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 15일, 대한민국의 마라토너 손기정 (孫基禎, 1912 ~ 2002) 별세
손기정 (孫基禎, 1912년 10월 9일 ~ 2002년 11월 15일)은 일제 강점기 때 활약한 한국인 육상 선수이자 체육인이다. 1936년 하계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 학력
약죽보통학교 졸업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상과 자퇴 (이후 1963년 8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명예 학사 학위)
메이지 대학 법학과 학사
- 기타 이력
前 숭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초빙교수
前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초빙교수
前 한양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초빙교수
- 기타 비고 사안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소식이 알려지자 윤치호는 광의로 보아 황인종의 자랑이며 백인의 종의 우월성을 타파한 일이라며 칭송하였다.
- 수상
1936년 1936년 하계 올림픽대회 육상 남자 마라톤 금메달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1963년 혁명정부 문화공로상
1967년 바킬라아베베상
1967년 서울신문사 체육상
196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공로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2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창립 70주년 특별기념상
2002년 체육훈장 청룡장
- 관련 문화재
.손기정투구: 손기정 투구 (보물 제904호, 1987년 3월 7일 지정)는 기원전 7~8세기 (1875년 발굴)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손기정 투구”로 알려진 이 투구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1936년 하계 올림픽 당시 육상 남자 마라톤 우승자에게 씌워 주려 했으나 전달되지 못하고 50년 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6년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지난 1994년 국가에 기증했으며 정부는 손기정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서양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 904호로 지정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 경기 때 승리를 기원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바치기 위해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투구는 1875년부터 7년여 동안 그리스 올림푸스 제우스 신전을 발굴한 독일 고고학교수인 쿠르티우스의 발굴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투구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코린트 양식으로 눈과 입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감싸는 일체형으로 제작되었다.
코린트 양식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투구는 원형의 머리부분에서 목까지 직선으로 내려오게 만들어졌다.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손기정 (孫基禎, 1912 ~ 2002)이 받은 투구와 같은 것으로 머리부분에서 아래로 잘록하게 들어갔다가 목 부분에서 나팔처럼 퍼지게 제작된 것이다.
○ 생애와 활동
손기정은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달리기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으며, 소학교 6학년 때 신의주와 만주 안동현 사이를 달리는 안의육상경기대회 (安義陸上競技大會)에 출전하여 청장년을 누르고 5,000m 달리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마라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1931년 조선신궁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5,000m 달리기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고, 1932년 동아일보사 주최 경영 (京永)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육상 명문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양정고등보통학교 입학 후 1932년 4월 일본 호오치신문사 주최 동경-요꼬하마간 역전경주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1933년 3월 고려육상경기회 (高麗陸上競技會) 주최 제3회 15마일 크로스컨트리경주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각종 장거리경주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에는 제10회 조선신궁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하였다.
1935년 3월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파견 후보 1차선발전에서 2시간 26분 14초의 세계기록으로 우승했고, 4월에 개최된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에서도 2시간 25분 15초로 우승했으며, 11월에 개최된 메이지신궁대회 겸 올림픽 선발 2차전에서도 2시간 26분 41초로 우승했다.
다음해 5월에 개최된 최종전에서는 1위의 남승룡 (南昇龍) 선수에 이어 2위를 하였고, 일본 선수들이 3위와 4위를 하였다.
이에 일제는 올림픽에 일본 선수를 내보내기 위해 베를린에서 20㎞로 최종 평가전을 하도록 하였다.
최종평가전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1위와 2위를 하여 올림픽에 출전하였으며, 손기정은 1936년 8월 9일 밤 11시 (한국 시간)에 거행된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공인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하였다.
올림픽이 끝난 10여 일 후 동아일보의 이길용 (李吉用) 기자가 이상범 (李象範) 화백 등과 더불어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운 후 그 사진을 1936년 8월 25일자 석간으로 배포하였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일장기말소사건 (日章旗抹消事件)이다.
광복 후에는 1948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 육상경기연맹 회장 등을 역임했고, 1966년부터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 한국대표선수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서울올림픽경기대회조직위원회 위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체육발전을 위해 활약했다.
한편, 손기정의 저서로는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 있다.
- 상훈과 추모
손기정은 주권이 상실된 시대에 진정한 한국인의 모습을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뛰었고,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경기대회의 사인북에는 한글로 ‘손긔졍’이라 쓰고 ‘KOREAN’이라고 적었다.
그는 이에 대해 “한문으로 이름을 적지 않은 것은 일본인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Korea라고 적은 것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또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부상으로 받게 돼 있던 그리스 투구를 각고의 노력 끝에 1986년 베를린올림픽 50주년 기념행사 직전에 베를린에서 반환받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암울한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 ‘Korea’, ‘대한민국’이 존재함을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과 독일, 미국 등 세계 각국이 손기정의 국적이 Korea라고 인정하게 되었고,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Korean Marathon Runner라는 이름으로 손기정을 소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제2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1970년)을 받았다.
참고 = 위키백과, 한민족대백과사전,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