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년 11월 5일, 이탈리아 탐험가•이집트 유물 고고학자 조반니 벨조니 (Giovanni Belzoni, 1778 ~ 1823) 출생
위대한 벨조니 (The Great Belzoni)라고도 알려진 조반니 벨조니 (Giovanni Belzoni, 1778년 11월 5일, 이탈리아 파도바 ~ 1823년 12월 3일, 베닌 제국)는 이탈리아 탐험가이자 이집트 고대 유물의 선구적인 고고학자였다.
– 조반니 벨조니 (Giovanni Belzoni)
.본명: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 (Giovanni Battista Belzoni)
.별칭: 위대한 벨조니 (The Great Belzoni)
.출생: 1778년 11월 5일, 이탈리아 파도바
.사망: 1823년 12월 3일, 베닌 제국
.배우자: 사라
.직업: 탐험가, 이집트 유물 고고학자
이탈리아의 탐험가, 고고학자.
1810년 이후 도굴범과 모험가는 이집트의 유물을 약탈했고, 모하메드 알리 총독은 온갖 편의를 아끼지 않고 그들을 지원했다
당시 유럽인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집트 골동품은 매우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람은 허가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이집트 주재 영사들 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총영사로 있었던 베르나디노 드로베티와 영국 영사 이었던 헨리 솔트였다.
드로베티와 솔트 영사의 하수인은 조각가 리포와 2m가 넘는 큰 키에 엄청나게 힘이 센 바로 그 인물이 벨조니였다.
○ 생애 및 활동
지오반니 바리스타 벨조니(Giovanni Battista Belzoni)는 1778년 11월 5일, 이탈리아 파두아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후 어린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그는 16살에 로마로 유학을 가서 수력학을 잠시 공부하기도 했지만, 1798년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점령으로 서둘러 네덜란드로 피신을 왔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거나 특별히 학문적으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1803년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만난 여인 사라와 결혼을 했다. 둘은 가난하지만 잉꼬부부로 이 부부는 결혼 이후에도 영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벨조니는 키가 2미터가 넘는 장신이었고 상당히 위압적인 체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생계를 위해 유럽 여러 곳에서 열리는 박람회나 전시회장에서 이벤트로 벌이는 서커스에서 차력사로 일하다가 새들러스웰스 극장의 차력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벨조니는 단숨에 영국을 사로잡았다. 세련된 외모에 2미터가 넘는 장신의 특징을 활용해 ‘파타고니안 삼손’으로 불리며 인기 인사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화려한 의상과 무대에 묻혀 보낼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영국의 외교관인 헨리 솔트와 만나며 절묘한 변곡점을 맞이한다.
헨리 솔트는 큰 철제 틀에 12명의 사람을 들고 무대 위를 오가는 파타고니안 삼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그가 가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매료됐다.
결국 1815년 벨조니를 자신의 부임지인 이집트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초빙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헨리 솔트는 룩소르 반대편 나일강 서안에 있는 파라오 신전에서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을 발굴하고 있었는데, 이 작업을 벨조니에게 맡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중요한 일을 하는데 단순한 차력사에게 느낀 호감 때문에 벨조니를 초빙한 것은 아니다. 벨조니는 차력사로 활동하면서 화려한 무대 위에 작동되는 지렛대와 유압판, 유압장치 등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괴력의 차력사이자 무거운 것들을 올리는 작업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벨조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꾼 80명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단 5일 만에 람세스 2세 조각상을 나일강 하류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벨조니는 멈추지 않았다.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집트에 눌러앉은 그는 쿠르나의 고분 도굴꾼들과 친구가 되어 열심히 사막 아래의 보물을 찾아다녔다. 간혹 지방관이 문제를 제기하며 항의했어도 특유의 카리스마와 괴력으로 무시했다. 그는 이집트의 폭군 그 자체였다.
그가 아부심벨을 발견한 1816년, 그는 당시 유명한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경쟁자였던 드로베티의 방해와 견제를 받으며 룩소르에서 나일강을 따라 남쪽으로 지금의 아스완과 누비아 지역을 탐험한다. 아스완 지역에서는 원래의 필레 신전이 있었던 아길키아 섬 (후에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이 섬이 수몰되고 현재의 필레 섬으로 신전이 옮겨짐)에서 이시스 여신의 아름다운 신전을 탐험했으며, 엘레판틴 섬 등을 탐험했고, 아스완 남쪽 누비아 땅을 탐험하는 도중 모래 속에 묻혀서 두상만 겨우 볼 수 있었던 아부심벨 신전을 발견했다. 그는 배에서 내려 이 곳이 심상치 않은 곳임을 직감하고 모래를 제거하려 했으나 신전의 입구는 2천 년이 넘게 모래에 묻혀 있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1년 뒤 그는 솔트의 후원 하에 다시 이곳을 방문해 수많은 인부를 동원해 모래 제거 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신전의 입구를 열었다. 모래가 제거되어 모습을 드러낸 아부심벨 신전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3200년 전에 대 이집트 제국을 건설한 람세스 2세가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제 1 부인이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은 소신전 등 절벽을 60미터나 깍아 들어가서 그 굴 속에 거대한 신전을 건축해 놓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던 덕으로 신전 안에 새겨 놓은 부조와 상형 문자들은 완벽하게 보존 돼 있었고 생생한 물감의 색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람세스 2세 통치 당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인 히타이트 원정에서의 카데슈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보는 이를 전율케 했다.
후에 벨조니는 후원자였던 솔트가 사실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발굴하고 운반했던 유물들이 유럽의 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콜렉션으로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벨조니는 깊은 절망에 빠졌지만, 그의 아내 사라는 늘 그랬듯이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후 그는 솔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이집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고대 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는 현장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경쟁자인 프랑스의 드로베티와의 신경전이 극에 달했던 당시 벨조니는 왕가의 계곡으로 훌쩍 떠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하에서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이자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지배자 중 하나인 세티 1세의 무덤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후로도 그는 추가로 왕릉 4곳을 더 열어 엄청나게 많은 고대 이집트의 보물을 가져간다. 왕릉 한 곳에는 자랑스러운 업적을 거둔 자신의 이름을 써놓기도 했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 발굴과 복원 현장에 함께 했고, 왕가의 계곡에서 현재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무덤 중 하나로 꼽히는 세티 1세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의 무덤을 최초로 열었다. 이 무덤은 벨조니 무덤이라는 애칭이 있을 정도다.
또한 기자 피라미드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피라미드 카프렌 왕의 피라미드 내부를 최초로 탐사했으며, 자신의 이름과 날짜를 피라미드 안 현실벽에 새겨 두기도 했다. 또한 이집트 사막 투어의 유명한 코스이기 한 바하리야 사막을 최초로 탐험한 유럽인이기도 하다.
벨조니는 이집트 고고학의 틀을 세운 사람이지만, 과연 그를 진정한 의미의 고고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가 활동하던 당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의 존재를 잘 몰랐다. 당연히 고고학이라는 학문도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유럽인들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역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과시용 보물을 얻으려 왕릉을 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벨조니는 당시 이집트를 찾아온 유럽인의 전형이었다. 벨조니는 고고학적 후각이 대단히 뛰어났지만 오로지 부와 명예를 좇았던 보물 사냥꾼이었다.
이처럼 벨조니는 평생을 부와 명예만 좇은 불나방같은 사람이었으나 현대 이집트 고고학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기도 하다.
벨조니는 고고학자 출신이 아니었고, 우연히 이집트로 건너와 유물 거래상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적도 있지만, 후에 개심하고 이집트 유물 발굴과 보존에 누구보다 앞장 섰으며, 자신이 발굴한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책을 발간해 오늘날 당당히 ‘이집트의 연인들’의 반열에 올라 설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발굴해 낸 아부심벨은 현재에도 이집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신전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곳이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누비아 인들의 땅을 채운 나세르 호수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아부심벨, 유네스코의 노력으로 원래의 위치보다 약 70미터 가량 높은 곳으로 옮겨진 이 신전은 20세기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손을 다시 한번 거쳐, 지금도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는 람세스 2세의 눈빛이 생생한 곳이다.
한편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 (Giovanni Battista Belzoni)는 1823년 12월 3일, 베닌 제국에서 별세했다.
이집트를 떠나 후에도 그의 방랑벽은 끝나지 않았고, 1824년 서아프리카로 탐험을 떠났다가 베닌 왕국이라고 불리는 팀북투에 이르러 이질에 걸려 별세한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교보문고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