이여, 여러분들은 문명화에 막대한 결과를 가져올 정복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1 ‘문명’이란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 정부의 ‘도구’였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Wadie Said, 1935.11.1 ~ 2003.9.25]는 이러한 서구의 지배를 역사적이고 문헌학적 고증을 통해 고발하고자 했으며, 이는ㅡ현대의 고전이 된ㅡ『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1978)라는 저서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여기서 서구인들이 들먹인 ‘문명’이니 ‘진보’니 하는 개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들이 진행되었죠. 이는 인문학적으로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책을 시점으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담론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거든요. 뭐랄까, 동양인으로서 응당 그랬어야할 정의가 찾아온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중요하고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명’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단순히 제국주의 정부의 침략정당화를 위한 도구만으로 읽히기엔 아쉬운 점들이 많습니다. 우선 처음부터 서구인들이 자신들이 소위 ‘문명’이라 부르는 것들을 가지고 있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들은 로마제국의 종언이후 천년의 중세를 거친 다음에야 자신들이 ‘문명’이라 부르는 것들을 갖추게 됐습니다. 자그마치 ‘천년’이 걸렸지요. 이 거대한 시간을 통해서 흥미로운 가정을 하나 해볼 수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문명을 갖추기 전까진 야만이었을 것이다’라는 가정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은 제가 ‘문명’이란 말을 굉장히 폭넓게 정의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의 총체”라는 정의는 문명이라는 개념에 기술수준이며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종교적 이념과 관습을 모두 총괄하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매너’의 한 형태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렌즈를 좀 더 좁혀봅시다. 과학적 지식이나 각종 기술들을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치지만, 서양인들이 가진 식사예절, 대화예절, 손님을 대접하는 법, 잠자리에서 지켜야할 규칙 등과 같은 일련의 매너행위들은 그 기원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처음부터 다 갖추고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중세에 출판되었던 예절에 대한 모음집들에서 인용한 구절들입니다.
그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음료수를 입으로 불지 마라. 이런 짓은 피해야 할 나쁜 버릇이다. -『탄호이저의 시』中
뜯어먹던 음식을 남에게 대접하지 마라. -『이것이 훌륭한 식사매너이다 (S’ensuivent les contenances de la table)』中
식전이나 식사중이나 식후에,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게라도, 누구든지 계단과 복도나 작은 방을 소변이나 기타 오물로 더렵혀서는 안되고, 규정된 적절한 변소에서 일을 보아야 한다. – 델라 카사의 5개 국어판『예법전서』(제네바, 1609) 中
식탁 위로나 식탁에 침을 뱉지 마라. -『식사중인 소년』中
생각해보면 좀 어이없이 않습니까? 왜 이런 지극히 정상적인 것을 조언하지? 더 어이가 없는 점은 이런 식의 예의규범들이 단순히 어린아이를 타깃으로 적혀진 책들이 아니라 당시 일반대중들을 역시도 타깃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길가에서 대소변을 아무데나 누지 마세요’라는 조언을 하진 않습니다. 왜? 당연히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는 길가나 복도에서 대소변을 함부로 하지 말아 달라는 조언이 나옵니다. 이게 정말 골 때리는 사실인데, 이런 조언이나 예의규범이 문자로 명시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살인이 죄라는 조항이 법조문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살인을 행한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라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죠. 그리고 위의 모든 규범들이 이런 충격적인 중세의 일상 전체에 대한 다소 혐오스러운 상상을 가능케 해줍니다.
얘기를 좀 더 더하자면, 이 뿐만 아니라ㅡ믿기지 않겠지만ㅡ중세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발가벗은 채 집에서 목욕탕까지 가로질러 달려가는 일이 흔했으며, 16세기 전까지는 잠자리에서 잠옷 없이 홀라당 벗고 자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것으로 통용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책에는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함부로 옷을 벗지 마라는 예절규범이 명시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쯤 되면 성행위에 대한 인식은 말할 것도 없겠죠? 간단히 말해서 몸과 몸 사이에 존재하는 수치심의 장벽이 오늘날보다 심각할 정도로 낮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중세의 인간이 오늘날의 인간과 같은 매너를 갖게 된 것은 언제인가?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회적 기준에 적응하고 길들여졌기 때문에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식사법을 옛날에는 사회 전체가 수용․발전시키는 데 굼뜨고 힘이 들었다. 이것은 더 광범하고 더 중요한 행동양식뿐만 아니라, 포크처럼 사소하고 외견상 하찮아 보이는 물건에도 적용된다.
우선, 이렇듯 중세에서 현대로의 매너가 이행되는 시간은 아주, 아주 느렸습니다. 위에서 말했지만, 적어도 19-20세기에 보여주는 서구식 매너를 유럽인들이 갖추는 데는 자그마치 천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이걸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초자아가 되었지만, 이는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문명이 제시하는 규범을 따르는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던’ 것이지, 아무리 교육을 받는다손 쳐도 주위의 환경이 자신이 교육받은 것과 다르게 돌아가면 결국은 주위 환경과 마주하는 시간이 더 많기에, 교육받은 내용들이 전복되기 부지기수입니다. 중세에는 애당초 매너가 없었기 때문에, 정말이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천년”입니다.
자, 이쯤에서 이 매너란 것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매너가 뭡니까?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제가 봤을 때 매너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이 매너행위란 게 보통 의식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거리에 예쁜 여자가 지나간다고 그 여자에게 달려들어서 성행위를 시도하려고 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하지 않음에 있어서 지금 내가 만일 저 여자에게 성행위를 시도하면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나에게 불리하므로 행하지 않겠다’ 따위의 계산적인 판단을 머릿속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그냥”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치 “본능적인” 거부감 같은 것을 느낍니다. 이뿐인가요? 밖에 옷을 입고 나가고, 음식을 향해 기침하지 않고, 아무데서나 대소변을 보지 않는다와 같은 각종 매너형식들이 여러분들에겐 다 별 거부감 없이, 아주 자연스러운 어떤 것으로 소화됩니다. 여러분들 이걸 자연스럽게 행하지, 머릿속으로 무슨 계산을 하고 행하진 않잖아요? 또한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지요.
이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개념들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초자아 [superego]입니다. 여러분들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각종 공격적 욕구나 성충동들이 모두 사회적인 도덕이라든지 법률이라는 초자아에 의해서 통제됩니다. 이 초자아를 어기려고 하면 주로 ‘죄책감’의 방식으로 심리적 통제가 가해지게 되는데, 주로 나쁜 행동을 함으로 인해서 생기게 될 애정의 상실이나 벌에 대한 두려움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의 주된 이유가 되지요. 이런 식의 초자아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으면ㅡ위에서 든 예시들처럼ㅡ이게 하나의 ‘본성’처럼 굳어집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보이는 각종 행동들을 보면 이런 초자아가 결코 인간이 본성은 아니란 점이 확실해집니다. 모두 후천적인 ‘교육’의 결과이자, 초자아의 확립일 따름입니다.
사실, 우리가 쓰는 ‘문명화한’이라는 말과 ‘미개한’이라는 말은, ‘좋은’이라는 말과 ‘나쁜’이라는 말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대립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발전과정의 단계들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게 참 재미있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매너라는 의미에서 문명화란 위계질서가 아닌 게 됩니다. 악수를 하는 게 인사인 문명을 가진 측이 코를 비비를 인사문화를 가진 문명권에게 ‘야만’이라고 규정할 순 없는 겁니다. 왜? 이건 단지 각자의 마음속에 확립된 문명이라는 초자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지요. 아, 물론 악수하는 문명권에서 코를 비비는 인사에 대해서 심리적 거부감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심리적 거부감이 도덕적 올바르지 않음이라던가, 비(非)문명 내지 ‘미개한’이라는 형용사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 심리적 거부감이라는 메커니즘 자체가 초자아라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매너란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듯 일종의 ‘발전과정’들입니다. 매너라는 초자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게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또한 그 형식에서 어느 것들이 첨부되고 삭제되는지에 대한 일련의 발전과정들. 심리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의식’이 만들어지는 역사적 발전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근데, 매너를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매너의 첫 시작은 어디인가?” 아, 물론 태초의 인류가 공동체를 만들고 살면서 생겼을 ‘같은 부족민끼리는 죽이지 않는다, 때리지 않는다, 훔치지 않는다’ 따위의 아주 원초적인 형태로 태초의 매너란 게 존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묻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다소 복잡한 형식의 매너가 일반화된 이유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만 봐도 매너가 참 복잡하지 않습니까? 나이에 따라서 써야할 높임말이 다르고, 또한 행동거지들이 다 달라집니다.
중세에서 ‘훌륭한 행동양식’의 기준은, 후대의 모든 기준처럼, 아주 명백한 한 개념에 의해서 표현된다. 중세의 세속 상층계급은, 아니 적어도 그 선도집단의 일부는 이 개념을 통해 그들의 자화상ㅡ그들 자신의 평가로는, 그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ㅡ을 표현했다. 귀족의 자의식과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한 행동양식을 요약하는 개념은 ‘궁정예절 [불어로는 courtoisie, 영어로는 courtesy, 이탈리아어로는 cortezia)’이라는 말이다.
결국 복잡한 매너의 형식의 발전이라는 것은 과시로부터 시작합니다.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Bunde Veblen, 1857.7.30 ~ 1929.8.3.] 이 『유한계급론』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동력을 과시욕에서 보았듯이, 과시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들 중 하나입니다. 왜 인간은 더 추구하고 싶어 하는가? 왜 인간은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불안정한 미래를 대비해 미리 축적해두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뒤처지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더 가까운 발악이며, 이 불안감은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고 싶은 근본충동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 [Clinton Richard Dawkins, 1941.3.26 ~ ] 같은 생물학자는 이 근본충동을 암컷을 두고 유전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생존경쟁의 한 양태로 이해하죠. 뭐, 과시욕에 대한 근원이 어찌됐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핵심은 우리에게 과시욕이 존재하고,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과시에 대한 얘기를 조금만 더 풀어봅시다. 가령 소스타인 베블런은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도 지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지주계층은 ‘노동을 하지 않음’을 통해 노동을 하는 소작인들에게 부러움이 대상이 되고, 동시에 과시욕을 충족시킵니다. 또한 결혼할 여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밭갈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튼튼한 여자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녀린 여자를 택합니다. 노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여자를 부양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탄탄하다는 것에 대한 과시죠! 그리고 이런 게 오래 축적되면 이 여자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미인상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TV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 대부분이 이런 여자들이 아니던가요? 그 미인의 계보 가장 밑바닥에는 이런 계보적 역사가 깔려있습니다.
상류층의 종속은 또한 문명화의 행동양식과 수단들이 적어도 이러한 형성단계에서 취했던 이중적 모습을 설명해 준다. 즉 이 행동양식과 수단들은 어느 정도의 강박과 자제를 해명해 주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즉각 하급자들에 대한 무기로서의 차별수단이 되었다. 손수건이며 포크며 개인접시 이와 관련된 모든 도구들이 초창기에는 사회적으로 각별한 특권적 가치를 지닌 사치품이었다.
그렇다면 이 맥락에서 ‘매너’는 어떻게 통용되는가? 그것은 철저히 만들어집니다. 상류층 계급이 자신과 하층민을 구분하기 위한 하나의 구분선으로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령 코스요리를 생각해봅시다. 이탈리안 식으로 설명하자면 대략 “에페리띠프 (식전주)-안티파스타 (에피타이저)-프리모 피아또 (메인1)-세콘드 피아또 (메인2)-돌체 (디저트)”의 5단계를 거쳐서 요리가 진행됩니다. 근데, 사실 이런 식의 식사는 굉장히 번거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동시에 먹는다는 것 자체가 가난한 하층민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한 수프와 빵 한 덩어리를 허겁지겁 먹는 정도의 식사도 그 규칙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판국에, 무슨 식전주니 디저트니 하는 것을 고려하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식의 코스요리를 먹는 매너도 하층민들에겐 필요가 없고, 또한ㅡ특별히 영주의 하인이 되지 않는 이상ㅡ먹을 일 자체가 없기에 배울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보자면, 음식의 먹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서, 이런 음식을 ‘먹는 법’이라는 식사매너의 형식 자체부터가 이미 위계질서와 과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너는 코스요리가 나오는 순서와 각 요리마다 담기는 접시, 그리고 사용해야할 수저와 같은 식사예절을 아느냐 모르냐에 따라 계급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잡한 매너형식을 만드는 것은 가장 높은 상층부에 있는 계급들로부터 연유하게 됩니다. 어원적으로 분석해보자면 불어로 문명은 civilisation이고 이는 예절을 뜻하는 civilit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절은 ‘궁정예절’이라고 하는 사회의 가장 위층부에서 체계적으로 조직된 개념이지요. 이말은 위층에서 통용되던 질서가 문명이라는 매너의 형식이었을 뿐이지, 위층과 관계되지 않은 아래층에는 이런 매너가 처음부터 통용되진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에 적었던 다소 이상한 예절규범들이 시사해주듯 중세에는 이런 예절 (혹은 매너)에 대한 생각이 굉장히 희박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요. 노버트 엘리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역겨움이나 수치심을 느끼는 ‘정서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중세에는 현저히 낮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19-20세기 서구인들 사이에서 이런 궁정과 같은 상류층에서나 통용되던 매너형식이 하층민들에게 보급됨으로써 하나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귀결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근본적으로 그것은 과시나 계급상승의 갈망으로 인하여 궁정예절을 습득하려고 노력한 계급들의 노력에서 말미암습니다. 단순히 돈이나 무력을 쥔 것이 아닌, 궁정예절을 제대로 익혀야만 상류층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사적으로 궁정예법을 익히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지요. 국왕은 황제를 따라하려 하고, 대공은 국왕을, 공작은 대공을, 후작은 공작을, 백작은 후작을, 자작은 백작을, 남작은 자작을, 평기사는 자작을, 중인층들은 평기사를, 그리고 하층민들은 중인층을 따라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약 천년이라는 시간대를 거치면서 매너가 전 사회에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를 좀 더 좁게 보자면, 이런 식의 매너보급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인 것은 단연 16-17세기 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들이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새로운 계급이 서서히 약진을 시작해거든요. 이 중인층들은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서 서서히 지위를 올려갔고, 매너에 대한 습득도 그만큼 빨라졌습니다. 이 시기에 매너에 관한 에라스무스나 카스티글리오네, 델라 카사 등의 작품들이 나온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귀족과의 혼인이라는 핏줄을 얻은 부르주아가 예법에 대한 서책을 통해 예법을 익히고자 했던 수요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부르주아 계층이 본격적인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던 18세기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가속화됩니다. 또한 이런 경향은 종교계와도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것이었는데, 본디 종교라는 것이 의례에 중점을 두기 마련인데, 이런 의례가 사실상 예법의 일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예법의 증대는 종교적인 의미에서ㅡ [그리스도적인] 고매한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이유로ㅡ합리화되었고, 또한 종교를 매개로 더욱 사람들에게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18-19세기에 산업혁명이 벌어지고 사회적으로 도시가 발전하면서 각종 사회구조가 재구성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분업’입니다. 분업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종래에 단순히 경작물에 대한 지대를 받는 정도의 수준에 그쳤던 계급 간의 만남이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산업혁명 초기에 일꾼들에게 공장식 규범을 가르치려고 채찍과 각종 가혹행위들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이런 식의 [비극적인] 만남과 소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분업과 함께 시장이 확대되면서 계급간의 이동과 만남은 더욱 불어났죠. 이는 매너의 보급과 직결되는 변화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궁정적 행동양식의 변화며 창조며 유행에 있어서 발전의 어떤 방향이나 노선이, 언뜻 보아 무질서하고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장기 지속적 차원에서는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 방향이나 노선은, 예컨대 ‘거북함과 수치의 경계의 증가’ 또는 ‘세련화’나 ‘문명화’를 포함한다. 한 특수한 사회적 동력은 나름의 규칙성을 지닌 특수한 심리적 동력을 야기한다.
결국 이런 식의 발전은 매너가 인간적인 본능을 억제하도록 만듦으로서, 본능에 대한 거북함과 수치심을 증가시켰습니다. 손만 깨끗이 씻는다면 음식을 손으로 먹으나 포크로 먹으나 위생적인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나요? 단연코 딱히 말하는데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안 그럽니다. 왜? 음식을 손으로 먹으면 초자아에서 반응하는 본능적 거북함과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게 정말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이 자신과 서로의 관계들에 부과하는 일련의 매너나 금기들은 대개 ‘위생’과 딱히 관련이 없으며ㅡ고기를 나이프로 먹든 포크로 먹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ㅡ단순히 ‘느낌의 섬세함’과 같은 감수성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명화란 것은 위에서 누누이 설명한 초자아가 본능에 제동을 거는 장치들의 증가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이 장치를 건드렸을 때 느끼는 수치심의 영역과 깊이의 증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이런 예법에 의학적 논거들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가 돼서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이런 식의 발전단계를 전문용어를 써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매너의 첫 시작은 계급 피라미드의 가장 위층인 궁정으로, 따라서 ‘궁정예절’로 시작합니다. 이후 궁정예절을 배우려는 귀족이나 부르주아를 통해 궁정예절은 최상층이 아닌 중상층의 ‘예절’로 통용되며, 이런 예절이 하층민들에게까지 일반적으로 보급되면 그 나라 전체가 이런 매너를 따르는 일종의 문화로 취급되고, 이는 곧 ‘문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궁정예절-예절-문명’의 발전단계를 거친다고 볼 수 있지요. 아, 물론 거시적 도식이 이렇다는 것이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족들이 부르주아화가 되기도 하고 부르주아들이 궁정화가 되기도 하는 식으로 서로 간의 문화를 주고받으면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제시한 ‘궁정예절-예절-문명’순서로 나아갑니다.
그냥 덧붙이는 말이지만, 이런 식으로 예절이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면 애초에 예절이 발생했던 과시라는 측면이 상대적으로 옅어지기 마련입니다. 자, 그러면 현대사회에선 과시의 수단이 예절에서 다른 수단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돈’이죠. 실제 우리 시대는 실제로 이룬 업적과 생산한 물건들을 그들이 가진 매너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머니머니해도 머니 아니겠습니까? 돈이 충족되면 뭐가 등장할는지……
인간현상들ㅡ태도든 소망이든 인간활동의 소산이든 간에ㅡ은 사람들의 사회적 삶과의 관련을 도외시한 채 그 자체로 고찰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본시 인간관계와 인간 행동양식의 실체적 드러남이요, 사회적·정신적 삶의 구체적 표현에 불과하다.
잠시 얘기가 샜군요. 다시 본 궤도로 돌아와서, 그리하여 매너는 사람들의 제2의 천성이 됩니다. 이런 매너를 지키지 않았을 때 사회적으로 야만인이고 못 배운 하층민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사회적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 무리에 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속감에 대한 압박 등이 초자아를 더욱 강화시키고 죄책감과 수치심과 모욕감과 혐오감을 유발시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특수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교육·양육된 결과이며, 또한 그 자신이 이를 일상 속에서 ‘상식’으로서 계속해서 재생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더러운 것을 입에 넣는 아이에게 어른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손등을 치는 것 마냥 아이를 교육시키며 그것을 ‘안 좋은’ 혹은 ‘수치스러운’ 어떤 것이라 금기를 두듯,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나서 자기 동생에게 혹은 자기자식에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듯.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회적인 결과라는 점은 모두 잊힌 채, 단순히 개인적이고 천부적으로 그들에게 심어진 ‘생래적인 것’으로 비쳐지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논의를 따라가자면, 이런 식으로 억압기제가 발달한 현대사회에는 모든 시대에 있었던 ‘신경증’이나 ‘강박증’과 같은 정신병의 형태를 넘어서 ‘노이제로’와 같은 형태의 정신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 여러모로 흥미로운 점입니다. 처음엔 과시욕이라는 또 다른 본능 하나를 만족시키려다, 어느 순간 이 과시욕으로부터 말미암은 욕망이 과시라고 하는 그 근본이 잊힌 채 원래 그러했던 본성마냥 취급되고, 이는 인간의 다른 본능들을 억압함으로써 강박증이나 신경증을 유발시키는 셈이거든요. 이 연결고리란 게 참 기묘합니다.
사회생활에서 내보여도 괜찮은 삶의 측면들이, 그래서는 안 되고 ‘은밀하거나 비밀스럽게’ 묻어놓아야 하는 측면들과 날카롭게 구분되면 될수록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특수한 내면적 칸막이 현상이다.
더 재미있는 점은 이런 매너가 곧 개인주의를 더욱 확산시켰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식의 초자아가 아무리 본능을 억제시켜도 본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리비도는 무의식 속에서 계속해서 꿈틀거리고, 이 꿈틀거림의 대체를 위해 꿈을 통해 리비도의 욕망이 대리 만족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본능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능은 초자아를 형성하는 결정적 토대인 타자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 지극히 밀폐된 공간이라는, 개인만의 공간에서만이 풀어질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선 누구나 다 프라이버스를 외치면서 혼자만의 밀실로 기어들어가려하죠.
또한 이 맥락을 자꾸 따라가자면ㅡ물론 이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ㅡ식민지도 이런 심리적 분출구로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초자아를 통해 인간의 본능들이 억압된다고 했는데, 이 억압되는 본능 중에는 노골적인 호전적 행동이라는 인간의 공격본능도 포함됩니다. 고대나 중세에 고문이나 살인이 타자에 대한 육체적 우월함이라도 증명하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자행되었던 것에 비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잔인성에 대한 기쁨은 국가기구의 무력독점에 의해 점차 개인의 손을 떠나가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래서 사회적 격동기 때나 사회적 통제가 더 느슨해진 곳인 식민지와 같은 공간에서 공격본능의 쾌락이 수치와 혐오의 훼방을 덜 받고 더 직접적이고 무제한적으로 분출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정부가 저지른 식민지에서의 무수히 많은 고문과 신체절단과 같은 가혹행위들은 이런 심리적 이유에서 설명되는 셈이지요.
중세인들의 감정표현은 대체로 후대에 비해 더 자연스럽고 제멋대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절대적 의미에서 제약을 받지 않았다거나 사회적으로 주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는 영점 (零點)은 존재치 않는다. 제약을 받지 않는 인간은 하나의 망상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금지며 통제며 의존의 본성과 강도와 정련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하고, 이와 더불어 감정의 긴장과 평형도 변하며, 개인들이 추구하고 발견하는 만족의 정도와 종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말이 중세가 단순히 야만적이었다는 말을 뜻하진 않습니다. 야만의 이름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 어떤 것에 대한 독단입니다. 매너란 형식이 사회적 구조에 따라서 초자아가 만들어지고 확대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봤을 때, 이 초자아 자체는 시간의 산물일 따름입니다. 중세를 살아간 인간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중세가 아닌 현대로 이해했을 것이며, 따라서 지금의 자신들이 가진 [현대인이 야만이라 부르는]매너들을 두고 ‘문명’이라고 봤을 것이며, 그 이전의 고대에 대해서 ‘야만’의 딱지를 붙였을 것입니다. 거꾸로 수백 년 뒤에 중세의 이들은 근대와 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야만’이라 불리게 되지만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 인용문은 표현처럼 이런 제약에는 영점이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먼 훗날 이 글을 쓰는 저도 ‘야만’이라 취급받을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야만’이란 용어의 폐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야만이 뭡니까?
자, 우리는 지금까지 근대에 학술적이면서도 일상적이고 관료적인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된 ‘문명’이란 것의 역사를 살펴봤습니다. 이 ‘문명’이란 단어가 입체적으로 조망이 되는지요? 만일 제대로 이해하셨다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남은 일이란[혹은 해야 할] 이 단어를 ‘제대로 쓰는 일’일 것입니다.
이상 노버트 엘리아스의 『매너의 역사』였습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