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근 목사 칼럼
죽음을 먹고 사는 인생
토요일 아침, 아내와 함께 주말 시장을 찾았다. 흐리고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흥정하는 소리, 그리고 상인들의 외침이 뒤섞여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그 활기 속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를 마주했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죽음이 있어 생명이 있구나.’
1. 육체는 식물과 동물의 죽음으로 살아간다.
시장 한편에는 싱싱한 채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푸른 잎채소는 뿌리가 잘린 채, 토마토는 꼭지가 떨어진 채, 당근은 흙을 털어낸 채 생명을 잃어가는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생선 가게에는 힘없이 누워있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비늘은 빛을 잃었고, 아가미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과일 가게에는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 즐비했지만, 그들은 이미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의 순환을 멈춘 존재였다.
이렇듯 우리의 육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통해서다. 식물의 희생으로 얻은 곡식과 채소, 동물의 희생으로 얻은 고기는 우리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2. 인간관계에도 죽음을 먹고 유지된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역설은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행복을 느끼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희생이나 양보가 필요하다.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연인과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희생과 양보는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좀 더 깊게 이해하면 용서의 부분이다. 용서는 관계에 있어 철저하게 어느 한 개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양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관계 속에서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3. 영적인 측면에서도 죽음은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의 죄가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수의 죽음은 희생과 사랑의 상징이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준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통해 영생을 소유한 것이다. 죽음의 원리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들의 구원자가 되시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먹고 생명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기 때문이다. 생명과 죽음의 역설이다.
4. 죽음을 먹고사는 자의 삶의 자세
이러한 타의 죽음을 먹고 사는 인생,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고 성장한다. 끝내는 죽음이 있어 우리들의 생명이 유지된다. 우선 우리를 위해 죽음을 준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소유할 수가 있어야 한다. 결코 우리는 스스로 자랑할 만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죽음의 터 위에 덤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항상 겸손을 유지해야 한다.
오늘 따라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생각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