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 이집트 방문기 (11)
시드니인문학교실에서는 지난 2023년 10월 11일~21일 (이집트·이탈리아, 10박 12일), 10월 22일~24일 (강릉 오죽헌·설악산·남양주 다산생가, 2박 3일)에 “아는 만큼 보인다” (“I Can See As Much As I Know”)라는 주제로 제2차 인문학여행을 33인이 동행해 실시했다. 가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가보니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방문기를 어떻게 써야하나 생각하다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보다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내어 기록해 본다. _ 편집자 주.
이집트 룩소르 (Luxor)에서 이탈리아 밀라노 (Milano)로
이집트 일정을 마치고
우리 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단은 2023년 10월 12일 (목)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해 13일 하루 동안 바티칸 박물관과 카타콤베 일대를 방문한 후 오후 6시 30분 비행기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이집트 카이로로 향해 10월 13일 저녁부터 17일 오전까지 카이로와 룩소르 일대의 유적들을 방문하며 하루하루 빽빽한 일정을 소화했다.
10월 14일에는 세라피움 신전 (폼페이 기둥), 마가 기념교회, 카이트베이 요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람, 10월 15일에는 기자 (Giza)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파피루스 공장, 나일강 범선 체험, 나일강변에서 점심, 이집트 문명사 박물관 (Egypt Museum of Civilization), 모카탐 동굴교회 방문 후 기차를 이용해 룩소르로 이동, 10월 16일에는 멤논의 거상, 왕가의 계곡, 핫셉수트 장제전, 카르낙신전, 룩소르신전 방문 후 카이로로 이동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16일 저녁 이집트의 일정을 모두 마친 우리 일행은 룩소르 공항에서 카이로 공항으로 향했다.
카이로 공항 소동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하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 공항 인근 호텔에서 1박 후 10월 17일 카이로공항에서 오전 8시 40분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을 착각했는지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다른 공항으로 안내해 바른 공항으로 가기위해 30여분을 우왕좌왕하는 일이 생겼다. 감사하게도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버스 편으로 20여분 옆 공항 터미널로 이동해 정시에 출발하는 이탈리아 밀라노행 E5 542편에 올랐다. 몇 분만 지체했어도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길 뻔했던 순간이었다. 감사하게도 온 일행이 한마음으로 신속히 이동해 예정된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3시간이 좀 못되는 시간동안 쉴 수 있었다. 쉼도 잠시 이탈리아 밀라노에 도착하니 10월 17일 (화) 오전 11시 30분이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밀라노공항에서 입국수속 후 이탈리아 가이드를 만났다. 우리 일행이 카이로공항에서 우왕좌왕했던 소식을 들었는지 위로의 말을 건내며 점심시간이 되자 근사한 이탈리안 식당으로 안내했다. 점심식사는 맛났다. 이집트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다른 오찬의 풍미가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이집트에서는 건조한 환경에서 맛보는 음식이어 상대적으로 느끼는 맛이 났다면 이탈리아에서는 풍성함 속에서 맛보는 점심이기에 또다른 맛이 났다. 사람의 입맛이 환경과 연관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정은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광장, 스칼라 극장, 빅토리아 엠마누엘 2세 겔러리아, 브레라미술관 관람 등의 일정이다.
밀라노의 역사와 개관
밀라노 (Milano)는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도시로, 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로,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강이 이 도시를 흐르고 있다.
기원전 400년에 켈트족과 인스부레스족들은 밀라노와 주변지역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원전 222년에 로마는 밀라노를 점령하여 메디올라눔이라고 불렀다. 로마가 점령한 지 몇 세기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원후 293년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였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으로 떠났으며 대신 막시미아누스가 황제로 임명되어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막시미아누스는 여러 대형 건축물들을 지었는데, 그 중에 대형 서커스로 크기는 470×85m에 달했으며 그 외에 여러 개의 거대한 기념비, 공중 목욕탕, 임페리얼 궁전과 같이 여러 가지 크고 복잡한 건물을 건축하였다. 이로써 밀라노는 서로마 제국의 군사, 행정, 교통,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했다.
313년 2월에는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리해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 역할로도 한 몫 하였다. 402년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라벤나로 이전하게 된다. 50년 후 (452년)에는 훈족이 도시를 장악했다. 539년, 비잔티움 제국과 동고트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밀라노는 함락을 당했고 그 와중에 도시의 시설들은 철저히 파괴된다. 569년 여름, 랑고바르드족이 이 지방을 점령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운다. 774년 밀라노는 샤를마뉴에 의하여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된다. 샤를마뉴는 밀라노의 중요성을 인정해 다른 식민지보다 자유도를 높이 부여했다. 이후 이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된다.
중세 시대 밀라노는 풍부한 평원을 기초로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를 공격해 1162년 밀라노는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며 또다시 재앙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롬바르디아 지방의 도시들은 동맹의 필요를 느껴 1167년 롬바르디아 동맹이 창립되고, 밀라노는 동맹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롬바르디아 동맹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1183년 프리드리히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이 동맹은 공동의 적에 의해 만들어진 동맹으로 불과해 군대가 물러나자 도시들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으며 당시 전쟁으로 인해 도시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 또한 그 전쟁 때문에 밀라노의 인구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이후 10년 동안이나 전쟁이 지속됐다.
이후 1277년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의 영주로 추대받으며 영주에 의한 도시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세력을 더욱 넓혀 인근의 많은 영역들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1395년 비스콘티는 밀라노 공작위를 얻는다.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14세기 초부터 15세기 중반까지 밀라노의 권력을 유지하였다.
1447년이 밀라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비스콘티 가문의 영주정은 끝이나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1492년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2세는 밀라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그 당시 밀라노는 스위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밀라노의 인구는 이탈리아 전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 밀라노 대교구가 자리한 곳이다. 밀라노 광역권은 또한 개신교, 동방정교회,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및 불교 공동체 등도 공존한다.
밀라노는 로마 제국 말기부터 기독교인이 많은 도시였다. 그 종교사는 성 암브로시우스의 특징으로 구분되었는데, 그의 유산에는 밀라노 대교구의 대부분에서 약 5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는 암브로시오 전례 (Rito ambrosiano)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이 예식은 미사, 전례 연도 (사순절은 로마 예식보다 4일 늦게 시작), 세례, 장례 예식, 사제 복장, 신성음악 (그레고리우스 말고 암브로시오 성가를 예식에 사용) 등의 다양한 절차를 가진다.
인구는 2009년 현재 130만 명이며, 광역 도시권 내에 337만 명이 거주한다. 밀라노 대도시의 인구가 320만 정도이며 면적이 1500km2로 대략 300만정도의 도시로 봐야 한다. 시내 인구는 수도 로마 다음으로 많으며, 광역 도시권 인구는 로마를 훨씬 초과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밀라노는 국제, 다국적 도시로도 불리는데, 인구의 13.9%가 외국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유럽의 주요 도시이기도 한데 주요 교통수단이 밀라노를 통과하며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 있고, 밀라노는 금융과 많은 비지니스 사업들이 본사를 두고 있어 유럽에서 손꼽히는 도시이다. 밀라노 광역권 GDP는 2008년을 기준으로 유럽에서 높은 편이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정치수도라면,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경제수도라 할 정도로 이탈리아 최대의 경제 중심지이다. 런던, 파리, 마드리드에 이은 유럽 4대 경제 도시이자 토리노, 제노바와 함께 이탈리아 산업 트라이앵글로 묶인다.
밀라노의 포르타 누오바 지구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지역으로 유니크레딧 타워를 비롯해 고층 건물들이 빌딩 숲을 이루고 있다. 이탈리아의 중앙 주식 시장, 주요 은행의 본점, 여러 대기업의 본사가 집중되어 있으며, 시 외곽에서 시작되어 북쪽 알프스 산맥을 따라 기계, 섬유, 의약, 자동차 등 분야의 수많은 공장이 분포하여, 유럽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큰 제조업 산업 단지를 구성하고 있어 이탈리아 제조산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경제의 중심지이면서 매우 유서 깊은 도시로 많은 문화재와 문화 시설이 있어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밀라노 대성당, 라스칼라 극장이 특히 유명하며,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1906년 세계 박람회를 이 도시에서 개최했으며 2015년 등록박람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밀라노는 세계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유명 패션 및 명품 브랜드의 본사와 패션/디자인 박람회가 집중되어 있다. 매년 열리는 밀라노 패션 위크는 세계 4대 패션 위크에 들 정도로 규모가 크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과 광장
밀라노에서 우리 일행은 제일 먼저 두오모 성당과 광장으로 향했다.
밀라노 대성당 (Duomo di Milano)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의 밀라노에 있는 대교성당으로, 현재 밀라노 대교구의 대성당이다.
두오모는 라틴어로 집을 뜻하는 domus에서 유래됐다.
밀라노의 상징인 밀라노 두오모는 1386년에 초석이 놓인 후 장장 500년이 지나 이탈리아 통일이 완료된 후인 1890년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
길이 157m, 너비 92m, 높이 108m로 고딕 양식의 진수를 보여 주는 이 성당의 외부 벽면은 성인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모두 3,159체라고 한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135개의 탑 꼭대기가 성인의 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 많은 조각 중 어느 것 하나 같은 형태의 조각이 없다고 한다.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전면 파사드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는 고딕·르네상스·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아주 독창적인 형태이다.
내부 입장 매표소는 두오모 옆 건물에 있으며 이 건물은 밀라노 왕궁 (Palazzo Reale di Milano)으로 일부는 밀라노 두오모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두오모는 1386년 안토니오 다 살루초 대주교가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에서 보편적이었던 후기 고딕 양식인 라요낭 (rayonnant)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다.
대성당 건설은 대주교의 사촌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밀라노에서 권력을 잡을 시기에 시작되었고, 이는 비스콘티 가문의 전임자였던 바르나보 비스콘티의 폭정에 대한 귀족과 노동 계급에 대한 보상을 의미했다.
훌륭한 새 건축물에 대한 열광은 곧 사람들 사이에 퍼졌고, 기민한 성격의 잔 갈레아초는 그의 사촌인 대주교와 함께 공사에 대한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건설 과정은 시모네 다 오르세니고를 수석 엔지니어로 하는 고용자 300명 가량의 두오모 건축공방 (Fabbrica del Duomo)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이루어졌다. 갈레아초는 공방에 칸돌리아 대리석의 독점 사용권을 주었고, 세금을 면제하였다.
1389년 수석 엔지니어에 프랑스인 니콜라 드 보나방튀르 (Nicolas de Bonaventure)가 임명되어 대성당에 강렬한 고딕 양식의 외관을 부여하였다.
10년 후에 다른 프랑스인 건축가인 장 미뇨 (Jean Mignot)가 파리에서 초청되어 작업 심사하고 개선하도록 하여, 돌을 전례 없는 높이에까지 들어 올리는 데에 새로운 기술들이 필요했던 석공들을 도울 수 있었다. 미뇨는 그 전까지의 모든 작업을 무너질 위험에 있고 (pericolo di ruina), 비과학적인 (sine scienzia) 것으로 선언했다.
이후 몇 년간 미뇨의 예측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어찌됐든 이는 갈레아초의 엔지니어들이 건설 기계와 기술을 개선할 수 있도록 자극하였다.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어 잔 갈레아초가 1402년 사망할 무렵에는 대성당의 거의 절반이 완공되어 있었다.
카를로 보로메오가 밀라노 대교구의 교구장에 착좌한 이후 모든 기념 유물들을 대성당에서 치워 버렸다. 이들 유물 중에는 비스콘티 가문의 조반니와 바르나보와 필리포 마리아, 스포르차 가문의 프란체스코와 그의 부인 비앙카 (Bianca), 갈레아초 마리아와 루도비코 등의 무덤이 있는데, 이들 무덤이 어디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보로메오가 행한 최대의 파격은 1571년 펠레그리노 티발디를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한 것이었다. 펠레그리노를 임명한 것은 논쟁거리였는데, 그가 밀라노 대성당 소속의 수사가 아니라서 공방의 규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보로메오와 펠레그리노는 대성당에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외관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대성당에 로마-이탈리아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당시의 외국의 것처럼 보이는 고딕 양식 외관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아직 대부분 미완성이었으나, 펠레그리노는 기둥들과 오벨리스크들과 거대한 팀파눔이 있는 “로마” 양식의 외관을 설계하였다. 펠레그리노의 설계안이 모습을 나타내었을 때는, 정면 부분의 설계 경기가 열려 12개 정도의 설계안이 제출되었다. 이 설계안은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실내 장식 작업은 계속되었다. 1575년에서 1585년 사이 사제관이 새로운 개축되었고, 신랑 (身廊) 안에 새 제대와 세례당이 덧붙여졌다. 주 제대를 향해 있는 목재로 된 성가대석은 1614년에 프란체스코 브람빌라가 지었다. 결국 보로메오는 1577년, 전체 건축물을 구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과 (많은 논쟁 끝에 1549년에 통합된) 산타 테클라 성당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17세기 초에 페데리코 보로메오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리치니와 파비오 만고네에게 대성당의 새로운 외관의 기초를 놓도록 하였다. 다섯개의 입구와 두개의 중앙 창문의 건설을 포함한 이 작업은 163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649년에 새로 온 수석 건축가인 카를로 부치가 혁명적 시도를 도입하였는데, 외관을 처음의 고딕 양식으로 되돌려서, 이미 완성된 세부장식들은 거대한 고딕 벽기둥과 두개의 거대한 종탑 내부에 집어 넣는 것이었다. 필리포 유바라 (1733)과 루이지 반비텔리 (1745) 등이 제시한 다른 설계안들은 모두 실현되지 못하였다. 1682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정면 부분이 철거되었고 대성당의 지붕 덮개가 완성되었다.
1762년 대성당의 주요 부분 중 하나인 108.5m의 마돈니나 (Madonnina)의 첨탑이 세워졌다. 이 첨탑은 프란체스코 크로체가 설계한 것으로 첨탑의 꼭대기에는 꼭대기에는 주세페 페레고가 대성당의 원래 구조에 맞게 설계한 여러 색으로 칠해진 마돈니나 조각상이 놓였다. 밀라노의 유명한 습기차고 흐린 기후로 인해, 밀라노인들은 자주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마돈니나가 먼 거리에서도 보이면 날씨가 좋은 날이라고 여겼다.
1805년 5월 2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에 즉위할 무렵, 건물의 외관을 완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의욕적이었던 그는 프랑스의 회계 담당자가 건축 공방에 부동산을 지불하여 모든 비용을 부담할 것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지불이 없더라도, 단 7년 만에 대성당의 외관이 완성된다는 것을 이는 의미하였다. 새로 온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소아베는 이전의 부치의 계획안을 따라 신고딕 양식의 세부 장식을 위쪽 창들에 덧붙였다. 감사의 형상을 한 나폴레옹의 조각상이 한 첨탑의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대성당에서 이탈리아 국왕에 즉위하였다.
이후 몇 년간 세워지지 않은 아치들과 첨탑들이 건설되었다. 남쪽 벽에 있는 조각상 또한 완성되었으며, 1829년에서 1858년 사이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새 것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미적으로는 덜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성당의 마지막 세부 장식은 20세기에 완성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완성된 출입구는 1965년 1월 6일에 열린 것이다. 이 출입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된 대성당 공사의 가장 마지막 작업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아직도 조각이 되지 않은 돌 덩어리들이 여러 개 남아있다.
대성당의 주 정면은 2003년에서 2009년 초까지 리노베이션 공사가 진행되었다.
2009년 2월에 공사가 끝나 칸돌리아 (Candoglia) 대리석의 색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 (Galleria Vittorio Emanuele II)
갈레리아 이름은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자 초대 이탈리아 왕국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서 유래했다.
이탈리아어로 ‘갈레리아’ (Galleria)는 “두 건물 사이의 천장이 존재하는 보행자용 길”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에는 여러 갈레리아가 있지만 밀라노에 있는 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가 가장 유명하다.
두오모 바로 옆에 있으며, 지하철 두오모 역 위에 있다.
개선문의 형상을 한 장엄한 모양의 5층짜리 아케이드로 된 쇼핑몰로 각종 명품관이 위치하여 있다.
철과 유리로 만든 지붕은 중앙의 유리 돔으로 이어지며, 프레스코로 장식된 루넷과 독수리 상 등으로 장식된 실내 벽면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건축가 주세페 멘고니 (1829 ~ 1877)가 이 쇼핑몰을 설계했는데, 에펠탑이 그랬듯이 건축 당시 역사적인 도시 구조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반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밀라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밀라노의 응접실’이 되었다. 바닥의 모자이크 또한 대단히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두오모쪽 반대 방향으로 나오다 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석상이 있다.
스칼라 극장 (스칼라좌)
역사가 오래된 스칼라 오페라 극장은 소리가 가장 울려퍼지기 쉬운 구조로 구상하여 지어졌다고 하며, 현대에도 지속적으로 오페라가 열리고 있는 극장이다.
스칼라 극장 (이: Teatro alla Scala, 널리 알려진 대로는 La Scala)은 밀라노에 있는 오페라 극장으로 명소이다.
1778년 8월 3일에 “Nuovo Regio Ducal Teatro alla Scala”라는 이름으로 allora의 L’Europa riconosciuta 공연과 함께 개장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그 장소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극장이다.
화재로 인해 원래 있던 밀라노의 궁정극장인 ‘두칼레 극장’ (Teatro Ducale)은 사육제 이후, 1776년 2월 25일에 소실되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령으로 산타 마리아 델 스칼라의 교회 자리에 세워졌으므로 그 이름이 지어졌다.
스칼라 극장은 1776년 이 불에 탔을 때 1778년에 모든 점에서 당시 최고의 조건을 갖춰 개장하였으나 그 후 다시 개수,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대전 후의 무대는 당시로서는 최신 최고의 시설을 갖추어 객석도 3,200석이나 되었으며 천장 가까이에 입석도 두어 재건, 1946년 4월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개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루마>, <오텔로>, <팔스타프>, <나비부인>, <투란도트> 등 여러 명작을 초연한 역사가 있으며, 언제나 일류 지휘자와 많은 명가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토스카니니에게 연마된 전통을 계승하는 관현악이나 합창도 상설되어 있다.
또한 이 극장은 실내 오페라를 상연하는 소극장이나 오페라 박물관, 발레학교 등의 시설도 있다.
오페라가 없는 날이나 낮 중에는 박물관으로 개장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스칼라 극장 외관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대신 극장 옆 커피숍에서 티타임을 갖으며 곧 입장하게될 브레라 미술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밀라노의 전경을 즐겼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임운규 목사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
호주성산공동체교회 시무,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