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월 19일, 대한민국의 화가 김인승 (金仁承, 1910 ~ 2001) 출생
김인승 (金仁承, 일: 金城仁承, 1910년 1월 19일 ~ 2001년 6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고 호는 지연 (智淵)이며 본관은 설성이다.
○ 생애 및 활동
김인승은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일제 강점기 경성부 종로방 명륜정(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바로 밑의 동생이 조각가 김경승이다.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김인승이 먼저 1932년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1937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초기의 작품 경향은 데뷔작 《나부》와 같이 사실적인 여성 인물화 위주였다.
김인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8년간 전쟁을 치르던 기간이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리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김인승은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등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수채화인 〈간호병〉은 조선식산은행 사보인 《회심》(會心)의 속표지화로, 군복 차림의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친일 미술인 모임인 단광회에서 집단 제작한 대작이며,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 작품이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몸은 비록 후방에 있지만 미술로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시국 전람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김기창, 심형구, 장우성 등이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 작가들이다. 그는 이들중 심형구와는 도쿄미술학교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의 평의원을 맡았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특히 김인승은 일제 강점기 동안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본식 독음에 따라 ‘Jinsho, Kin’이라고 적었고, 연도는 황기로 적어넣는 등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와 같은 경력으로 광복 후에 적극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꼽힌 김인승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 때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어 이후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협의회 한국위원장 등으로 한국 화단의 대부로 활동했다. 특히 서양화의 구상 계열에서 그의 영향력은 컸다.
1968년에 3·1문화상을 수여받았고, 1974년 이후로는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말년에는 〈들장미〉(1964), 〈장미〉(1973), 〈백장미〉(1985) 등 장미와 모란을 주로 그렸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은 이같은 후기 작품 경향에서 얻어진 것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약력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 덕수궁상 1937년~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연4회 특선 1939년 개인전, 삼원화랑
1947년~1972년 이화여대 미대 교수 및 학장 1949년~1981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1953년 제3회 국전 대통령상
1955년~1958년 대한미술협회 부이사장 1957년~198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3년 제5회 대한민국문화훈장
196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66년 이화여대 명예 문학박사학위 취득 1967년~1970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위원 1967년 국제조형미술 한국위원장, 국제미전(브라질 상파울루)
1967년 제5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1968년 3·1문화상
1969년 대한민국문화훈장동백장
1971년 개인전, 현대화랑
1973년 개인전, 아넥스갤러리(일본 동경)
1976년 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90년 개인전, Simmonson Gallery (미국 로스앤젤레스)
- 예술활동
1932년 미술공부를 위해 동경으로 떠나 학생신분으로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 봉축기념전’에 출품,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고 그 후 연속 4회 특선으로 선전의 추천작가로 활동하였다.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 정확하게 화면 위에 표현하였으며 객관적인 사실과 함께 주관이 가미된 새로운 리얼리즘의 표현을 시도하였다. 작품에 대한 김인승의 태도는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대상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관찰한 후, 주제를 어떻게 화면 위에 작품화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따라서 그는 주제의 표현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게 되었는데, 그 재현은 결국 객관적인 진실보다 주관을 충분히 가미한 새로운 리얼리즘의 표현이었다. 대상에 대한 관찰과 아울러 김인승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뛰어난 소묘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구성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김인승은 작품에 완벽성을 기했다. 굉장히 철두철미했으며 구성, 터치 등 모든 조형적 요소를 완전하게 이해해 나갔다. 김인승의 작품 세계 저변에 깔려있는 바탕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의 사실적인 미술기법을 이용하였으며 아주 모범적인 화풍에 기초하고 있다. 초기에는 여인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이국적인 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고 완벽한 표현과 마무리를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장미>시리즈는 최근의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역시 장미라는 물체를 꿰뚫는 정확한 관찰력과 그것을 부각시키는 수준 높은 솜씨에 의해 작품이 형성되고 있다. 초기의 나부시대든, 그 후의 풍경 내지 정물시대 건간에 자연을 보는 정확한 관찰과 그것을 박진감있게 다루는 뛰어난 기술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작품활동은 86세 때인 1996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중단했다.
- 대표작품
<풍경>(1951), <홍선>(1954), <청>(1966) 등
- 상훈과 추모
1963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3·1 문화상을 수상하고, 196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 평가
화가 김인승은 유채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캔버스 위에 정착시키는 기법을 추구한 전형적인 유화 화가이다.
그것은 화가 김인승이 우리나라 근대회화사상 회화의 본질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다루고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태도는 정확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면밀하고 정확하게 살펴보고, 그 다음에 그 주제를 어떻게 화면 위에 작품화하느냐에 고심한다.
따라서 주제를 눈에 비치는 대로 재현하게 되는데, 그 재현이 객관주의적인 진실보다는 그것에다 주관을 다분히 섞은, 그러한 새로운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사실계통의 작품은 사실상 오랜 세월 미술사의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자연의 연장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왔던 것이다. 이들의 예술 이념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창조의 모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자연보다 더 심오한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방이나 집안이라는 인조공간 속에 풍경화, 인물화 또는 정물화 같은 자연재현의 작품을 도입함으로써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내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부드러운 붓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룬 색감의 세계는 김인승 작품의 본질이 되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본질적인 것은 대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뛰어난 데생력에 있다.
자연을 형태와 색채로 나눌 수 있다면, 곧 형태는 사람의 몸과 같은 것이고 색채는 옷과 같은 것이다.
화가 김인승은 이 두 가지 일을 다 잘 다루는 우수한 화가이다. (……) 그의 예술의 바탕은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인 서양의 사실적인 미술기법이지만, 그의 조화로운 정신구조는 휘몰아치는 유행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존속하는 고전적인 조화와 균형의 세계를 나름대로 창조해온 데에 있다.
그의 유화작품은 뛰어난 기술의 표현으로서 작가의 우수한 능력을 드러낸다. 일상생활 중의 태도가 그러하듯이 단정한 마음가짐은 질서와 조화를 작품 내에서도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가 김인승은 한국 근대미술의 올바른 길을 걸어 왔으며 70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그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비록 몸은 이역 땅인 미국에 있지만 조국을 향한 마음과도 같이 꾸준히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천생 화가로 태어났고, 화가로 살아가는 노대가의 화업은 그의 생애를 수놓은 개인의 역정이지만, 또한 그것은 우리의 근대 회화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金仁承의 人間과 作品世界’, 李慶成(미술평론가)
○ 작품
<정물>(1936)
<여인누드>(1936)
<자화상>(1937)
<나부>(1936)
<화실>(1937)
<실내>(1937)
<인천항>(1938)
<나부 (裸婦)>(1938)
<문학소녀>(1938)
<덕수궁 (德壽宮)에서>(1939)
<촉석루>(1940)
<여인좌강>(1941)
<여인상>(1942)
<독서하는 여인>(1942)
<춘조 (春調)>(1942)
<무희>(1946)
<조모상 (祖母像)>(1947)
<독서하는 여인>(1953)
<홍선 (紅扇)>(1954)
<도기 (陶器)를 다루는 소녀>(1955)
<무대 뒤>(1955)
<소녀>(1957)
<들장미>(1964)
<향원정>(1964)
<청 (聽)>(1966)
<초하>(1972)
<소년상>(1972)
<모부인상>(1972)
<장미>(1973)
<백장미>(1985)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