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솔로몬은 시편 72편과 127편의 2편의 시편와 아가, 잠언, 전도서의 3권의 책을 썼습니다. 아가는 청년의 ‘사랑’, 잠언은 중년의 ‘지혜’, 전도서는 노년의 ‘통찰’에 대한 글입니다. 전도서의 주제는 ‘인생의 허무함’와 ‘하나님의 경외’입니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해 아래 인간의 모든 노력과 성취가 일시적이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장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로 결론을 내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1)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라는 교훈과 함께,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고 보존자이며 통치자입니다. 인간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거나 변경할 수 없기에, 겸손과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로마서 8:28).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보존자이고 통치자로서 우주와 인류 역사 전반을 이끌고 계심을 인정하는 태도를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에, 우리 인생에 어떠한 어려움이나 시련이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 소망을 찾고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토기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 하나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다를 수 있다. (사 55:8)
2)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인생은 형통한 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곤고한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Up and Down입니다. 갈멜산에서 대승을 했던 엘리야는 이세벨이 두려워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하다가, 천사를 만나 다시 일어나 호렙산으로 올라가 새 힘과 새 사명을 얻었습니다. 형통한 날은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곳입니다(롬14:17). 성령의 두번째 열매가 희락가 희락입니다(갈 5:22).
곤고한 날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민수기의 원래 제목은 ‘광야에서’입니다. 광야는 ‘미드바르’입니다. 같은 어근을 가진 ‘다바르’는 말씀, ‘드비르’는 지성소입니다. 인생의 광야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때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해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문제를 둘러싼 상황과 맥락은 무엇인지,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하나님은 이문제를 통해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인지, 등을 깊이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올바른 해석을 바탕으로 문제를 바라볼 때, 본질적인 해결책이나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형통과 곤고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의 삶을 다스리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계획을 의미합니다. 형통이 교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곤고하 절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3) 인간의 한계
“사람이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라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은 인간의 교만을 막고, 믿음과 겸손을 기르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신뢰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면 알수록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라는 말입니다. 시공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은 장래의 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고, 오늘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구원의 시작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12:7-10). 그는 세 번이나 하나님께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며, 그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게 만든 이유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하기에 강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우리는 그분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민수기는 베미드바르(Bemidvar)
베미드바르 (Bemidvar)는 민수기
‘베미드바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이다. 베미드바르는 ‘광야에서’ 혹은 ‘사막 속에서’라는 뜻을 가지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 아래 떠돌았던 광야를 지칭한다. 광야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 하나님과의 깊은 교류와 시험의 장으로 묘사되며, 세속적 의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체험하며 신뢰를 형성하는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 이 광야의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히 고난의 연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훈련과 변화의 시기였다. 특히, 광야에서의 매일의 만나와 구름 기둥, 불 기둥의 인도는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공급을 상징한다.
미드바르(Midvar)
‘광야’ 또는 ‘사막’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물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동시에 성경에서 독특한 신학적 상징성을 내포한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특별히 경험했던 장소로서, 고난과 훈련의 장이자 하나님의 지속적인 공급과 보호를 체험한 장소로 그려진다. 광야의 고난은 단순히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그들이 의존해왔던 세속적 안정감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급과 약속을 신뢰하는 훈련이었다. 또한, 이는 ‘말씀의 자리’라는 심오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히브리어 어원에서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와의 연관성은 광야가 단순히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장소, 즉 신성한 계시와 교육의 공간임을 나타낸다. 광야는 현대 신학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간주되며, 신자들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성장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의미한다.
다바르(Dabar)
‘말씀’ 또는 ‘사건’을 뜻하며,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능력 있는 말씀을 지칭한다. 다바르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현실을 변혁시키는 힘을 가진 도구로 나타난다. 동시에 이는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명령과 계시를 의미한다. 다바르는 단순히 언어적 표현 이상의 존재로, 창조적 역량과 변혁적 능력을 담고 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사건은 다바르의 창조적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이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미래를 결정짓는 사건으로 작용하며, 이는 말씀과 사건이 분리되지 않는 성경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다바르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며, 오늘날 신앙의 실천과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도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드비르(Dvir)
‘드비르’는 성전 또는 성막의 가장 신성한 공간인 ‘지성소’를 의미한다. 드비르는 언약궤가 보관된 성막 혹은 성전의 중심부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장소로 간주된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관계 및 화해를 상징하며, 신성한 만남의 핵심 공간으로 이해된다. 지성소는 단순히 건축적 중심지를 넘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장소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생활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특히,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던 이 공간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로써 드비르는 인간의 연약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화해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성경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화목 제사를 예표하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미드바르(광야), 다바르(말씀), 드비르(지성소)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곳이다.
소통 (Connection)과 불통 (Disconnection)
허준의 ‘동의보감’에 “통즉불통(通卽不痛)이요, 불통즉통 (不通卽痛)”이란 말이 있다. ‘통(痛)은 통한다’, ‘통(痛)은 아프다’란 뜻이다. ‘인간은 혈액순환이 안되면 아프고, 혈액순환이 잘되면 건강하다’란 의미이다. 이것은 한의학뿐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이다. 소통이란 ‘ 막히지 않고 잘 통함’, ‘뜻이 통하여 서로 오해가 없음’ 이란 뜻이다. 소통(Connection)의 반대는 불통(Disconnection)이다. 불통의 사전적 의미는 ‘회선이나 연락선이 끊겨서 통하지 않음’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견해 따위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다’이다. 건강한 인간은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3가지 소통을 하면서 살고 있다. 영적 존재로 하나님과 소통, 사회적 존재로 타인과 소통, 심리적 존재로 자기와 소통한다.
1) 하나님과 소통은 기도(Prayer)
인간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로 영이신 하나님과 이야기를 한다. ‘기도'(Prayer)이다. 하나님과 소통은 ‘생명'(Life)이고, 불통은 ‘죽음'(Death)이다. 죽음이란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에서 소통으로 전환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 성결이다. 성결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주 잘 소통된다는 뜻으로 기도의 깊이가 더욱더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신앙 상태를 알기 원하는가? 기도의 깊이를 점검해 보아라.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너와 소통은 대화(Conversation)
인간은 ‘사회적 존재(Social Being)’로 ‘너'(You)와 이야기를 한다. ‘대화'(Conversation)이다. 소통하면 ‘너'(You)이지만, 단절되면 ‘그것'(It)이다. 사회적 존재란 ‘너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뜻이다. 인간(人間)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존재이다. 또한 인간(Human Being)은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 가는 존재이다. 인생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사이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사이가 나쁜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 (창2:18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3) 나와 소통은 생각(Thought)
인간은 ‘심리적 존재(Psychological Being)’로 자기와 이야기를 한다. ‘생각'(Thought)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와 이야기하면서 산다. 뇌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을 하면 마치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반응을 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호르몬을 배출을 한다. 운동선수들은 육신적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한다. 오래 전 장미란 선수가 시드니에서 와서 간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마음으로 먼저 바벨을 들어야 실전에서 진짜 들을 수가 있다”고 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는 마음으로 먼저 장대를 뛰어 넘지 못하면 결코 육신으로도 넘을 수 없다고 한다.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자신과 소통(Connection)이 잘되면 자존감(Self Esteem)이 높아지고, 불통(Disconnection)하면 ‘자존감’이 낮아진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다르다. 자존심이 사람과 비교한 나라면, 자존감은 하나님 앞에서 선 나이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갈 만큼 나는 귀중한 존재이다. 자존심은 자기가 잘났다는 말이고, 자존감은 자기가 귀하다는 말이다. 강물은 강을 떠날 때 바다가 되고, 나무는 꽃이 떨어질 때 열매를 맺고, 사람은 자존심을 버릴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
솔로몬은 3권의 책을 썼다. 아기서는 청년 때에 쓴 ‘사랑에 대하여’ 이고, 잠언은 중년에 쓴 ‘삶의 지혜에 대하여’이며, 전도서는 노년에 쓴 ‘죽음에서 삶을 돌아본 지혜서’이다. 그가 전성기 때 쓴 箴言의 잠은 ‘바늘 잠’이다. “막혔던 인생의 문제를 ‘말씀의 침’으로 찔러 通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책 전체를 꿰뚫어 흐르는 주제는 삶의 지혜이다.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는 다르다. 지식이 머리로 아는 거라면, 지혜는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지식은 노력하면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잠언은 불통(Disconnection)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통(Connection)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산 소망이란? (벧전1:1-4절)
신약성서는 27권으로 되어 있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서 21권과 계시록이다. 서신서는 바울 서신 13권과 일반서신 8권으로 나눈다. 일반서신이라는 것은 수신자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에 후대의 학자들이 분류한 용어이며 발신자가 책 제목이 된다. 베드로 전서는 1장 1절에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낸 글이다.
‘아름다운 말의 도시'(The land of beautiful horses)라는 의미의 ‘갑바도기아'(Cappadocia)는 사도행전(2:9)에도 언급되어 있다. 지명이름이 ‘ia’로 끝나면 땅(Land)이란 뜻이다. 사람들 ‘Austria’ 와 ‘Australia’ 발음이 비슷하여 혼돈할 때가 많다. 하지만 Austria는 ‘The land of east’, Australia는 ‘The land of south’란 의미다.
갑바도기아에는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지하도시’(Underground City)가 있다. 그 중에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구유 지하도시’는 길이가 6k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2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살았다. 한편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로 각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세 위격(person)으로서 한 본체(essence)안에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베드로 전후서는 일명 ‘소망의 서신’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보낼 때의 시대적 배경은 곧 다가올 대 환난 곧 네로 황제에 의한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가 예견되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산 소망’을 굳게 잡음으로 닥쳐올 핍박을 이겨내라고 권면한다. 산소망은 ‘현실의 문제’를 이길 수 있는 소망이다. 만약 현실에 눌려 있다면 살았다고는 하지만 ‘죽은 소망이다. 작은 물고기라도 살아 있으면 역류할 수 있지만, 아무리 큰 물고기라도 죽어 있으면 현실의 물결에 밀려 갈 수밖에 없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 3절에 ‘산 소망’을 가지라고 했다. 구체적인 ‘산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부활 신앙’, ‘거듭난 신앙’, ‘천국 신앙’이 있어야 한다.
부활 신앙
고전 15장은 부활장이다. 바울은 만일(If)이란 단어를 통하여 ‘반어법’으로 부활에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14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6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19절)” 하지만 20절에 들어와서 그러나(But)’를 통하여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절) 그리고 15장의 마지막 58절에는 그러므로(Therefore) ‘부활 신앙’을 가지고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부갈등이 있지만 서양에서는 장모와 사위 갈등이 있다. 원하지 않게 장모와 사위가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갑자기 예루살렘에서 장모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같이 간 사람들은 고국까지 시신을 옮기면 절차도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들으니, 예루살렘에서 장례를 치르고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사위가 굳이 고국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미국에서 장례를 치렀다. 평상시 원수같이 지내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친구가 장례식를 마치고 조용히 물었다. “왜 그렇게 막대한 돈을 들여가면서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는가?”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루살렘에 잘못 묻으면 3일 만에 부활할 수도 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네!”
거듭난 신앙
요한복음 3장에 바리새인 중에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랍비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인 것 같습니다. 당신이 하는 표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2절) 예수님의 니고데모의 질문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말하는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해가 되지 않자, 니고데모는 다시 질문한다. “이 나이에 어떻게 다시 모태로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를 육신적인 차원으로 이해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셨다. ‘거듭나다(Born Again)’는 ‘Born Above’란 의미로 영으로 나야 한다는 뜻이다. 한번 태어나면 두번 죽고 두번 태어나면 한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거듭났다’, ‘성령세례 받았다’, ‘구원 받았다’, ‘영생 얻었다’, ‘죄사함 받았다’ 등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세례, 침례, 병사입대식’ 등은 거듭남을 고백하는 ‘내적인 은혜의 외적인 표현’이다. 만약 거듭남 없이 침례를 받는다면 ‘마른 죄인’이 ‘젓은 죄인’되는 것이다. 젓은 죄인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한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하지만, 종교생활은 율법으로 한다. 종교생활이란 ‘영의 일을 육으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하는 것’이다.
천국 신앙
우리는 이중 국적자이다. 육신으로는 이 땅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영으로는 하늘의 시민권(빌3:20)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사람이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 땅에 것에 집착하지 않고, ‘천국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천국의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결이다. 만약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육신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지 않겠는가, 돈이 떨어지면 불안하지 않겠는가, 권력을 잃어버리면 낙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본향이 이곳이 아니라 ‘천국’임을 믿고 여기에 사는 사람은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미래는 미래만의 문제가 아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내일 결혼식을 앞둔 사람, 장례식을 앞둔 사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사람 중에 오늘을 누가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답은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다. 내일의 ‘천국’이 오늘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신앙은 ‘There and Then’의 문제가 아니라 ‘Here and Now’의 문제이다. Here and Now의 삶은 내일의 ‘천국 신앙’에 달려 있다.
기복주의 신앙과 이기적인 신앙 (마태복음 5장 13-16절)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다. 사순절(Lent)이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시작하여 부활절 전날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성도들은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삶, 십자가의 고난, 부활 등을 생각하며 근신하고 회개하는 기간이다. 금년에는 2월 18일부터 시작하여 부활절(Easter) 전날인 4월 4일까지 사순절이 된다. 구세군에서는 사순절기간 동안 구세군 교회가 합력하여 24시간 40일 연속기도운동을 하고 있다. 3월 16일부터 18일인 월, 화, 수요일은 우리 교회의 기도순서이다. 또한 이기간 동안 ‘생활의 절제’를 통하여 모은 ‘극기헌금’ 으로 세계선교에도 동참하고 있다. 극기헌금의 기준은 1주간의 생활비이다.
마디그라(Mardi Gras)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날인 화요일을 ‘마디그라'(Mardi Gras)라고 한다. ‘마디그라’의 어원은 불어에서 왔다. ‘Mardi=Tuesday, Gras=Fat’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전, 영양보충을 하고 시작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시드니에서는 세상적 쾌락과 탐욕에 초점을 맞춘 동성연애자의 축제로 ‘마디그라’가 변질되었다. 올해도 시드니 ‘마디그라’는 2월 20일부터 시작하여 오늘 마감을 했다. 어제는 오후 3시부터 시드니 시내의 주요 도로를 전면 통제하는 마디그라 행진이 시내에서 있었다. 전 세계의 동성애자들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시내를 행진을 하였고, 환호하며 많은 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구경을 했다. 호주 정부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들의 행사를 예산까지 세워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015년 마디그라의 주제는 열정(Passion)이다. 알고 있는가! 방향 없는 열정은 자유가 아닌 ‘방종’이라는 것을!
성시화(Holy City Movement)
시드니에 ‘성시화 운동'(Holy City Movement)이 태동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마디그라’(Mardi Gras)이다. 아름다운 시드니가 동성애자들의 아이콘의 도시가 되었다. 이에 시드니를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로 환원시키겠다는 각오로 2007년부터 ‘성시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양일간 집회 후에, 성시화의 하이라이트인 행진이 시내의 ‘벨모아 팍’에서 출발하여 ‘마틴플레이’까지 이어진다. 시내에서 있는 행사는 두 단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집회를 할 때는 시드니 카운실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행진을 할 때는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양측의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한해는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행진을 하는 날과 St. Patrick Day의 행진과 날짜가 겹친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어서 그런 행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성시화 행진 신청은 작년 10월에 했었고, 행사가 가까이 오면 연락을 주겠다는 이 메일을 받았다. 소식이 없어 3주전에 경찰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난색을 표하면서 “올해는 St. Patrick Day March와 겹쳐서 날짜를 옮길 수 없겠냐?”는 것이다. “광고는 물론, 순서지도 다 만들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확답 없이 다음 주에 회의를 해서 수요일에 연락을 주겠다는 했다. 성시화 준비 모임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되었다고 보고를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관님 잘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보고하는 나만 믿음 없는 놈이 되었다. 하지만 약속한 수요일에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뛰어 넘었다.
(그해) 2월 25일 국회에 갔다. 성시화를 돕고 있는 ‘프레드 나일’ 목사를 만나기 위해서 있다. 행진의 진행과정을 설명하고 직접 책임자에게 전화를 걸어 줄 것을 부탁했다. 나일 목사는 전화를 했다. 상원의원이 직접 걸으니, 내가 걸을 때보다는 유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카운실과 시티 교통 관계자와 만난 후에 결과를 금요일에 알려 주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일 목사는 ‘경찰청장’에게 전화를 했다. 나일 목사와 경찰청장은 오랜 친구 사이다. 상황을 들은 경찰청장은 간단하게 말했다. ‘No Worry, I will fix it’. 금요일 아침 모금 후 집으로 가는 도중에 담당 경찰에게 전화가 왔다. “성시화 행진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예정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3월 15일 벨모아 팍에서 뵙겠습니다.”
개인구원과 공동체 구원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구원과 공동체 구원’이 함께 간다. 개인이 구원 받았다는 것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구세군의 ‘Saved to Save’ 잘 표현된 모토인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가정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서, 사회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하겠지만, 이 땅에서는 공동체에 속한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야 한다. 단독자란 믿음 좋은 ‘부인의 신앙’ 덕분이나, 나를 위한 ‘부모님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의 단독자’는 이 땅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어떻게 살았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겼을 때는 보관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이익을 남기라는 것이 아닌가!
기복주의 신앙 (Prosperity Gospel)
한국 교회의 위기는 ‘기복주의 신앙과 이기적인 신앙’이다. 祈福이란 복 받기를 위하여 빈다는 말이다. 성경에는 시편 1편을 비롯하여 ‘복’이란 단어가 수없이 등장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기복주의 신앙’이란 복을 물질적인 복으로 전락시키고, 그 물질이 신앙의 기준이 된 것이다. 더 많아지고, 더 높아지고, 더 건강해지면 믿음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목적이신 하나님도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돈이 신이 된 맘모니즘(Mammonism)이 교회에 팽배하게 되었다. ‘세상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치관’이 동일시 된 신앙이 바로 ‘기복주의 신앙’이다.
이기적인 신앙 (Selfish Gospel)
‘이기적인 신앙’이란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자기만 구원받고 잘살면 된다는 신앙이다. 천국 문에 이런 말이 써있다고 한다. “단체입장 환영 개인입장 불가”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방관하다 보니, 사회가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도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전락되고 있다. 지난주 삼일 운동의 사건을 통하여 인구의 1.5% 정도뿐이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이 민족의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간 것을 보았다. 한국 기독교 인구가 20%가 넘는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제는 세상 사람들에 의하여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과거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요즘은 이런 말을 한다. “아니 저 청년은 착한 일을 많이 하는데도, 교회 다닌다네!”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싸우면, 옆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왜 여기서 싸워요, 여기가 교회인 줄 아세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했다.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빛은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며, 음식의 맛을 돋우는데 사용한다. 우리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지고, 우리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깨끗해져서, 우리 때문에 살 맛나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 채스우드 한인교회)