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8년 1월 5일, 스페인의 철학자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Francisco Suarez, 1548 ~ 1617) 출생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Francisco Suarez, 1548년 1월 5일 ~ 1617년 9월 25일)는 에스파냐의 신 (新) 스콜라학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우수박사 (優秀博士).
–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Francisco Suarez)
.출생: 1548년 1월 5일, 스페인 그라나다
.사망: 1617년 9월 25일 (69세), 포르투갈 리스본
.축일: 7월 31일
.국적: 카스티야 연합 왕국
.종교: 가톨릭
.직업: 철학자, 신학자, 종교인
.소속: 예수회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Francisco Suárez)는 스페인 철학자 (별칭은 Doctor Eximius. 1548. 1. 5 스페인 그라나다~ 1617. 9. 25 포르투갈 리스본)이다.
스페인의 신학자, 국제법 창시자다. 보통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가장 뛰어난 스콜라 철학자로 여겨진다.
로마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의 주요신학자이다.
○ 생애 및 활동
그라나다에서 태어나 16세 때 제수이트회에 가입, 살라망카에서 배웠다. 아라비아 및 세고비아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1571), 후에 바야돌리드, 로마,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서 가르친 다음 리스본에서 별세하였다.
프란시스코 수아레스 (Francisco Suarez)는 1548년 1월 5일, 스페인 그라나다에 부유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1561년 살라망카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으나, 1564년 그곳을 떠나 예수회에 가입했다.
1571년부터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580년에는 로마의 예수회대학에서, 그뒤에는 알칼라대학에서 신학강사로 일했다.
1593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임명을 받아 코임브라 대학 교수로 봉직했다 (1597 ~ 1616). 에보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수아레스는 매우 박식하고 조리정연한 학자로서, 그의 저술은 미완성인 파리판 (1856 ~ 78) 만도 28권에 이를 정도이다.
그의 철학의 주된 연구 업적은 〈형이상학 논쟁 Disputationes Metaphysicae〉(1597)으로, 이 책은 1세기가 넘는 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유럽의 대학교들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특히 인간의 의지 문제와 일반현상 대 특수현상 개념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수아레스는 영국의 둔스 스코투스 (1265경 ~ 1308)나 스페인의 루이스 데 몰리나 (1535 ~ 1600) 같은 스콜라 학자들의 비판을 고려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체계는 수아레스주의라고 따로 불러도 좋을 만큼 아퀴나스의 견해로부터도 많이 벗어나 있다. 교황 파울루스 5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그리스도교 국가의 본질에 대한 종교론적 저술을 여러 편 썼다. 그중 〈종교적 덕과 국가 De Virtute et Statu Religionis〉(1608~09) · 〈가톨릭 신앙 옹호 Defensio Fidei Catholicae〉 (1613)는 왕이 지상에서 신을 대변하여 통치한다는 주장을 옹호한 영국의 신학자들에 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왕권신수설은 제임스 1세 재위기간에 영국에서 나온 것인데, 제임스 1세는 수아레스의 〈가톨릭 신앙 옹호〉를 런던에 있는 세인트폴 대성당의 계단에서 불태워버렸다. 〈결과에 도움을 주는 진정한 지식에 관하여 De Vera Intelligentia Auxilii Efficacis〉(1605, 출판 1655)에서 그는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구원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 콩그루이스트 운동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알맞거나 조화로운 덕행을 성취하기에 충분한 은총을 주었다.
수아레스의 정치이론과 법철학은 〈가톨릭 신앙 옹호〉·〈법에 관하여 De Legibus〉(1612)에 전개되어 있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거부하고, 정치 권력의 본래 주인은 인민 자신이라고 선언했다. 즉 국가는 인민이 동의한 사회계약의 결과이다. 인간 개인의 생존권·자유권·재산권에 대해 논증하면서, 노예 상태가 특정한 사람들의 자연 조건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생각을 배격했다. 〈전쟁과 인도에 관하여 De Bello et de Indis〉에서는 인도에 대한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 대부분을 비판했다. 그는 인도의 섬들도 범세계적 국가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스페인과 법적으로 동등한 주권국가라고 보았다.
그의 생애 대부분은 열정적인 철학자와 신학자의 삶이었다. 그런 그의 별명은 그의 이러한 삶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비범하고 신심 있는 박사’ (Doctor Eximius et Pius)였다. 교황 그레고리 8세는 로마에서 이루어진 그의 첫 강의에 참석하였고, 교황 바울 5 세는 그를 영국의 제임스 1세의 오류를 논박하기 위해 불렀다. 또한 스페인의 필립 2 세는 그를 대학의 명성을 더해주기 위해 코임브라 (Coimbra) 대학에 보냈으며, 또한 그가 바르셀로나 (Barcelona)의 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 대학의 박사들은 그를 만나기 위해 예의를 다해 그들 학과의 옷을 입고 나와 반겨 만났다. 이와 같이 그를 살아있는 동안에도 여러 현안에 참여함은 물론이고 열정적인 연구로 존경을 받으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프란시스코 수아레스는 1617년 9월 25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별세했다. 향년 69세
포르투갈 (의 리스본 혹은 코임브라)에서의 죽음 이후, 생전보다 그의 명성은 더욱 더 커졌다. 그는 이후 대표적 학자들인 위고 글로티우스 ( Hugo Grotius)와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그리고 라이프니츠 (Gottfried Leibniz)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1679년 교황 오니센트 11 세는 65 가지의 ‘결의론’ 관련 명제를 금지했다. 이는 수아레즈와 에스코바르 (Escobar) 그리고 그 이외 예수회 학자들의 것으로 부터 취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은 이와 같은 파문이란 조건 속에서 더 이상 가르쳐질 수 없었다. 이러한 파문은 수아레즈의 결의론자 (casuist)의 모습 때문이다. 하지만 수아레즈는 분명 중세 스콜라 철학의 말기 그리고 근대 초기에 있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철학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수아레즈의 철학
언제나 연구에 열중하였으며 많은 학설의 조화·중용을 목표로 했고, 과학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그는 《영국 교회파의 오류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옹호》(Defensis fidei catholicae et apostolicae adversus anglicane sectae errores, 1613)라는 저서에서 교황은 직접 신에 의해 임명되지만, 국왕권력은 인민에 유래하며 원시계약 조항이나 사회공동체 유지라는 목적으로 제한되어 교황권력이 세속권력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이교도 (異敎徒)의 군주 (프로테스탄트 군주)는 신하에 의해 폐위 또는 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예수회의 과격한 사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가톨릭과 개신교간 종교전쟁의 구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그의 저서가 불살라지거나 금지되었다. 국제법학 (國際法學)에서는 그로티우스의 선구가 되는 사상을 말했다. 그의 영향은 널리 신교의 대학에도 미쳤다.
- 수아레즈의 형이상학
수아레즈를 지금 우리가 아는 수아레즈로 있게 한 것은 그의 형이상학 떄문이다. 그런 수아레즈에게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실재적 본질'(realis essentia)과 ‘실존'(existentia)에 대한 학문이다. 이는 대체로 개념적 존재자보다는 실재적 존재자를 고려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질료적 대상보다는 비질료적 대상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는 본질과 실존은 신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유한한 존재자의 본질과 실존은 실재적으로 구분된다고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이외 다른 철학자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는 사실 유한한 존재자들의 본질과 실존은 개념적으로 구분될 뿐이라고 한다. 즉 실재적 구분은 거부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직 논리적으로만 구분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명한 갈림이라고 하겠다.
보편자에 대한 논의를 보자. 그는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의 실재론과 오캄(William Ockham)의 유명론 사이길을 가려 한다. 그의 입장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재론의 그것보다는 유명론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는 그런 이유에서 간혹 ‘온건 유명론자'(moderate nominalist)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진면모 혹은 전체라고 볼 순 없다. 대상적 정밀(praecisio obiectiva)을 인정하는 것은 그를 온건한 실재론자(moderate realist)로 분류할 수 있게 하기도 하기 떄문이다.
그는 오직 실존의 세계 가운데 실재적 단일성은 개별자만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편자는 ‘실재의 부분 외부에'(ex parte rei) 실존한다고 주장함은 하나의 불가분 형상(one indivisible form)의 순수한 우유로 개별자를 바꾸어버리는 것릴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수아레즈는 비록 소크라테스의 인간성이 플라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일지라도, 그것들은 하나 그리고 동일한 인간성을 실재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형상적 단일성’들이 있다고 한다. 앞서 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경우에선 인간성’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적 단일성들은 개별자가 존재하는 만큼 그 만큼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자들은 실재적인 단일성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본질적이 혹은 개념적 단일성을 구성한다.(“ita ut plura individua, quae dicuntur esse ejusdem naturae, non sint unum quid vera entitate quae sit in rebus, sed solum fundamentaliter vel per intellectum.”) 형상적 단일성은 정신 혹은 이성의 임의적 창조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성의 모든 행위 이전에 실재의 본성 가운데 있는 것이다.(in natura rei ante omnem operationem intellectus.)
그의 형이상학 저작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의 형이상학 저작은 중세 사상의 실재적 역사와 고민을 한 몸에 체계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토마스주의 (Thomism), 스코투스주의( Scotism) 그리고 유명론이란 것으로도 확인 가능하다. 이 세 가지 흐름은 다소 과격적하게 말하면 중세의 주된 형이상학적 입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중세 무슬림 철학자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의 저작을 연구하고 이를 풀이하기도 했다. 이러한 체득이 그를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철학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열정은 그 자신을 그의 시대에 가장 뛰어난 형이상학자로의 명성을 누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노선을 따르는 이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독립적인 새로운 철학적 조류, 즉 수아레즈주의(Suarezianism)를 낳았다.
수아레즈주의는 다음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 존재자의 고유한 구체적인 존재성에 의하여 개체화의 원리가 설명된다.
- 질료의 순수 가능태란 주장을 거부한다.
- 지선의 직접적 인식 대상으로 개별자를 인정한다.
- 피조물은 존재와 본질 사이에 실재적 구분을 가지지 않으며, 동일한 사물을 개념화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수아레즈는 <형이상학 논고>에서 존재자를 분류한다. 이는 이후 예수회 철학자들이며 16 세기와 17 세기 프로테스탄트 스콜라 사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페드로 다 폰세카(Pedro da Fonseca)와 그 이외 철학자들과 신학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 <형이상학 논고>의 2 번째 부분 28-53 논고에서 수아레즈는 ‘무한한 존재자'(ens infinitum), 즉 신과 ‘유한한 존재자'(ens finitum), 즉 피조물을 구분한다. 이 구분, 즉 존재자의 첫 구분은 무한한 존재자와 유한한 존재자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은 다르게 말해서 ‘스스로 있는 존재자'(ens a se)와 ‘다른 것에 의하여 있는 존재자'(ens ab alio)의 구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두 번째 구분은 ‘필연적 존재자'(ens necessarium)와 ‘우연적 존재자'(ens contingens)의 구분이다. 두 번째 구분은 ‘본질을 통하여 있는 존재자'(ens per essentiam)와 ‘분유를 통하여 있는 존재자'(ens per participationem)로 말할 수도 있다.
또 다른 구분은 ‘창조되지 않는 존재자'(ens increatum)와 ‘창조된 존재자'(ens creatum)의 구분이다. 마지막 구분은 ‘순수 현실태(actus purus)로 있는 존재자’와 ‘가능태로 있는 존재자'(ens potentiale)의 구분이다. 이러한 수아레즈의 존재자에 대한 구분은 결국 첫 번째 구분, 즉 유한한 존재자와 무한한 존재자의 구분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 수아레즈의 신학
신학에서 수아레즈는 몰리나 (Luis Molina)의 이론에 가깝다. 몰리나는 예수회의 학자이며, 인간의 자유 결단과 신의 예지를 조화하고자 하였다. 수아레즈는 이러한 몰리나의 관점을 더 조직적 이론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은총과 특별한 선택에 관한 하나의 교의적 이론이 되게 하려 했다. 그는 신이 자신의 예지에 의하여 인간의 상황에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은총을 부여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신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의존성과 인간의 자유 결단을 조화하려는 시도, 즉 몰리나의 시도에 근거한 것으로 합의론(congruism)이란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몰리나에게 시작된 이러한 논의는 1613년 예수회 전체로 확대되었다.
- 수아레즈의 법과 국가 그리고 교회
수아레즈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사회적 본성을 가진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신에 의하여 최고로 놓여졌다고 보았다. 이러한 본성은 법을 만들 가능태 역시 포함한다. 정치적 사회가 형성될 때, 그 국가의 권위는 신적인 것이 아닌 인간에게서 기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회의 본성은 관련된 인간에 의하여 선택된다. 그리고 그들의 본성적인 법률적 권력은 통치자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그 힘은 그 국민에게서 기인하기에, 국민은 그것을 되돌릴 권리를 가지기도 한다. 즉 통치자에 대항하고 바꿀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오직 통치자가 그들에게 악하게 행할 때이다. 국민들은 통치자를 죽이는 것을 참아야 하지만, 만일 정부가 국민을 억업하고 죽이려 한다면, 국민은 국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권리를 가지며, 그들은 악덕한 통치자를 죽일 수 있게 된다.
○ 주요 사상과 기여
1. 형이상학: 프란시스코 수아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특히 존재론 (ontology)에 관한 독창적인 논의를 펼쳤다. 그는 실체 (substance)와 우유적 존재 (accident)의 구분, 본질과 존재의 관계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그의 저서인 “형이상학 논문집 (Disputationes Metaphysicae)”는 스콜라 철학의 정수로 평가받으며, 1597년에 출판된 이 책은 근대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수아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되,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 전통을 발전시키며 독창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제시했다. 그는 존재가 단순히 신학적 개념에 한정되지 않고, 철학적으로도 독립된 탐구 주제임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그의 형이상학은 후대 철학자들, 특히 독일 관념론과 근대 합리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법철학과 자연법: 수아레스는 자연법과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자연법이 인간 이성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며, 신의 뜻에 의해 부여된 보편적인 도덕적 원리라고 주장했다. 특히 국가 주권과 국제법에 관한 그의 논의는 근대 정치철학의 기초를 닦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저서 “법률과 신의 법의 본질에 관한 논고(De Legibus ac Deo Legislatore)”는 자연법 사상의 중요한 텍스트로, 그는 법이 신적 기원뿐만 아니라 인간 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수아레스는 사회 계약설의 초기 형태를 발전시켰으며, 그의 사상은 후고 그로티우스 (Hugo Grotius)와 같은 국제법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법을 신성한 영역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근대적 법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3. 정치철학과 주권: 수아레스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논의를 펼쳤다. 그는 교회와 국가가 각기 다른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기관임을 주장하며, 국가 주권이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동의에 의해 정당성을 얻는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후대의 사회 계약론과 민주주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국가 권력이 남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 권위가 자연법과 이성적 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권력의 정당성을 논하는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4. 국제법과 전쟁 이론: 수아레스는 국제법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정당한 전쟁 (just war)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국제 사회에서 평화와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법적 기준을 제시했다. 수아레스는 국가 간의 갈등이 있을 때 무력 사용이 정당화되려면 일정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전쟁의 정당화 요건을 명확히 규정했다.
이러한 그의 전쟁 이론은 이후 국제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쟁 윤리와 국제 관계의 도덕적 기준을 논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5. 신학과 자유 의지: 신학에서 수아레스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신의 예정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했다. 그는 신의 은총이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예수회의 전통을 따르는 신학적 입장으로, 그는 칼뱅주의 예정론에 반대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를 옹호했다.
수아레스는 신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자유 의지를 통해 신의 구원의 계획에 협력할 수 있다고 보았다.
○ 수아레즈의 저서들
수아레즈의 저작 역시 다른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번 재판되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형이상학 논고> (Disputationes Metaphysicae, 1597)는 17세기 포르투갈의 예수회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리고 18세기 23 볼룸으로 구성된 베네치아판 (Venice edition)과 19 세기 후반에 나온 28 불롬으로 구성된 비베판 (Vivès edition)이 있다.
그 가운데 비베판은 1965년에 재출판되었다.
그리고 아직 수아레즈에 대한 현대 비판본은 없는 상태다.
- 주요 저서
Commentariorum ac disputationum in tertiam partem divi Thomae (1590).
Summae theologiae. De Deo uno et trino, I, 1607
Operis de religione (1625).
De incarnatione, pars prima (1745).
De incarnatione, pars secunda (1746).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