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소개
걷는 사람 (L’Homme qui marche)
오귀스트 로댕 / 1907년
“사람들은 내 조각 <걷는 사람>에 머리가 없다고 비판하지. 그런데, 도대체 걷는 데 왜 머리가 필요한 거요?” – 오귀스트 로댕
<걷는 사람>은 청동 조각판 위에 올려져 있으며 움직임이라는 요소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미술관 (the National Gallery of Art)이 제시한 참고문헌에 따르면 이 <걷는 사람>은 성 요한의 머리와 팔이 없는 버전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조각계의 인상주의자로 불리는 로댕 특유의 거친 표현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로댕의 작품들은 보통 섬세하고 매끈한 묘사를 추구하기 보다는 어찌 보면 대충 인체의 부분들을 옮겨 놓아 대략적인 양감을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거친 표현에서 오히려 마치 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듯 한 생생함을 느끼곤 하였다.
<걷는 사람>은 로댕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불완전한’ 형상이다.
로댕은 후기 작업에서 인체의 전체 형상 중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하고 그것의 역동적인 포즈를 연구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 작품 또한 이러한 후기 작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로댕은 이 작품에서 그의 초기작이었던 <침례교도들에게 설교하는 성 요한>의 파워풀한 자세를 그대로 가져왔다.
당시 아카데믹 협회는 로댕의 작업들을 이러한 역동적인 포즈에 포커스를 둔 개성 있는 작품이라고 파악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카데믹 협회에서는 로댕의 작업을 거대한 건축 장식에 필요한 일부의 조각 작업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댕은 그의 작품을 통해 그것이 건축에 필요한 일부가 아니라
충분히 그의 작업 자체로도 독자적인 작가 관을 갖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담아냈다.
당시의 미술평론가 알베르 엘센 (Albert Elsen)과 조각가 헨리 무어 (Henry Moore)의 언급에 따르면 이 작품은 “어떠한 살아있는 참고자료도 없이 그리스ㆍ로마 미술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 작품이 머리와 손이 없는 헤라클레스를 연상케 하며 그리스ㆍ로마 신화와도 연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술사가 레오 스타인버그 (Leo Steinberg)는 이 <걷는 사람>의 포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이 조각의 자세는 마치 윗부분에 놓여진 토르소가 아래 부분의 안짱다리에 의해 옮겨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성큼성큼 걷는 하체의 다리는 마치 토르소를 전달해주는 매개체와 같으며 상체와 하체의 이러한 조합은 그리스ㆍ로마 미술의 완벽한 조화를 목적으로 하는 고전적인 특징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 조각은 완벽하게 비고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로댕 미술관
로댕 미술관은 처음에 가발 상인의 저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는데 루이 14세의 며느리인 멘느 공작 부인(Duchesse du Maine)이 거주하면서 로코코시대 사교계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녀가 1753년 세상을 떠난 후 저택의 소유주는 프랑스 전쟁 영웅인 비롱(Biron) 장군이 되고 이때 저택 정원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 때부터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오늘날까지 이 건물의 이름은 ‘비롱 저택(hotel Biron)’이라고 불리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대중 무도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파리에 파견된 교황의 대사 및 러시아 대사관저, 그리고 수도원 여학교 등으로 사용되다가 결국에는 예술가들에게 싼 값에 세를 주는 아틀리에가 된다. 이 곳에서 로댕도 여러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 그 중에는 윤동주 시인이 동경했던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있었으며 그는 로댕의 비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1년 프랑스 정부의 계획에 따라 비롱저택은 철거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로댕은 그것을 막고자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나의 모든 작품을 국가에 기증한다. 여기에는 석고상, 대리석상, 청동상, 석상, 데생, 그리고 예술가와 장인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내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골동품들이 포함된다. 나는 이 모든 소장품을 비롱저택에 전시해 이곳을 로댕 미술관으로 정하고 내 남은 여생을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줄 것을 국가에 요청한다.” – 오귀스트 로댕
모든 작품을 기증한다는 로댕의 제안은 1916년이 되어서야 정부에 받아들여졌고, 1917년 그의 죽음 이후 1919년 로댕 미술관으로 개관한다. 그의 손에 의해 탄생한 7천여 점의 조각, 1만여 점의 데생, 이 모든 작업을 아낌없이 내놓고 명예만을 얻고 떠난 로댕이기에 미술관을 찾는 자들은 더 큰 감동을 선물로 받는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