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 이야기
(존엄한 죽음, Well Dying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2017년 말 St. Benedicts Monastery에서 가졌던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 첫 One Day Retreat에는 모두 15분이 함께하여 ‘동양과 서양’이라는 주제를 놓고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비록 당시 시작한 우리들의 작은 몸부림이지만 지난 강좌들을 정리, 평가하면서 앞으로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 다루어지기를 원하시는 토픽들을 써주시기도 했습니다. 정리해 보니까 모두 34개나 되는 다양한 주제들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최후의 아름다운 고종명’을 비롯하여 안락사를 포함한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4분이나 계셨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좀 더 심도있게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오늘은 우선 소피스트 다음엔 거의 자연스럽게 취급하게 되는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삶과 죽음을 함께 살펴보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어 보는 것으로 2024년 2학기 첫 번째 ‘시드니인문학교실’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 (Sokrates, BC 470-399)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전성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태어나서 소피스트들과 함께 살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다음 아테네가 몰락할 즈음 그의 삶을 마쳤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조각가고 어머니는 산파로서 이름은 크산티페(Xanthippe)인데 아주 못생긴데다가 악처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악처가 철학자를 만든다. 당신이 철학자가 못된 이유는 당신의 아내가 너무 예쁘고 착해서라는 농담이 있다). 저서는 없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하나인 플라톤이 Apology of Sokrates, Paedon, Symposium 등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록’들을 기록하여 전해 줌으로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 삶과 죽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가 되게 한 사람은 그의 제자 플라톤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저서가 없습니다. 예수나 석가에게도 자신이 직접 쓴 저서는 없습니다. 책은 별로 잘나지 못한 사람들이 쓰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가 위대해지고 뛰어나야 스승이 빛을 보게 됩니다. 특히 종교, 철학, 예술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없었어도 예수가 있었을까요? 기독교는 예수가 만든 종교일까요? 아니면 바울과 베드로가 만든 종교일까요?
소크라테스 시대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페르시아 전쟁 이후 지중해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이는 도시국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서 28년간이나 계속된 전쟁입니다. 이 싸움은 에게 바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어느 도시 국가가 주도권을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겨룬 세력 싸움이었습니다. 3차에 걸친 해전과 육지전을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아테네의 모든 함대가 전멸되고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이기고 아테네가 패배했다는 것은 아테네를 중심한 한 시대의 민주정치는 막을 내리고 스파르타식의 과두정치 체제가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정치형태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은 규제되고 역사가 뒷걸음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파르타식의 통제되고 획일화된 교육과 훈련이 개인을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Spartan Education: 스파르타식 교육 – 흔히 그리스 말로 ‘아고게’ Agoge라고 부르는 이 집단적 전투 중심의 교육은 7살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어머니들은 전장에 나가는 아들에게 방패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방패를 들고 걸어서 돌아오거나 아니면 이 방패 위에 누워서 돌아오너라’ 혹독하고 무자비한 훈련, 전장에서의 명예로운 죽음, 끝없는 극기와의 싸움 등은 나치 독일이나 일본군인들의 가미가제 정신이나 북한 인민군대에게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통일된 하나의 교육과 한국에서의 국정 교과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경험한 다양한 정치 형태에 대한 이해
(1)독재정치(獨裁政治, Autocracy) – 한 사람에게 일체의 정치권력이 집중된 형태, 오늘날의 북한과 같은 형태. (2)참주정(僭主政, Tyrant)이란 영어에서 보듯이 독재정치인데 일반적인 왕정체제가 아니라 군주의 자리를 찬탈하여 정권을 장악한 왕정이나 독재정치 체제, 이성계식의 조선 왕조나 박정희, 전두환식의 군사독재. (3)군주정치(君主政治, Monarchy)는 왕정체제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절대 왕정체제로써 ‘짐이 곧 나라요 법’인 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입헌 군주제로써 왕이 있기는 하지만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제한된 권력만 행사하는 체제입니다. (4)과두정치(寡頭政治, Oligarchy) –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소수의 엘리트들이 권력을 갖고 그들의 가문이나 친구들에게 권력을 승계하면서 통치하는 체제. 중국공산당을 비롯하여 현대의 많은 정당, 회사, 재벌 관료사회도 일종의 과두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철인정치(哲人政治) – 플라톤이 Politeia에서 그린 이상적 국가통치체제로 이데아를 지닌 철학자가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말합니다. (6)귀족정치(貴族政治, Aristocracy) – 혈통, 문벌, 소유에 있어서 특권이 주어진 귀족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치체제입니다. (7) 민주정치(民主政治, Democracy) – 여기에는 직접민주주의 정치체제와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
앞에서 본 대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면에서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를 살아갔습니다. 첫째는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 허무주의가 절정에 올라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옳바른 삶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가치관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정신적 혼란기였습니다. 삶의 목표와 방법을 송두리째 상실하고 허둥대던 시대였습니다. 둘째는 정치-사회적으로도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였습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이어지던 시대, 그러다가 마침내는 패전국이 된 아테네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를 상실하고 오랜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고통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모두 다 힘들 때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총체적 위기 속에서 방황하던 민중들과 젊은이들에게 옳바른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의 교사’로 출발했습니다. 그는 어떤 철학적 학파나 학교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아테네의 정신적 선생님으로 ‘진리의 교사’ 역할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첫째 핵심은 ‘인간’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이 가졌던 최대의 관심은 우주와 만물의 본질, 근본, Arche였습니다. ‘우주 만물은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물었습니다. ‘우주 만물의 아르케를 묻는 너, 너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는 철학의 핵심 주제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라는 것도 구체적인 한 인간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인간’으로 정리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Know Yourself’(gnothi seauton) 이것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제 1주제입니다.
둘째로 소크라테스 철학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을까?’에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소피스트들이 인간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상대주의, 허무주의에 밀어 넣으면서 말만하고 실천은 없는 지식의 장삿꾼들이 되고만 것에 대한 반성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관념적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적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도덕적이고 옳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반성하는 삶’ 끊임없이 ‘생각하는 삶’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하는 인생’을 살아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반성’ ‘생각’ ‘성찰’이 옳바른 삶을 위한 기초라고 본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성찰하고 자신을 반성하라’ ‘생각하지 않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그 다음 여기에 연이어서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문제는 ‘그렇다면 앎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성찰과 반성은 ‘자기를 알기 위해서’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는 어디까지나 ‘앎’입니다. 인간을 알아야지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진리를 알아야지 진리를 따라가게 되고,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알아야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정의란 무엇인지를 알아야지 정의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입니다. ‘나는 무지하게 살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Arete)은 ‘앎’ ‘지식’ ‘인식’이었습니다. ‘무지는 악이다. 지식은 선이다. 모든 악과 악한 행동은 무지에서 나온다. 정의롭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지를 알아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더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 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정의, 진리, 양심, 믿음, 희망, 정치, 민주, 평등, 등등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 할 것인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묻습니다. ‘최고의 앎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알아야지 그는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되는가?’ 그의 대답은 ‘무지에 대한 앎’입니다. 인생이란 나이가 더해지고 덕과 지식이 높아지고 생각과 반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결국 ‘무식에 대한 지식’ ‘무지에 대한 인식’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가서 질문을 했습니다. ‘신이여 이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때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소크라테스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자신이 정말로 무지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소크라테스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 ‘I know only one thing that is that I know nothing’ –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인간이란 그가 지닌 지식 때문에 현명해 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 때문에, 혹은 무지에 대한 지식 때문에 현명해 진다는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을 흔히 ‘대화법’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하여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정의란 무엇입니까?’ ‘진리란 무엇입니까?’ ‘신은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까?’하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그것 만일까요?’ ‘가능할까요?’ ‘그래서요?’ ‘그 다음은요?’ ‘또 뭐가 있지요?’하면서 계속하여 질문에 질문을 이어 갑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상대방은 마침내 ‘잘 모르겠습니다’하면서 자신의 무지, 혹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무지의 고백’을 들을 때까지 계속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마침내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마치 종교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처럼 소중히 여겼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 ‘대화법’을 흔히 ‘지적산파술(知的 産婆術)’이라고 합니다. 계속되는 반어법(反語法)을 이용하여 독단과 선입견과 무지를 깨우치는 이런 지적산파술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어머니가 산파였던데서 깨우친 것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가 위해서는 먼저 정의란 무엇인지를 알아야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입니다. 우리가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정의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려고 하는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실은 사랑이란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를 모르면서도 스스로 그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데서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 철학의 종착점은 지행합일(知行合一)에 있습니다. 그는 온전한 지식은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선을 아는 것은 선하게 사는 것을 통해서 증명된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삶 속에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지(知)와 행(行)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와 행은 동전의 양면이고 손바닥의 양면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성서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진실로 그의 철학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이 그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이 될 때 그는 진정한 철인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일본 철학계의 영향이라고 합니다만 흔히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세계 4대 성인중 하나로 여깁니다. 예수, 석가, 공자와 함께 소크라테스를 동급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른 세분은 모두 한 종교의 창시자들인데 소크라테스는 아무 종교도 세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성인의 반열에 든다는 것이 좀 의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소크라테스가 세계 4대 성인 중 한분으로 취급된 것은 그의 철학적 사상이나 위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 마치 하나의 종교인과 흡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죽음은 마치 종교적 순교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물론 예수의 죽음과 흡사하게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역시 ‘정치적 죽음’입니다. 그는 무신론자도 아니었고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혹세무민하거나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영혼의 실재를 믿었고 저 세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만 사회적 주류 세력에게 패배했을 뿐입니다. 이미 괴변가들로 변모된 소피스트들과 대립했고 페리클레스 사후 아테네의 새로운 정치 세력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향하여 무신론자요, 사회적 선동가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를 고소한 사람들과 그들과 한 통속이 된 500여명의 배심원들에 의하여 유죄판결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점은 바로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The Apology of Socrates)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미나리로 만든 독약을 마신 후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그의 마지막을 마무리합니다. 줄이고 다듬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슬픔과 비극, 재앙과 고통이라고 말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첫째로 죽음이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우리 영혼이 벗어나 참되고 영원한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즐거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음을 통하여 無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서는 일체의 육체적 욕망이나 감각적 유혹이 우리를 지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사슬들과 더러운 것들, 곧 육신의 온갖 죄성과 한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육체의 감옥으로 부터 벗어나는 영혼의 해방입니다. 둘째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우리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쁨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길이라고 본다면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 것이 되겠습니까? 생전에 만났던 좋은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과 영혼의 자유와 악으로부터의 해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세상으로 가는 이 죽음의 여행길은 우리 모두가 희열을 갖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나를 고소하고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자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들은 살러 갑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좋은 것을 만나게 될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옆에 있던 제자 크리톤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오 크리톤이여! 전에 내가 여행중에 아이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마리를 그냥 얻어 먹은게 있네 기억해 두었다가 꼭 내대신 갚아주게’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선고된 유죄 판결과 사형선고를 순수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아테네로부터 추방당할 선택권도 받았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절 합니다. 그는 안정되고 묵인된 도피를 할 수 있었지만 당당하게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는 ‘악법도 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철학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끝까지 인간의 선함과 진리의 승리를 확신한 사람이었습니다(여기에서 함께 생각을 나누며 토의할 점들 – 끝까지 죽음을 피하려고 했던 예수와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드렸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비교해보고 죽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왜 다른지를 이야기해보자. 헬라의 영혼 불멸론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Oscar Cullmann의 ‘영원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 모든 죽은 자들은 다 부활하는가? ‘예수처럼 죽은자만 예수처럼 부활한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죽음에 대한 명상
결혼식은 준비도 하고 예행연습도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도 않하고 예행연습도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위한 ‘죽음학’ 예비공부를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 우리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꼭 육체적 죽음 외에도 여러가지 형태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사회적 매장, 정치적 사형, 공동체로 부터의 추방이나 따돌림 등등 여러가지 정신적, 사회적 죽음이 있습니다. 이렇듯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은 생명’도 있지만 반대로 ‘죽은 것 같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도 있습니다. 위대한 종교인들과 사상가들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김일성 수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믿는 사회까지 죽음과 생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주제는 ‘인간의 생명이 멈추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에 대한 명언들은 참 많습니다. – 세익스피어는 ‘Hamlet’에서 말합니다. ‘To Be or Not To Be?’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인생 최대의 크고 심각한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 ‘겁쟁이는 일생동안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사람은 오직 한번만 죽는다’ / ‘자 우리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죽으러 가고 너희들은 살러 간다. 그러나 어느 길이 더 좋을지는 오직 신만이 아신다’(소크라테스) / ‘무덤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아무도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 할 수 없다’(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 / ‘잘 보낸 하루가 평안히 잠들 수 있듯이 잘 살아온 일생이 평안히 죽을 수 있다’(레오나르드 다 빈치) / ‘죽은 황제 보다는 살아있는 거지가 더 낫다’(프랑스 작가 라 퐁테느) / ‘호랑이는 죽은 후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후 이름을 남긴다’(중국의 구양수) / ‘새는 죽을 때가 되면 그 소리가 구슬퍼지고 사람은 죽을 때가 가까이 오면 그 말이 착해진다 ’조지장사 기명야해(鳥之葬事 其鳴也悲) 인지장사 기명야선(人之葬事 其鳴也善) – 증자 /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 ‘미루면 미룰수록 좋은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 ‘죽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 있다. 신이 되면 된다’
죽음을 표현하는 단어들도 여러가지 입니다. – 풀이나 나무들이 죽을 때는 고사(枯死) / 가축이나 짐승, 어패류가 죽을 때는 폐사(斃死) /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살인(殺人) 혹은 사형(死刑) / 동물을 죽일 때는 도살(屠殺) 혹은 도축(屠畜) / 보통 많이 사용하는 단어들 – ‘숨을 거두었다’ ‘숨이 끊어졌다’ ‘숨이 다했다’ ‘눈을 감았다’ ‘잠이 들었다’ ‘영면하셨다’ ‘돌아가셨다’ 사망, 임종, 작고, ‘타계, 서거, 절명 등 / 높임말로는 서거, 영면, 별세, 붕어, 승하, 유명을 달리하셨다, 돌아가셨다, / 비하하는 천박한 표현들로는, 골로갔다, 뒈졌다, 황천 길로 갔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 등 / 종교에서 쓰는 단어들로는, 도교에서는 ‘반진’ 천도교에서는 ‘환원’ 불교에서는 ‘입적’ 혹은 ‘열반’ 개신교에서는 ‘소천’ 혹은 ‘요단강 건넜다’ 천주교에서는 ‘선종’ / 영어로는 die, departed, passed away, gone away, went to Heaven, rest in peace / 의사들이 쓰는 의학용어로는 ‘expired’(사용기간이 만료되었다) 등이 사용됩니다.
죽음에 대한 정의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보는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합니다. ‘숨은 쉬는가? 심장은 뛰는가? 뇌는 활동을 하는가?’를 봅니다. 호흡과 맥박과 뇌활동의 정지 같은 인체의 중요한 기능이 완전히 멈추고 그 셋 중 어느 하나라도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판정이 되었을 때를 죽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미 뇌의 활동은 멈추어져 뇌사상태는 되었지만 인공호흡기를 이용하여 계속 기계적으로 숨을 쉬게함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의학적 기술로 인하여 장기사나 심폐사 혹은 세포사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의학자들이 보는 죽음의 정의는 훨씬 더 복잡해져서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WHO는 ‘소생할 수 없는 삶의 완전한 종결 상태’를 죽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사회학이나 문화인류학, 심리학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다양합니다. 고대 원시종교로 부터 이집트인들의 신앙과 미이라, 그리스 철학이나 힌두교 등 동양종교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참 다양합니다.
죽음의 형태와 종류에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사(自然死)입니다. 신체의 노화로 인한 죽음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흔히 장수하고 기운이 진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탐욕으로 물든 인간에게 있어서 ‘천수’라는 것이 과연 몇 살까지를 두고 하는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천수를 누리다가 죽는 것을 자연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죽음 가운데서 자연사의 비율이 가장 낮습니다. 한국인의 경우 자연사, 즉 노화로 죽는 것은 인구 백명 중 약 6-7명 쯤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둘째는 병사(病死)입니다. 모든 죽음 중에서 병으로 죽는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질병의 종류는 헤아릴수도 없이 많습니다. 또 삶의 형태와 생태계의 변화, 문화와 식생활의 변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질병들을 만들어 냅니다. 요즘은 흔히 암, 심장 질환들, 순환기 질병들, 고혈압, 당뇨, 폐렴 같은 급성 질환들이 인간의 생명을 많이 앗아갑니다.
셋째는 외인사(外因死)입니다. 흔히 자연사나 병사가 아닌 죽음은 대부분 외인사에 해당됩니다. 외인사에는 내용상으로 볼 때 1) 사고사, 2) 자살, 3) 타살이 있습니다. 사고사란 그야말로 사고로 죽는 것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는 것이 사고사입니다. 교통사고, 질식사, 감전사, 실족사, 추락사, 익사, 동사, 압사 같은 것들이 여기에 포함 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고사의 종류에는 무려 66가지나 나열되어 있습니다. 세월호에서의 죽음이 ‘예측 가능한 죽음이냐 예측 불가능한 죽음이냐’ 하는 것은 아직도 논쟁의 여지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만 사고사란 일반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죽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 다음 자살은 자신이 스스로 죽을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총칭합니다. 자살에도 여러가지 형태가 있습니다만 잔인 하니까 다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요즘은 안락사 문제도 심각합니다. 안락사는 ‘자살이다. 아니다. 타살이다’ 하는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타살은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인류 최초의 죽음을 가인이 아벨을 죽인 타살로 봅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고 죽일려고 한 것은 아닌데 죽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타살인가, 사고사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세상에는 정말로 끔찍한 형태의 살인이 있습니다. 요즘은 갈수록 세상이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친부모가 자기 자식을 죽이고 자식들이 친부모를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살인의 방법도 잔인무도의 극치를 달립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지나치게 행사되고 있습니다. 또 국가는 소위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인 살인이라 할 수 있는 사형을 시킵니다. 고문, 폭력, 치사를 포함하여 전쟁을 하는 것도 사실은 모두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살인을 하는 것이요, 따라서 타살이며 외인사에 속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종교적 신앙이나 개인적 신념과 사상 때문에 죽는 것,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죽는 것, 물질과 명예 때문에 죽는 것들은 여기에서 언급하질 못했습니다만 정말 사람이란 사는 모습이 다른 것처럼 죽는 것 또한 여러가지입니다.
저는 호주에서 목회하는 동안 모두 55번의 장례식을 집례했습니다. 그중에서 자연사라고 할 수 있는 경우(83세 이상이 되셔서 돌아가신 분들)는 12분이고, 병사로 가신 분들이 28분, 그리고 나머지 15분은 여러가지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015년 말로 세계인구는 약 73억입니다. 1년에 출생하는 신생아는 약 4천7백만 입니다. 1년에 죽는 사람은 약 2천만이 조금 더 됩니다. 어림잡아 해마다 한국 인구만큼 새아기들이 태어나고 또 호주 인구만큼 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해 호주에서는 약 15만4천명이 죽었습니다. 호주 전역에서는 1주일에 평균 약 3천 건의 장례식이 거행됩니다. 통계에 의하면 6, 7, 8월, 겨울철 석달동안 전체 사망자의 약 50%가 죽습니다.
다음은 ‘호주의 장례 안내서’(이문철 엮음)에 제가 기고했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봄이 있으면 가을이 있고, 여름이 오면 겨울도 오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출생이 있으면 죽음도 오고 삶의 기쁨이 있으면 죽음의 슬픔도 있게 마련입니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자연의 순리요, 자연계의 질서 중 하나 입니다. 삶과 죽음이 피차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것이냐, 아니면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일회적인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 할 수 있겠지만 삶과 죽음 그 자체는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거역 할 수 없는 창조주의 섭리요, 자연의 법칙입니다.
사실 죽음이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식물계에도 싹이트고, 자라고, 꽃이 만발하고, 또 다시 잎이 지고, 말라지는 출생과 성장과 멸종이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산 것은 죽을 때가 있고, 모든 태어난 것은 사라질 때가 오게 마련입니다. 죽음이란 인간계를 포함한 생물과 무생물계 전체의 우주적이며 보편적 현상입니다.
죽음은 빈부와 유무식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란 지극히 우발적인 것 같이 보이고, 갑작스런 이변인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예측 가능한 것이며, 준비하도록 예고된 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그가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를 가리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앙의 유무나, 신앙 형태의 다양성과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그냥 생물학적 현상이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교에서는 죽음을 저 세상에서의 탄생이라고 가르칩니다. 죽음은 참된 안식이요, 휴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철학자들 가운데는 죽음을 영과 육의 분리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이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한 자기를 찾아나서는 출발역이라고 보았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이미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종착역이란 늘 시발역이고, 시발역은 또한 종착역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시도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기물에서 무기물로의 전환이라고도 말하고, 뇌활동이 정지된 상태니, 심장의 박동이 멈춘 상태니 등등 여러가지 의학적, 생물학적, 과학적 해석들이 분분합니다. 그 중에는 아직도 진행 중인 논쟁적 이론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물학적, 자연적 현상이라고 해서 꼭 그런 각도에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 종교적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이나 생물학에서는 죽음을 삶의 종결이라고 보지만, 대부분의 전통 문화나 종교인들은 죽음을 영원으로의 회귀로 봅니다. 조상에게로 돌아가든지, 신에게로 돌아가든지, 죽음이란 돌아가는 것이지,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활동이 정지됨으로 다시 회복이 불가능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일단 ‘죽었다’고 말합니다. 심장의 박동이나 호흡이 영구히 중단되고, 뇌의 기능이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에 이르러, 기관과 세포와 조직이 완전 정지하게 된 것이 바로 생물학적 죽음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신체의 기관과 조직들을 다른 개체로 이식하는 의학적 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심장, 뇌, 신체의 각 기관들, 줄기세포 등을 다른 이들에게 이식하여 부분적으로 나의 존재를 보존해 나가고, 또 계속적으로 활동하게 함으로 죽음의 정의가 많이 모호해지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해석과 태도가 쉬임없이 변화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사망학’(Thanatology)은 죽음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써, 과학적, 심리학적, 종교적, 사회 문화적 접근을 시도하여, 죽음을 분석하고, 죽음을 준비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설명과 이해와 접근이 한결같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마다 생사관은 디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다 죽습니다. 수명은 늘어났지만 그래도 죽습니다. 장기는 이식되지만 그래도 죽음은 죽음일 뿐입니다. 죽음에 대한 해석은 변하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문화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개인적으로 경험이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간접 경험을 할 뿐이지, 내가 직접 경험을 하거나 실험을 해 볼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유일회적 사건입니다. 임상실험을 해 볼 수 없는 유일한 분야가 바로 죽음입니다. 보통 동물 실험을 한 다음에는 인체 실험을 해 보는 것이 순서인데 사람에게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여전히 신비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직접 죽어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육신은 죽어 자연으로 회귀하고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은 오랫동안 남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잘 사는 것이 사실은 잘 죽는 것입니다. 죽음의 준비란 ‘지금, 여기에서’ Here and Now, 하루하루 사는 삶의 내용이 결정해 줍니다. 요즘은 호스피스 운동을 포함하여 이곳 저곳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아닙니다. 매장, 화장, 수장, 암장, 수목장, 동굴장 등등 장례법이나 절차에 대해서 생각해 두거나 유언을 작성해 두거나 비문을 미리 써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여생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뜻있고 바르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죽음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는 오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할아버지처럼, 아직 살아있을 때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장례식 까지도 미리 치뤄두는 여유있는 삶, 생각하는 인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감사하면서 사는 삶, – 이것이 죽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사노 요코가 쓴 ‘죽는 게 뭐라고’에서
백살 가까이 된 할머니에게 좀 큰돈이 생겼습니다. ‘할머니 그 돈 어디다 쓰시겠어요?’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모았다가 늙으면 노후자금으로 써야지” 우습게 들리는 말이지만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노 요코가 쓴 ‘죽는게 뭐라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죽을 때까지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가 죽고 싶다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날이 여위어가는 모습이었지만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점점 늙어가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고 또 보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여전히 무대로 올라갑니다. 연극을 위해서도 아니고 관객들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아툴 가완디가 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다음은 지난 해 읽은 아툴 가완디(Atul Gawnade)가 쓴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에서 옮겨온 저의 잡기장입니다. 간혹 저의 개인적 생각도 함께 섞어 놓았습니다.
의대생들과 의대 교수들은 ‘의대의 교육 목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꺼져가는 생명의 불길을 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꺼져가는 생명이 그냥 잘 꺼지도록 돌보는 것도 가르쳐야한다. /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잠간 아플뿐이예요 치료 받으면 곧 좋아질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은 의료인들의 대표적인 거짓과 기만이다. / 의사의 기본적 책임은 정직과 친절이다. 의사들은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용기, 진실, 그리고 지혜롭게 말할 줄을 모른다. / 의료인들은 겸손해야한다.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대해야한다. / 의사들은 수술만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데도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말하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기술이 있는데 그것은 환자의 말을 알아듣는 기술이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이해가 않되고 이해가 않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내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을 때 나의 건강문제 의사결정 대리인을 지명한다. 홍현철, 홍지은, 홍지혜, 세 사람이다. / 이 수술, 혹은 이 치료를 받은 후에도 1)나는 하루 커피 한잔과 와인 한잔을 마실 수 있는가? 2)나는 가끔 냉면을 먹을 수 있는가? 3)나는 TV에서 골프 중계방송을 볼 수 있는가? 4)나는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3번이나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을 들을 수 있는가? 5)나는 하루 한 두 시간은 성경이나 다른 독서를 할 수 있는가? 6)나는 하루 한 30분 정도는 밖에서 걸을 수 있는가? 위의 질문에 대해서 의사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럼 수술을 해라, 항암치료를 하라고 허락할 것이다. / 의사는 환자의 삶의 질을 유지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질병만 치료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 1945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사람들은 거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인간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기 시작한다. / 미국 의료계에서는 다음 8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혼자 할 수 없게 되면 그는 독립적으로 살수 없다고 판정하여 요양원에 가도록 추천한다. 1)화장실가기, 밥먹기, 옷입기, 목욕하기, 머리 손질하기 등을 혼자서 못할 때 2)침대에서 혼자 일어나지 못 할 때 3)의자에서 혼자 일어나지 못 할 때 4)걸을 때 부축을 받게 될 경우 5)혼자서 쇼핑을 못가거나 계산을 못 할 때 6)혼자서 음식을 못 해 먹을 때 7)빨래, 청소, 전화 하거나 받는 일, 약 먹는 것을 잘못할 때 8)외출을 혼자 못하거나 돈 관리를 스스로 못 할 때 / 지난 세기 이전 까지는 사람들이 자기 나이를 보태서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든 척 하는 ‘반올림 나이’ age heaping 현상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기 나이를 깍아서 말하려고 한다. / 예전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일들은 주로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구글을 검색한다. 그리고 구글 검색하는 방법은 다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 미국에서 retirement village, retirement community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세워나간 사람은 부동산업자 Dell Webb이다. 의사나 정부나 social service를 하는 사람들이 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아니다. / 현대의 nursing home system은 노령에 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병실 사용에 따른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다. / 평균 미국에서는 죽기 전 1년 정도는 요양원에 있다가 숨을 거둔다. / 군대의 훈련소, 고아원, 정신병원, 감옥, 그리고 요양원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당국에 의해서 식사, 취침, 기상, 운동 등이 계획되고 통제되고 강요된다. / 요양원의 목표는 노인들의 삶을 가치있게 살도록 돕는 것이 아니다. 관계와 기쁨을 얻게해 주는 곳이 아니다. 요양원의 목표는 노인들을 간호해 주고 보살피는 정도이지 그 이상을 기대하면 않된다. / 몰 이해는 잔인함과 같은 것이다. / 양로원에서는 옷을 입혀주는 것이 스스로 입는 것 보다 더 쉽고 빠르고 시간도 절약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직원들이 노인들의 옷도 입혀주고 세수도 시켜주고 신발도 신겨준다. 그것은 직원들이 친절해서가 아니라 그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아무리 늙고 힘들고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자기가 옷도 입고 씻고 걸어보려고 한다. 노인들은 헝겁인형이 아니잖은가! / 요양원의 모든 시설은 오직 1)안전, 2)위생, 그 둘에만 촛점을 두고 운영한다. 여기는 근본적으로 노인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노인들을 이 곳에 맞긴 고객인 가족과 자녀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다. /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도록 되어있다. / 양노원에는 3가지 역병이 있다. 무료함, 외로움, 그리고 무력감이다. / 나이가 들면서 물러지는 것은 치아와 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더 굳어지는 것은 혈관, 관절, 근육, 심장판막, 그리고 폐이다. 나이가 들면서 줄어드는 것은 키만이 아니다. 뇌가 제일 많이 줄어든다. 70세가 넘으면 두개골 속에는 약 2.5cm의 공간이 생긴다. 그래서 판단기능을 하는 전두엽과 기억기능을 하는 해마가 쇠퇴 된다. / 의사들은 노인들을 돌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인병 분야의 수입이 의학계에서는 가장 낮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일종의 고물 자동차와 같다. 귀도 잘 않들리고 눈도 침침하고 기억력도 않좋고 의사가 방금 말한 것도 다시 물어봄으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노인들은 한 가지 증상만 가지고 의사를 만나는 게 아니다. 한번 의사를 만나면 대여섯 가지 이상 아픈 데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증상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몇 십년씩 된 것들이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노인들의 병을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는 ‘만병의 의사’는 없다. / 노인병이란 대체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인데 노인들은 고쳐주기를 바란다. / 노인에게 가장 심각한 위협은 ‘넘어지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약 35만명이 넘어져서 골절상을 입는다. 그 중 40%는 결국 요양원으로 가게되고 20%는 다시는 걷지 못하게 된다. / 미국에서 80세 이상 인구의 년 평균 수입은 1500달라에 불과하다. / 노인들은 늙어가면서 예전 보다 더 말다툼을 많이하게 된다. 주로 청력 때문이고 행동이 굼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노인들은 다투기도 잘 하지만 용서도 훨씬 잘한다. / 늙어 가면서는 자신의 한계를 자주 자주 인정하고 ‘나는 못하는 게 점점 많아지고 있어’ 라고 정직하게 말하는 인생태도를 지녀야 한다. / 85세 이상의 운전자가 교통 사고를 낼 확율은 10대에 비해서 3배가 넘는다. / 나이가 드는 것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다. / 텔레비젼을 본다. 노인들은 저녁 7시 뉴스를 켜면서 일일 연속극을 본다. 세상이 얼마나 억망진창으로 돌아가는지 주연배우 대통령은 어제에 이어 오늘은 또 어떻게 쇼를 하는지를 잘 안다. / 카르마 –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일어 날 일은 멈출 수가 없다.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되지 뭐! / 의사들은 그들의 의학적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 노화나 질병으로 쇠약해진 사람을 살려보겠다고 손보고 약주고 이것 저 것 해보려고 하는 욕구를 참을 수 있어야한다. 너무 지나치게 살려보려고 하는 노력은 환자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 미국에서 전체 의료비의 25%는 1년도 못 사는 환자들을 위해서 쓰여지고 있다. / 기계적 인공호흡, 전기적 심폐소생술, 심장압박치료 – 제발 나 홍길복에게는 이런 것을 하지 말아라 마지막 2-3일을 위해서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나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겠느냐! / 숨을 거두기 전에 가족들에게 ‘미안해’ ‘난 괜찮아’ ‘사랑해’ ‘고마워’ 같은 인삿말을 나누고 떠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한다. /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연장 못지않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작별인사하기, 유언장 작성하기, 장례식 순서 만들기, 장의사 선정하기, 장지나 화장터 준비하기 등등 할일이 많다. / 죽는 것은 절대로 갑자기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온다. 준비 할 시간이 충분하다. / 죽는 것도 기술이다. 죽는 기술을 라틴어로 ars moriendi(아르스 모리엔디)라고한다. 기독교에서는 그 기술을 1)죄의 고백 2)신앙의 확인 3)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는 것으로 보았다. / 미국에서 암 전문의 중 40%가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치료를 계속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고객은 왕’이니까 고객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소비자 중심의 문화 속에서 의사들은 환자의 기대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한다. 분명히 알아야한다. 의사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사업가들이다. / 환자들이 의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다. 그들은 의사들은 어떻게든지 고칠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의사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 더 오래 살려는 노력을 멈추면 더 오래 사는 길이 열린다. / 물론 의학은 질병이나 죽음과 싸운다. 그런데 죽음은 의학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결국은 죽음이 이기게 되어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우리는 아군이 전멸 할 때 까지 싸우는 장군을 원하지 않는다. 점령 할 수 있는 영토를 위해서는 싸우고 그럴 수 없을 때는 항복 할 줄 아는 장군을 원한다. / 예전에는 가난해서 집에서 임종했다. 그 후에는 경제가 좋아져서 병원에 가서 임종했다. 요즘은 경제가 더 좋아져서 다시 집으로 와서 임종한다. /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는 다음 3가지가 있다. 1)전통적 유형 – 가부장적 관계다. 의사가 의학적 권위를 가지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의사는 마치 목사나 신부처럼 자기가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2)정보를 주고 공유하면서 환자가 결정하게하는 관계 – 의사는 환자에게 사실과 수치를 다 공개한다. ‘이 약은 여기에 좋고 저 약은 거기에 좋다’고 설명한다. 의사는 소매상이고 환자는 소비자다. 환자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준다. 3)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관계 – 해석학적 관계다. 함께 MRI를 보면서 설명해 주고 ‘이럴 때는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세요? ‘걱정되는 것이 뭐예요?’ 함께 묻고 대답하면서 둘이 공동으로 결정한다. / 최고의 의사들은 ‘의사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의사의 기대와 환자의 기대는 서로 다르지만 그걸 함께 맞추어가는 것이 치료하는 과정이다. / ‘인생의 길에는 종착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노인이다. / 고통은 짧아도 길게 느끼고 기쁨은 길어도 짧게 느낀다. /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다 보면 내가 응원하는 팀이 내내 잘 하다가도 그만 마지막에는 시합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우리는 그 마지막 때문에 그 경기 전체를 망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한 시간 내내 즐거웠고 행복했다. 사실 실망은 마지막 한 5분 정도이지만 나머지 45분은 행복한 시간 이었다. 인생도 그런 것이다. / 안락사는 존엄사인가? / 나는 다음 4가지에 대해서 NO!다. 1)심장이 멈추면 심폐소생술을 원하십니까? 2)삽관이나 기계적 인공호흡기 같은 공격적 치료를 받으시겠습니까? 3)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항생제를 투여 할까요? 4)스스로 음식을 먹지 못할 때 관이나 정맥 주사로 영양공급을 해드릴까요? 홍길복에게는 절대로 그렇게하지 마라.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에서
죽음을 피하지 않고 귀한 손님으로 알아 예를 갖추어 겸손하게 받아드리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죽어가는 사람이 산 사람에게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먼저 죽은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한테는 최고의 선생님이다. / 과학은 어느 분야 못지않게 정치적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공격적이고 쉬운 길을 찿으려는 유혹으로 가득찬 학문이다. / 레지던트에게 하루는 참 길지만 일년은 참 짧다. 노인에게 하루는 길고 일년은 너무 빨리간다. / 철학 연구는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다. / 심미아스여, 철학자의 진정한 직업은 죽음이라네. 철학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가장 놀랍지 않은 일이라네.(플라톤의 파이돈) / 편안한 죽음만이 최고의 죽음은 아니다. /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있는 며칠의 삶이었다. / 의사의 임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지는 환자와 그 가족을 안아주고 그들의 옆에 있어주는 것이다. / 폴 칼라니티가 죽은 후 그의 아내 루시는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은 제게 두가지 유산을 남기고 갔습니다. 첫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만족해 하실만한 사랑을 남겼습니다. 둘째는 그래서 바다 보다 더 넓은 고통을 주고 가셨습니다’ /결혼 생활을 지키는 비결은 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는 것이다. 불치병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 뿐이다. 사랑은 불치병을 고치지는 못해도 이기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Questions & Comments
▷Sharing – 나의 장례(예식, 유언, 장지 등) 준비해 보기
다음은 제 서가에 있는 책들과 기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참고도서’로 선별하여 추천하는 도서들입니다.
1. 노년의 역사, 팻 테인, 안병직역, 글항아리, 2015
2. 노년, 시몬 드 보브아르, 홍상희, 박혜영 공역, 책세상, 2002
3. 노년에 관하여, 키케로, 오흥식역, 궁리, 2002
4. 죽음의 신학, 김균진, 대한기독교서회, 2002
5. 죽음 앞에서의 삶 – 삶 속의 인간, 빅이문, 미다스북스, 2016
6. 죽음이란 무엇인가, 셜리 케이건, 박세연역, 엘도라도, 2012
7. Death, The Final Stage of Growth, Elizabeth Kubler-Ross, Prentice-Hall, N.J. 1975
8. 살아야하는 이유, 강상증, 송태욱역, 사계절, 2012
9. 본향가는 길 바래다 드릴께요, 조이스 허치슨, 진수미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10. 죽음 – 가장 큰 선물, 헨리 나웬, 홍석현역, 홍성사, 2006
11. 노인의 영광은 백발, 헨리 나웬, 최종수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12. 은퇴와 믿음 생활, 리처드 모간, 최종수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13.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엘봄, 공경희역, 세종서적, 2004
14. 아름다운 마무리, 법정, 문학의 숲, 2008
15.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혜민 글, 이영철 그림, 샘앤파커스, 2012
16.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 소노 아야코, 오경순역, 리수, 2004
17. 사람으로부터 평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오경순역, 리수, 2006
18. 마흔에서 아흔 까지, 유경, 서해문집, 2005
19. 신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킨스, 김승욱역, 알마, 2014
20. 인생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류시화역, 이레, 2006
21. 죽음 그리고 성장,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이레, 2010
22. 죽음의 스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이시형역, 청아출판사, 2005
23. 나는 몇살까지 살까?, 하워드 프리드만 / 레슬리 마틴, 최수진역, 쌔앤파커스, 2011
24. 어머니와 함께 한 900일간의 소풍, 왕일민, 유현민역, 랜덤하우스, 2007
25. 100가지 죽음이 가르쳐준 행복한 인생의 세가지 조건, 오츠 슈이친, 박선영역, 21세기북 스, 2011
26.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김희창역, 부키, 2015
27. 느리게 산다는 의미 2, 피에르 쌍소, 김주경역, 동문선, 2002
28. 인생의 황혼에서, 헬렌 니어링, 전병제, 박정희 공역, 민음사, 2002
29.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드는 법, 대니얼 클라인, 김유신역, 책읽는 수요일, 2013
30. 월든, 헨리 소로우, 강승영역, 은행나무, 2011
31. 고난 –가장 고귀한 보화, 바실레아 쉴링크, 쉴터, 1998
32. 희망의 발견 – 시베리아 숲에서, 실뱅 테송, 임호경역, 까치, 2015
33. 하프 타임 1, 2, 밥 버포드, 김성은, 이은정 공역, 낮은 울타리, 2002, 2004
34.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칼 필레머저, 박여진역, 오란도, 2014
35. 죽기 전에 크리스천이 해야 할 66가지, 김진혁, 부오션, 2008
36.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오츠 슈이치, 황소연역, 21세기북스, 2010
37.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로버트 풀검, 박종서역, 김영사, 1989
38. 인생이 내게 준 선물, 유진 오켈리, 박상은역, 꽃삽, 2006
39. 나이듦이 고맙다, 김동길, 두란노, 2015
40. 행복한 삶 – 거룩한 죽음, 김드진, KMC, 2009
41. 죽음을 위한 준비, 김장환, 한국방송센타, 1986
42. 호주장례안내서, 이문철, 2007
43.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했다, 사사키 후미오, 김윤경, 비지니스북, 2016
44. 걷기 –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이재형역, 책세상, 2014
45.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이지수역, 마음산책, 2015
46. 죽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이지수역, 마음산책, 2015
47. 나이드는 데도 예의가 필요하다, 고광애, 바다출판사, 2015
48. 나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하여, 고광애, 서해문집, 2013
49. 실버들을 위한 수다, 고광애, 유경 공저,
50.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김명남역, 문학동네, 2010
51. 여러분 죽을 준비 했나요, 스터즈 터클, 김지선역, 이매진, 2015
52.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있다, 박완서, 웅진지식하우스, 2011
53.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피터 싱어, 노승영역, 시대의 창, 2014
54. 속도에서 깊이로, 윌리엄 파워스, 임현경역, 21세기북스, 2011
55. 끝나지 않은 여행, 스캇 펙, 조성훈역, 율리시즈, 2012
56. 용서, 달라이 라마, 빅터 챈 공저, 류시화역, 오래된 미래, 2007
57.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터 카터, 조경숙역, 아름드리미디어, 2002
58. 티베트의 지혜, 소갈 린포체, 오진탁역, 민음사, 2001
59.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안셀름 그린, 카톨릭출판사, 2017
60. 참 괜찮은 죽음, 헨리 마시, 김미선역, 더 퀘스트, 2014
61.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최세희역, 다산책방, 2016
62. 죽음, 임철규, 한길사, 2012
6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똘스또이, 김근식, 고산 공역, 도서문화사, 2007
64.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똘스또이, 고일역, 작가정신, 2011
65. 빛, 색갈, 공기 : 우리가 죽음을 대할 때, 김동건, 홍성사, 2006
66. 좋은 이별, 김형경, 프른숲, 2009
67. 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세계사, 2004
68. 세계묘지문화기행, 박태호, 서해문집, 2005
69. 장례의 역사, 박태호, 서해문집, 2006
70. 세계명작산책 2. – 죽음의 미학, 이문열, 살림, 2003
71. 철학 – 죽음을 말하다, 정동호 외, 산해, 2004
72. 임종을 마지하는 마지막 일주일, 임장민 /지영창지 공저, 조현역, 군자출판사, 2003
73.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 최화숙, 월간조선사, 2002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