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인문학교실 2차 인문학여행 (22)
카이로의 역사와 관광명소
카이로
이집트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별명은 북아프리카의 수도. 인구는 대략 1000만 명이며 카이로 도시권 인구는 카이로, 기자, 카리우비야, 무누피아를 모두 합산할 시 최소 2100만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이다. 실제로 북아프리카권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아랍 연맹을 포함한 여러 국제기구의 본부가 있다. 요즘은 두바이로 위상이 옮겨 가고 있지만 여전히 카이로는 중요한 도시이다.
카이로는 이집트 북부 나일강 근처에 위치해 있다. 중동,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중심지로 이미 옛날부터 북아프리카의 중심지로 활약했다.
아랍어의 명칭은 ‘알-까히라’ 이며 ‘카이로’라는 표기는 영어 이름을 받아들인 것이다.
역사
①고대
오늘날의 카이로가 위치해 있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오랫동안 고대 이집트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기원전 6-4세기에 걸친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대부분 파괴되었고 기원전 1세기 후반 지역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건설된 알렉산드리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카이로 근교에 있던 고왕국 시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흘러 서기 4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쇠퇴한 멤피스 대신 현재의 카이로 지역에 해당하는 나일강 동쪽지역에 대규모 요새인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395년 로마제국이 분할됨에 따라 현재의 카이로 지역을 비롯한 이집트 지역은 동로마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② 중세
7세기 초 동로마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카이로의 주변 지역은 한동안 버려지게 되었다. 642년 아랍인 아므르장군이 이집트를 정복하며 바빌론 요새를 함락시키고 알렉산드리아가 항복하여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된 후에는 이전까지 이집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주변지역 사이의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슬람교를 도입했고 바빌론 동쪽에 푸스타트 (Fustat, 오늘날 구 카이로 지역)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워 수도로 지칭했다. 같은 해 그는 푸스타트에 이집트 최초의 모스크인 `아므르 이븐 알-아스 모스크 (Mosque of Amr ibn al-As)’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969년에 파티마 왕조 (시아파 계열 이스마일파) 는 튀니지를 버리고 이집트를 새 중심지로 삼으면서 푸스타트 남쪽에 신도시를 조영했는데 그 이름을 ‘승리자’ 혹은 ‘정복자’를 의미하는 ‘까히라’로 정하니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카이로’이다.
사실 당시 알 까히라는 파티마왕조의 칼리파와 그의 가족, 하인, 신하들이 살던 곳으로 실질적으로 이집트의 수도 역할을 하는 곳은 여전히 상류층과 일반 백성이 생활하고 있던 도시인 푸스타트였다.
파티마 왕조는 오늘날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인 ‘알 아즈하르’ 모스크를 짓기도 했으며 알 아즈하르 모스크가 지어질 당시 함께 만들어진 ‘알 아즈하르’ 대학은 다양한 철학과 학문을 가르치며 무슬림 세계에서 최고의 배움의 전당 역할을 하며 아직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1160년 십자군 전쟁 중에 예루살렘 왕국이 알 까히라를 향해 진격해 오자 파티마 왕조는 알까히라를 지키기 위해 푸스타트에 거주하던 시민들을 모두 알 까히라로 옮기고 푸스타트 구 도시를 모두 불태웠다. 54일 동안 불길이 꺼지지 않아 도시의 모습은 대부분 소실 되었고 아직까지 푸스타트는 그 때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파티마 왕조 이후 이집트는 아이유브 왕조 (1169 – 1250), 맘루크 왕조 (1250 – 1517)의 지배를 거쳤다. 특히 맘루크 왕조는 13세기에 카이로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전역에 걸쳐 알리는 등 카이로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13세기 중반에 흑사병이 도시를 강타하여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며 카이로는 쇠퇴하고 말았다. 다양한 악재와 포루투칼의 인도양 해상권 장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등으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던 맘루크 왕조는 1516년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으며 끝나게 되었고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③ 근대
1517년부터 이집트를 통치한 오스만 제국은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에게 이집트를 점령당했다. 하지만 3년 후인 1801년 프랑스는 영국과 터키 연합군에게 카이로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후 1805년부터 터키의 주도권 아래 무하마드 알리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며 카이로를 수도로 지정하였고 카이로는 서쪽으로 도시를 확장해 나가며 발전하였다.
1863년 무하마드 알리 왕조의 이스마일 피샤가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유학시절을 보낸 이스마일은 도시에 여러가지 유럽스타일의 건축물을 세우기도하고 1869년에는 1854년에 착공을 한 수에즈 운하를 개통했다. 이스마일은 이집트 근대화에 있어 큰 역할을 했지만 이 시기 이루어진 개발은 대부분 대출로 이루어져 외채가 불어나고 원정, 대공사 등은 이집트의 재정을 악화시켜 1875년 수에즈 운하 주식을 영국에 매각하고 말았다. 1882년 영국-이집트 전쟁이후 이집트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유럽인들이 정착하여 경제 중심지가 빠르게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뀌었다. 영국의 지배는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고 이 시기 카이로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1922년 영국은 이집트를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었다. 수에즈 운하는 1956년 선출된 나세르 대통령의 국유화 선언으로 다시 이집트의 소유로 돌아왔다.
이집트 왕국이 생겨난 후 카이로는 계속 발전하여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2백만 명에 달했다. 인구뿐만 아니라 도시도 함께 발전하여 새로운 주거지, 상업 시설과 정부의 건축물들은 도시의 풍경을 바꾸어 놓으며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④ 현대
1952년 ‘검은 토요일’ 사건으로 카이로 시내 700여 개의 상점, 영화관, 카지노, 호텔 등이 파괴되고 이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나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카이로를 떠났으나 도시 인구는 계속 늘어 났다.
1992년 10월 12일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해 545명이 사망하고 6512명이 부상, 기자 피라미드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011년 아랍 민주화 물결이 이집트에도 불어 닥쳤고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200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당시 30년째 이집트를 통치하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끄어 내리기 위해 시위를 벌였고 결국 무바라크는 하야하게 되었다.
카이로는 한국 현대사와도 인연이 있는 도시인데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언급한 국제 협약인 카이로 선언이 발표된 의미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해당선언이 있었던 장소에 카이로 선언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카이로의 관광 명소
카이로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심지로 여러 왕조를 거치며 다양한 종류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모습을 보여 주는 카이로에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이슬람사원, 초기 기독교 수도원과 교회 등 역사와 문화적 유물은 물론 발달된 도시의 모습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세계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유명 관광 명소들이 너무 많아 우리가 방문할 곳들을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예수님 피난 교회 / 모세 기념 교회
아기 예수 피난교회 (The Church of Abu Serga)는 순교자 세르기우스와 바쿠스를 기념하여 요셉이 헤롯의 사내 아이 살해 명령을 피해서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 (마2:13-16)와서 숨었다고 알려진 동굴 위에 주후 5세기경에 지어진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아기예수 피난 교회에서 아주 좁은 골목길로 3-4분 정도 가면 모세 기념교회 (Ben Ezra Synagogue)가 있다. Dl 교회는 원래 콥틱교회로 주후 6세기경에 지어졌는데 9세기 경 모슬렘 통치하에 있을 때 부과된 세금을 낼 돈이 없어서 유대인 Ben Ezra에게 팔았다고 한다. 그 후 유대인 회당으로 개조되었다. 이 교회는 ‘카이로 게니자’ (Cairo Geniza, 주후 870년경부터 1880년경까지 유대인들이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기록한 구약 사본)가 발견되어 더욱 유명해 졌다.
기자 피라미드 / 스핑크스
기자의 피라미드군 (Giza pyramid complex)은 이집트 기자 평원에 자리한 피라미드군이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카프레의 피라미드,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의 3대 피라미드를 비롯하여 그에 딸린 소규모 피라미드와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아우르는 명칭이다. 이집트 고왕국 제4대 왕조에 지어졌으며 피라미드군 외에도 여러 묘지와 노동자 숙소도 있다.
스핑크스 (sphinx)는 사자의 몸에 사람의 머리가 달린 상상 속의 동물이다. 왕권의 상징, 선한자의 보호신 역을 하였다. 이 괴물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동남아시아 등의 지역에서 설화에서 찿아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이집트 제3왕조 카프라 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 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 (지평선상의 호루스)으로 숭배되었다.
이집트 박물관 / 쓰레기 마을 모카탐 동굴 교회
이집트 박물관은 전 세계의 최대 규모의 고고학 박물관이다. 2002년 첫 발표 후 21년만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무려 117에이커의 면적으로 약 10만 개의 고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 4,549개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상과 왕비상, 람세스 2세 등의 동상들도 있다.
모카탐 동굴 교회는 ‘모카탐’이라는 쓰레기 마을로 유명한 곳에 있다. 모카탐 동굴 교회는 이 쓰레기 마을을 지나 모카탐 언덕 꼭대기에 거대한 돌산을 깎아 만든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류경희 회원 (시드니인문학교실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